"동화책을 읽을 때마다 이런 건 동화 속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내가 그 동화 속에 와 있는 거잖아! 나에 대한 책이 쓰여야 해."
— 앨리스
도대체 얼마나 떨어졌을까?
이곳의 경도와 위도는 어떻게 될까?
— 인천에서 캘거리, 12시간 비행
서울에서 12시간, 캐나다 서부에 있는 밴프와 레이크루이스라면 동화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주인공처럼 여름에도 한바탕 겨울 꿈을 꿀 수 있다. 1865년에 영국의 수학자이자 작가인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이 루이스 캐럴이라는 필명으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발표했다. 그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리던 영국의 전성기에 소설을 집필했다. 도지슨에게는 산업혁명으로 급격하게 변하는 영국이 낯설고 이상했다. 말하는 토끼를 따라 굴에 들어간 앨리스가 갑자기 아래로 뚝 떨어지는 것과 비슷했다.
지구본에는 세로선과 가로선이 있다. 세로선의 경도를 통해 지역의 시간을 알 수 있고, 가로선의 위도를 통해 지역의 기후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위도는 동경 127°, 북위 37°다. 손가락으로 인천을 콕 찍고 지구본을 반 바퀴 돌리면 서경 95°, 북위 60°인 캐나다에 도착한다. 즉 한국과 캐나다 사이에는 약 반나절에 해당하는 13시간의 시차가 있다. 인천에서 비행기가 뜨기 직전에 본 시각은 오후 7시 30분이었다. 밴쿠버를 경유해 캘거리까지 12시간이나 날아왔는데도 여전히 같은 날 똑같은 오후 7시 30분이다. 꼬박 반나절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나를 포함한 취재원들, 사진가, 가이드 총 6명은 캘거리에서 포드 트랜짓 350을 타고 캐나다 서부 앨버타주에 있는 밴프국립공원으로 이동했다. 1885년에 로키산맥의 일부를 밴프국립공원으로 만들었으며 캐나다에 있는 국립공원 중 가장 오래됐다. 이 글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책장을 넘기며 4박 6일 동안 밴프와 레이크루이스를 여행한 이야기다.
토끼가 ‘이런, 너무 늦겠는걸!’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렇게 이상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 밴프타운의 야생동물 표지판
앨리스는 시계 토끼가 조끼를 입고 뛰어가며 중얼거리는 모습에도 놀라지 않는다. 이미 이상한 나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야생동물이 종종 출몰한다는 밴프타운에 시계 토끼가 나타나면 주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침대 옆에 있는 시계가 새벽 4시 30분을 표시하고 있다. 시간을 멍하니 보내기 아까워 겉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눈이 옅게 깔린 도로는 바퀴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다. 밤사이에 차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은 모양이다.
생각보다 날씨가 따뜻해 장갑을 빼서 주머니에 넣으려는데 전날 메모지로 사용했던 종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마침 길가에 커다란 쓰레기통이 보여 덮개를 위로 잡아당겼으나 강력접착제로 고정이라도 된 것인지 도무지 열리지 않는다. 당황한 내 옆으로 파란색 점퍼를 입은 현지인이 다가왔다. 덮개 중간 부분으로 손을 넣어 안쪽을 눌러야 쓰레기통이 열린다고. 혹시나 야생동물이 쓰레기통을 마구 뒤지다가 상한 음식을 먹거나 날카로운 물건에 다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밴프에는 네온사인을 사용한 간판이 없다. 야생동물이 불빛에 놀랄 수 있기 때문이다. 생활용품을 파는 가게에도 ‘물소에게 먹이를 주지 마세요’ 같은 팻말이 우리나라의 ‘아이가 타고 있어요’ 만큼이나 꽤 여러 곳에 비치돼 있다. 웃으며 지나가는 현지인 뒤로 거리 이름이 적힌 표지판이 눈에 띈다. 무스moose 스트리트, 울프 스트리트, 래빗 스트리트. 이곳에서는 북미 사슴, 늑대, 토끼 등이 동네 주민이다. 밴프에 사는 사람들이 시계 토끼를 본다면 이런 말을 할지도 모른다. “이웃집에 사는 토끼 씨가 어제 월급날이었는지 시계를 바꿨더라고.”
무엇인가 먹기만 하면 재밌는 일이 생기잖아?
먹고 나서 키가 더 커지면 열쇠를 집을 수 있겠지.
혹시 더 작아진다면 문 밑으로 기어 나갈 수 있고.
