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의 시간을 조망하다
- 2005년까지 100여 년 동안 미얀마의 수도였던 양곤의 시간을 마주하다.
나는 지금 양곤Yangon 시내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발견한 슐레 스퀘어Sule Square 앞 육교에 서 있다. 복잡한 도심과 슐레 사원이 함께 내려다보일 것이라는 예상이 들어맞았다. 남쪽의 사거리를 내려다보니 양곤 도심 한가운데 금빛의 웅장한 슐레 사원Sule Pagoda이 빛나고, 그 오른쪽에는 지어진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최신식 고층 건물이 솟아 있다. 사원 앞으로 내뻗은 도로에는 외국에서 중고로 수입한 버스들이 분주히 오간다. 도로 양쪽으로는 식민지 시대에 지어졌을 법한 오래된 유럽풍 건물이 늘어서 있다. 시선을 돌려 아나라타로드Anawrahta Road의 서쪽을 바라본다. 경적 소리가 끊이지 않고, 오래된 디젤 차량이 매캐한 연기를 내뿜으며 지나간다. 나는 양곤의 모든 모습을 한자리에서 본 듯한 느낌에 휩싸여 가만히 서 있었다.
도시와 건축에 관심이 많은 나는 새로운 장소와 마주할 때 건물들이 보여주는 점, 선, 면을 발견하곤 한다. 양곤 마하반둘라Maha Bandula 공원 근처의 구도심을 거닐며 영국 식민 시대의 건물을 살펴본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낡은 유럽풍 건물들이 보여주는 색채가 오묘하다.정부 기관의 청사로 쓰이는 영국 식민지 시대의 건축물들을 둘러보던 중 부산 동래구에서 운행하던 8번 마을버스가 눈앞으로 지나간다. 5년 전이나 10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 돌아다니던 시내버스가 도색도 표지판도 노선도도 바꾸지 않은 채 양곤 승객을 태워 운행 중이다. 빛바랜 양곤의 옛 건물과 자동차들이 신선하고도 정겹다.
양곤 순환열차
- 느리고, 오래되고, 불편하지만 양곤의 열차는 교통수단이라기보다 삶을 위한 공간인 것만 같다.
Railway Station의 안내문은 숫자조차 미얀마어로 표기돼 있다. 기차 시간표를 도통 알아볼 수 없으니 가이드의 안내를 기다릴 수밖에. 한참이 지나도 열차가 오지 않아서 알아보니 작년 시간표였다! 결국 차로 15분을 이동해 가까운 캬니민타인Kyeemyindaing 역으로 갔다. 양곤 순환열차가 아담하고 낡은 역사의 플랫폼으로 들어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정차한다. 오래된 일본 기차를 수리한 열차 출입문에는 안전장치도 없다. 객실에는 고장난 선풍기, 열어둔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어 바람을 쐬는 사람들, 보따리 상인들이 눈에 띈다. 객실에서 상인들이 과일이나 그 자리에서 비벼낸 국수 같은 음식들을 판다. 열차는 양곤을 둘러싼 37개 역을 3시간에 걸쳐 순환하는데, 요금은 한국 돈으로 150원이다.
아시아의 중세를 달리다
- 불국토를 꿈꾸던 고대인의 도시 바간은 오토바이, 자전거, 마차를 타고 달리기 제격이다.
마치 1000년 전 미얀마로 이동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곳. 미얀마 북서부에 위치한 바간Bagan에는 중세 아시아의 정취가 가득하다. 2000개 남짓한 파고다가 터를 잡은 바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어, 현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비포장도로와 풀숲 사이 사이에서 오랜 시간 동안 자리를 지켜온 파고다를 발견할 때마다 시간 여행을 온 듯 그 정취에 빠져들었다.
마차를 타고 오솔길을 돌고 돌아 옛 바간 왕조의 영역으로 알려진 올드바간Old Bagan으로 향한다. 작은 파고다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보니 마을이 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가정집과 상점들 앞으로 아무것도 없는 흙바닥에서 공을 차고 노는 아이들과 뿌연 담배연기를 뿜으며 자전거를 고치는 동네 사람들을 맞닥뜨렸다. 스코틀랜드의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제작된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아시아판이라고나 할까. 영화나 게임 속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바간 왕조 시대 사람이 불현듯 나타나 말을 걸어올 것만 같다.
몇 년 전까지 바간의 높은 파고다에 올라 일출이나 일몰을 감상하곤 했다고 한다. 2016년 큰 지진으로 많은 파고다가 무너져내린 이후 파고다에 오르는 것이 금지됐다. 대신 드넓은 바간 전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도록 새롭게 세운 ‘난민타워NanMyint Tower’라는 높은 전망대에 오른다. 수천 개의 파고다보다 높은 유일한 건물인 난민타워13층에서 내려다보는 바간의 풍경과 그 뒤로 떨어지는 석양에 눈을 뗄 수 없다. 태양이 구름 뒤로 숨어들자 온화하게 빛나던 바간의 나지막한 스카이라인에 땅거미가 내려앉는다.
삶이 샘솟는 호수
- 인레 호수의 수면을 가르며 호수 위 삶의 터전과 일상을 일구는 방법을 발견하다.
넓고 맑은 푸른빛 호수를 가로지르며 풍경을 바라보는 일은 미얀마 북서쪽에 위치한 인레 호수Inle Lake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이다. 보트에 달린 1기통 엔진의 요란한 소리는 여행이 끝난 지금도 귓가에 맴돌곤 한다. 사람들은 큰 배를 타고 노를 손으로 젓거나 그물로 호수의 나무와 풀을 채취한다. 나무로 된 수상 가옥의 지붕 색도 다채롭다. 예쁜 파스텔 톤의 건물과 오래된 나무의 갈색이 두드러지는 건물이 있는가 하면 저 멀리 금빛 파고다도 보인다. 인레 호수를 끝에서 끝까지 배로 가로지르려면 한 시간이 걸린다. 해발 875m에 위치한 인레 호수는 그 면적이 여의도의 40배에 이른다. 약 1500명의 인따족이 거주하는 호수를 한 바퀴 에워싸는 길이 있지만 호수 자체가 워낙 크고 도로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에 보트를 주로 사용한다.
‘인따Intha’는 미얀마어로 ‘호수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의미 그대로 인레 호수는 인따족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준다. 베트남의 메콩Mekong강처럼 인따족 사람들은 호숫가에 대나무나 통나무로 된 수상 가옥을 짓고 산다. 호수는 인따족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한다. 수상가옥 주변에는 수초더미를 붙여 물 위에 떠 있는 텃밭을 만들어 농사를 짓는다. 빨래하거나 몸을 씻을 때는 호수 물을 바로 이용한다. 호수 중앙에 있는 깨끗한 물은 식수로 사용한다.
모터보트를 타고 길쭉한 모양의 호수를 남북으로 가로질러 가다가 호수 한가운데 이르러 거대한 통발을 든 어부를 발견한다. 인레족의 전통적인 낚시 방법이다. 새벽에 통발을 챙겨 진짜 낚시를 나서는 사람도 있지만 여행 중에 만나게 되는 어부는 포즈를 취해 주고 팁을 받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독특하게 발로 노를 저으면서 사람 상체보다도 큰 통발로 물고기를 잡는 모습이 이색적이라 피사체로 훌륭하기 때문이다. 인레 호수의 5일장이 열리는 냥쉐Nyaungshwe 마켓에서는 호수에서 잡은 물고기와 호수 위에서 직접 키운 채소를 판매한다.
호수 사이로 난 좁은 물길을 따라 한 시간 넘게 보트로 달리니 파오족의 터전이기도 한 인데인Inthein 유적지에 도착했다. 쉐인데인Shwe Inn Thein파고다는 이곳에서 가장 큰 파고다군(群)이다. 샨 지방 특유의 뾰족한 모양을 한 수백 개의 파고다는 언덕 위에 수없이 늘어서 있어 거대한 금빛 파고다를 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을 선사한다. 냥오학Nyaung Ohak 파고다 앞에 있는 작은 선착장에서 쉐인데인 파고다까지는 도보로 15분 거리다. 700m 남짓한 통로 양쪽에 늘어서 있는 돌기둥의 흰색 도장이 곳곳에 벗겨져 오랜 세월을 가늠케 한다. 햇살이 내리쬐는 대낮이지만 기둥으로 촘촘히 둘러싸인 실내는 갈색을 띠어 어둑어둑하다.
멀리서 사람들이 걸어오는 길의 소실점이 언젠가 아주 오래된 집에서 보았던 옅은 녹색으로 물들었다. 노점에서 음식을 파는 노란 옷을 입은 여성이 길 반대편을 바라본다. 새로운 손님들이 오려나 기대하는 눈치다. 하지만 걸어온 사람들은 파고다를 찾는 승려였고, 이내 스쳐 지나갈 뿐이다. 쉐인데인 파고다로 가는 이 길목에서 인레 호수의 고산지대에서 살아가는 파오족 일상을 좀 더 포착하고 싶다. 고개를 돌리자 화려한 두건을 머리에 두른 파오족 할머니가 먼 곳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운다. 한 줄기 빛이 그의 거친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를 비춘다. 연기가 두둥실 떠오른다. 그들만의 아득한 세월을 여행하는 이 시간을 꿈결처럼 돌아본다.
한 땀 한 땀 빚은 그릇과 음식
- 장인들의 칠기 그릇, 달인이 채취한 야자 열매, 색다른 식재료 가득한 시장을 살펴보다.