— 퍼지·초콜릿·캔디 숍 투어
앨리스는 시계 토끼를 따라 작은 문을 나서기 위해 ‘날 마셔요’라는 꼬리표가 달린 병의 음료를 마신다. 키가 줄어들어 기뻐하던 앨리스는 탁자 위에 있는 열쇠에 손이 닿지 않자 좌절한다. 그때 탁자 밑에 건포도로 ‘날 먹어요’라는 말이 적힌 케이크가 보인다. 밴프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인 밴프애비뉴는 3층을 넘는 건물이 없어 소인국에 들어온 느낌이다. 왠지 ‘날 마셔요’ 꼬리표가 달린 병의 음료를 마셔야 문을 드나들 수 있을 것 같다. 1930년대에 지어진 색색의 상점들이 큰 도로를 기준으로 양쪽에 길게 늘어서 있다. 낮은 층 덕분에 마을 너머로 캐스케이드산이 한눈에 보인다.
남색 바탕의 간판에 밴프 스위트 쇼페Banff Sweet Shoppe라고 황금색으로 적혀 있다. 작고 네모난 안경을 쓴 캐나다 할아버지가 깃털 달린 만년필로 썼을 법한 글씨체다. 꼬리가 길게 늘어난 알파벳 f와 p 아래로 캔디 핑크색 문과 작은 라탄 바구니가 달린 자전거가 보인다. 안으로 들어가니 황금색 샹들리에가 좁은 간격으로 붙어 있고 고동색 진열대마다 다양한 사탕과 초콜릿이 유리병에 담겨 있다.
2002년에 문을 연 밴프 스위트 쇼페는 퍼지를 모두 손으로 만든다. 상점의 직원인 숀은 17년 동안 단 한 번도 기계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퍼지의 모양이 일정하지 않고 울퉁불퉁하다. 퍼지 외에도 곰 발톱, 거북 등 야생동물의 이름을 딴 초콜릿과 캐나다 사람들이 놀이동산에서 주로 먹는 솔트 워터 태피(해수를 넣어 만든 사탕) 60여 종을 이곳만의 레시피로 만들고 있다.
고양이야,
내가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가르쳐줄래?
— 설퍼산 정상 기상관측소에 오르는 길
체셔 고양이는 길을 묻는 앨리스에게 조언한다. 어디로 가든 상관없다면, 어디로든 가면 된다고. 계속 걷다 보면 분명 어딘가에는 도착한다고 이야기한다. 해발 2286m 높이의 설퍼산Sulphur Mt.에는 100년이 넘은 기상관측소가 있다. 가는 길이 구불구불해 앨리스처럼 길을 물어야 할 수도 있다. 굽은 길에 들어서려면 먼저 곤돌라를 타야 한다. 오전 10시쯤 설퍼산에 있는 밴프 곤돌라 탑승장에 도착했다. 49캐나다달러(왕복)를 내고 곤돌라에 탑승했다. 작은 창문을 살살 밀어서 열자 뿌옇던 시야가 선명해지고 밴프의 정수리가 선명하게 보인다.
건너편에 샌슨 픽이라는 봉우리가 있다. 샌슨 픽은 이곳을 천 번 넘게 오간 캐나다의 기상학자 노만 샌슨의 이름을 땄다. 토론토에서 태어난 샌슨은 1896년부터 밴프 파크 뮤지엄의 큐레이터로 일하면서 기상학을 연구했다. 1903년에는 그의 요청으로 샌슨 픽에 기상관측소가 지어졌다. 샌슨은 1945년까지(당시 84세) 꾸준히 이곳을 오르며 날씨를 예보했다.
샌슨이 흙을 밟고 산을 오르던 과거와 달리 현재 기상관측소로 가는 길은 나무 계단과 난간으로 정돈돼 있다. 경사가 시작되는 지점 바닥에 고정된 망원경이 눈에 띈다. 타원형 몸체 양옆으로 손잡이가 귀처럼 달려 있고, 원형의 검은색 렌즈 두 개가 외계인의 눈동자를 떠올리게 한다. 한참을 말없이 걷는데 다람쥐가 쪼르르 지나간다. 움직임을 따라 고개를 드니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산과 구름이 맞닿아 있다.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마치 산이 구름을 퐁퐁 뿜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무릎을 부여잡고 간신히 꼭대기에 도착했다. 미끄러지지 않으려 양옆에 설치된 안전 줄을 잡고 기상관측소 앞으로 갔다. 낡은 침대, 작은 책상, 오래된 난로 등 샌슨의 손길이 묻은 물건이 가득하다. 그에게 이곳은 일터가 아닌 일상이었다.
주변에 있는 꽃과 풀잎들을 살펴보아도
이런 상황에서 마땅히 먹을 것을 찾기는 힘들 것 같았다.