미얀마 전통 칠기 예술 그릇으로 알려진 ‘라꽈Lacquer’ 공방의 한 직원이 대나무를 엮어 그릇을 만들고, 그 옆에 있는 동료가 그 그릇을 사포질해 유약을 바르고 있다. 건조 처리까지 마치고 난 검은색 그릇은 반짝반짝 윤이 난다. 여기에 하나하나 손으로 무늬를 새긴다. 여인 여럿이 마룻바닥에 앉아 새끼손가락의 5분의 1 크기도 되지 않는 아주 미세한 무늬를 확대경도 없이 눈으로만 지켜보며 손으로 직접 무늬를 넣고 있었다. 그 옆의 여인들은 이쑤시개처럼 생긴 침 끝에 염료를 조금씩 묻혀 채색을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제작한 그릇을 ‘라꽈’라고 한다. 작은 그릇부터 커다란 화분이나 장식용 예술품까지 다양한 크기와 종류의 제품이 전시돼 있었고 큰 화분의 가격은 한화 수백만 원에 달했다. 카빙Carving을 하는 기술자들은 하루에 1만~2만 원 정도의 급여를 받는다고 한다. 미얀마 양곤에서 대졸 초임 졸업자의 월급이1 0만원 정도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바간은 크게 3곳으로 나뉜다. 유적지가 많은 옛 바간 왕조 지역 ‘올드바간’, 시장과 식당 게스트하우스가 많은 ‘낭우Nyaung-U’, 새롭게 형성된 주거 지역 ‘뉴바간New Bagan’이 있다. 그중 낭우 북쪽의 이라와디Irrawaddy강 근처의 낭우 전통시장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인데도 도로 포장이 전혀 돼 있지 않아 신기했다. 나무로 만든 가건물에 천막을 덮어씌워 어두컴컴한 시장에는 채소를 파는 식료품 가게와 기념품 가게가 즐비하다. 씹는 담배로 알려진 꽁야Kun-ya를 만드는 빈랑Betel Palm 잎과 열매를 팔거나 과즙을 사방으로 튀기며 사탕수수를 칼로 내리쳐 자르는 상점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시장을 나선다.
무성한 풀숲과 작은 상점 사이로 난 도로를 지나, 바간 교외로 난 흙길을 40분가량 달려 단카인Dan Kyin지역에 있는 와인 팜 와인 앤드 미얀마Wyne Palm Wine & Myanmar라는 공장에 도착했다. 이곳은 야자 열매 사탕과 기름을 만드는 공장이다. 20m는 족히 돼 보이는 야자수인데 직접 양동이를 짊어진 채 엄청난 속도로 나무를 타고 올라가 야자 열매를 채취한다. 소가 끄는 맷돌로 갈아 만든 야자 껍질 가루로 야자 기름을 낼 수 있다. 야자에서 추출한 즙을 오래 삶아 절여 만드는 야자 사탕 재거리Jaggery는 설탕 없이도 단맛을 내는 미얀마의 국민 간식이다. 야자 잎을 장작같이 태워 만든 원액에 찹쌀을 넣고 흡사 한국의 안동소주처럼 발효하고 증류시켜 만드는 야자 와인도 한 잔쯤 마셔볼 만하다.
TRAVEL WISE: 양곤, 바간, 인레 호수
SEE IT
체스판을 닮은 이국적인 사원
만달레이 언덕 서쪽에는 체스판을 연상케 하는 쿠도도Kuthodaw 사원이 있다. 불교 경전을 보관하기 위해 1857년 하얀 대리석으로 세운 파고다 729기가 독특한 풍경을 자아낸다.
우베인U Bein 다리
1851년 궁전을 짓고 남은 나무들을 이용해 지어졌다. 타웅타만Taung Thaman 호수를 가로지르는 1.2km에 이르는 인도교로, 오래된 나무가 주는 독특한 느낌, 그리고 그 위로 지나다니는 자전거와 승려들의 모습 때문에 일몰 명소로 꼽힌다.
KNOW IT
깨끗한 달러가 최고
미얀마는 백화점이나 호텔에서도 신용카드를 사용기가 쉽지 않은 편이다. 달러를 미얀마 현지 화폐인 ‘짯Kt’으로 환전해두어야 한다. 미얀마의 환전소는 조금 특별하다. 환전 가능한 화폐는 달러, 유로, 싱가포르 달러, 태국 밧 정도로 몇 종류 되지 않는다. 100달러짜리 지폐를 환전할 때 받는 금액은 1달러짜리 지폐 100장을 환전할 때 받는 금액보다 10%가 많다.
순수한 타나카
미얀마의 천연 화장품 ‘타나카Thanakha’는 햇빛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는 선크림의 역할도 하면서 피부에 생기는 주근깨, 기미, 햇빛에 탄 것을 없애준다고 한다. 타나카 크림은 ‘카욱파인Kyauk Pyin’이라고 하는 원형의 석판에 물을 조금 넣고 타나카 나무 껍질이나 뿌리를 갈아 만드는데, 석판에 가는 동안 물이 아래로 배수되면서 타나카 액이 옅은 노란색의 페이스트 형태로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