— 존스턴캐니언과 수상한 이끼
작아진 몸으로 이상한 나라를 돌아다니던 앨리스는 커다란 개와 마주친다. 자신의 몸을 원래의 크기로 되돌리기 위해 무언가 먹을 만한 것이 있나 두리번거리지만 주변에는 꽃, 풀잎, 버섯뿐이다. 이어지는 하이킹 코스에서는 간혹 조난 사고가 발생해 사람들이 이끼로 수분과 영양을 보충하기도 했다.
차량으로 약 1시간을 이동해 존스턴캐니언 초입에 다다랐다. 하이킹 전문가 매튜가 파란색 차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존스턴캐니언에는 로어 폭포와 어퍼 폭포가 있다. 로어 폭포는 왕복 2.2km의 거리로 약 1시간 정도가, 어퍼 폭포는 왕복 2.6km의 거리로 약 2시간 반 정도가 소요된다. 목표는 어퍼 폭포다! 속으로 다짐하며 쿵쿵 소리가 날 정도로 걸었다. 이렇게 발을 지면 깊숙이 박는다는 느낌으로 걸어야 얼음으로 뒤덮인 길에서 끄러지지 않는다고. 하지만 막상 조언을 한 매튜는 전문가답게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여유롭게 걸었다.
일자로 쭉쭉 뻗은 나무들 사이에 S자 모양의 나무가 떡하니 서 있다. 어떻게 이렇게 자랐을까 싶어 팔을 뻗었다가 불쾌한 감촉에 얼른 손을 거뒀다. 자세히 보니 옅은 노란색 이끼가 나무에 붙어 있다. 빗질을 하지 않은 산타클로스의 수염처럼 얼기설기 얽혀 있다. 올드 맨스 비어드Old Man’s Beard 이끼는 최장 20cm까지 자라며 공기가 깨끗한 지역에서만 볼 수 있다. 목의 통증을 완화시키거나 피부의 감염을 소독하는 데 효과가 있다. 반면에 위치스 헤어Whitch’s Hair 이끼는 균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먹어서는 안 된다. 습도가 낮고 바람이 많이 부는 곳에서 잘 자라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처럼 보인다. 주로 기저귀, 붕대, 판초, 신발을 만들기 위한 재료나 무도회용 가면의 가짜 머리카락으로 사용됐다. 어퍼 폭포 옆으로 몇몇 사람이 암벽을 등반한다. 감탄하는 사이 매튜가 가방에서 보온병과 플라스틱 컵을 꺼냈다. 핫초코를 마시니 몸에 긴장이 풀려 아예 주저앉아서 쉬고 싶어진다. 하지만 누군가의 수염이나 머리카락을 먹지 않으려면
더 늦기 전에 내려가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너와 나만의 비밀이니까.
— 캐슬정션에서 별을 보다
하트 여왕이 만든 타르트가 사라지자 하트 잭 카드가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린다. 재판장에 있던 시계 토끼는 비밀을 지켜달라는 글귀가 씌어 있는 쪽지를 실마리처럼 발견하게 된다. 비밀은 까만 밤하늘의 별과 같아서 어두운 곳에 숨어 있다가 어느 순간 반짝하고 존재를 드러낸다. 오후 8시 30분쯤 남색으로 물들어가는 디어 로지 호텔 로비에서 천체사진 전문가 닉 피츠하딩Nick Fitzhardinge을 만났다. 2013년부터 로키산맥을 중심으로 포트폴리오를 쌓고 있는 그는 오로라 사진으로 잘 알려진 캐나다 포토그래퍼 폴 지즈카Paul Zizka의 작품을 본 후 천체사진에 빠졌다.
디어 로지 호텔에서 남쪽으로 30분을 달려 캐슬정션Castle Junction에 도착했다. 불빛이 하나도 없어 시야가 흐릿하다. 느린 걸음으로 투박한 돌길을 걸었다. 땅과 경계과 모호해져 나무들이 그림자 연극을 하고 있는 것처럼 검다. 피츠하딩이 카메라를 삼각대에 고정하고 천체사진 촬영에 돌입했다. 그는 삼각대의 고개를 꺾어 카메라 렌즈가 하늘을 향하도록 했다. 나도 렌즈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이 보이기는커녕 온통 깜깜하기만 하다. 피츠하딩은 손으로 화면을 몇 번 터치해 설정을 바꾸고 셔터를 눌렀다. 지나치게 고요한 탓에 작은 셔터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곧이어 몇 초 동안 느긋하게 기다리던 그가 사진이 나왔다는 신호로 손짓을 했다. 헐레벌떡 다가간 화면에 보이는 풍경은 어두운 실물과 달리 분홍색, 보라색, 남색으로 번져 있었다. 예상보다 더 많은 별이 하늘에 총총 박혀 있다. 카메라는 내 눈보다 훨씬 예리해 흉부 속 심장을 보여주는 엑스레이처럼 숨겨진 별까지 속속들이 보여주었다.
오늘의 이야기를 들려줄게요.
어제로 돌아가서 이야기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지금 저는 어제의 제가 아니니까요.
— 꽁꽁 언 레이크루이스
하루아침에 키가 줄었다 자랐다 하게 된 앨리스에게 어제와 오늘은 완전히 다르다. 사람들은 보통 레이크루이스의 여름을 기억한다. 페어몬트 샤토 레이크루이스 호텔과 빅토리아산 사이를 가득 메운 청록색 호수를 기대한다. 하지만 어제의 물빛을 이야기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오늘 만난, 레이크루이스의 겨울을 이야기하려 한다.
포슬포슬 내리는 눈을 맞으며 새하얀 레이크루이스에 발을 디뎠다. 몇 걸음 못 가 다리가 무릎까지 푹푹 빠진다. 30분 정도 눈과 사투를 하고 나니 온몸에 힘이 빠져 그 자리에 누워버렸다. 레이크루이스라는 이름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넷째 딸이자 1878년부터 1883년까지 캐나다 총독으로 재직했던 존 캠벨의 아내인 루이스 캐롤라인 앨버타를 따라 지어졌다. 캠벨 총독은 레이크루이스가 자신이 본 호수 중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 부인의 이름을 붙였다. 그가 보던 호수는 지금 없다. 하지만 그 한가운데 누워서 보는 하늘이 어쩌면 여름의 청록색 호수와 닮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 외투를 입지 않은 사람이 다섯명 정도 있다. 눈이 오는데도 춥기는커녕 쏟아지는 햇볕 때문에 따뜻하다. 겨울과 봄 사이에 이름 지어지지 않은 어느 계절의 온도 같다. 레이크루이스의 눈은 샴페인 스노라 불리기도 한다. 바람이 많이 부는 고지대에 위치한 까닭에 눈이 건조해져 결정체가 한 알 한 알 또렷하게 반짝이기 때문이다. 정면에 있는 빅토리아산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블랙 스완> <더 킹> 등 영화음악으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 피아니스트 루도비코 에이나우디는 북극 연안의 한복판으로 피아노를 가져가 음악을 연주했다. 그는 북극을 보존한다는 그린피스 캠페인의 일환으로 ‘북극을 위한 비가’를 작곡했다. 레이크루이스와 잘 어울리는 곡이라고 생각했다. 북극과 유사하게 야생동물이 많고 침엽수가 자라는 이곳이 계속해서 이상함을 보존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음악을 틀었다.
카드가 공중으로 날아오르더니 앨리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손으로 막으려는데 문득 자신이 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언니는 앨리스의 얼굴로 떨어진 낙엽을 살며시 쓸어내렸다.
— 윈터 랜드에서 리얼 랜드로
눈밭을 헤치고 페어몬트 샤토 레이크루이스 호텔로 돌아왔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호텔 입구에서 발을 굴러 신발에 묻은 눈을 털어냈다. 정면에 보이는 시계의 뾰족한 바늘이 12시를 가리키고 있다. 초침이 째깍하고 움직여 오전이 오후로 바뀌는 순간, 마법이 탁 풀렸다.
하지만 밴프는 여전히 이상하다. 길거리에 있는 쓰레기통은 야생동물을 중심으로 만들어져 있고 거리나 초콜릿의 이름조차 늑대, 곰 등이다. 나무에 붙은 이끼들은 누군가의 수염이나 머리카락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눈이 펑펑 오는데도 반소매 옷을 입고 돌아다닌다. 이상이라는 단어는 뒤에 오는 말에 따라 의미가 확연히 달라진다. ‘이상하다’는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이며 ‘이상적인’은 가장 완전한 상태를 말한다. 가만히 있는 밴프를 내 기준에 맞추어 이건 이상한 것, 저건 이상적인 것으로 판단하지 않았을까.
나는 지금 한국에서 여름을 지내고 있다. 매일 같은 일상의 반복이지만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앨리스가 눈을 감으면 얼굴 위로 떨어지는 낙엽이 카드 병정으로 변하는 것처럼 일상과 이상은 맞닿아 있다. 밴프와 레이크루이스의 겨울 나라로 가는 입구는 내가 앨리스로 변하는 순간 언제나 열릴 것이다. 이 사실이 무더운 여름의 작은 위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