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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모라비아식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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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호

체코를 대표하는 와인 산지인 남모라비아.
게르만족의 마을과 태곳적 숲이 자리한 이곳에서 술이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다.

미쿨로프 너머로 해가 지고 있다.

체코의 광활한 와인 산지가 여행자를 반긴다. 푸르른 포도밭과 투명한 호수와 붉은색 지붕이 어우러진 마을이 마치 색실로 짠 아름다운 직물 같다. 남모라비아South Moravia에는 이곳의 주민 수만큼이나 많은 와인 저장고가 들어서 있다. 수십 년 동안 공산주의가 남모라비아를 헤집고 와인 산업을 무너뜨리려 했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과업을 고수해왔다.
남모라비아의 주도인 브르노Brno는 수도인 프라하에 이어 체코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겉으로는 오스트리아나 헝가리의 건축과 유네스코에 등재된 기능주의 건축이 혼재된 만화경으로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19세기에 지어진 물탱크 아래 숨은 지하 묘지 등 뜻밖의 여정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이동하면 외곽을 따라 공장이 들어서 있다. 이로 인해 과거 브르노는 ‘모라비아의 맨체스터’라 불리기도 했으나, 곧 포도나무가 무성해지며 주민들의 일상이 새로운 장면들로 채워졌다. 저녁마다 무사히 일을 마친 주민들은 중세 도시인 즈노이모Znojmo와 미쿨로프Mikulov의 술집에 앉아 리슬링riesling 와인과 팔라바pálava 와인을 잔에 따르고 축배를 든다.
남모라비아 전역에 흩어져 있는 옛 왕들의 성을 찾아가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세심하게 관리를 해온 덕분에 오랜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외부와 내부가 화려하게 반짝거린다. 성과 맞닿은 국경 건너편으로 빈이 엿보이는데 지리적인 이유로 여전히 남모라비아의 여러 카페에서는 오스트리아식 슈트루델strudel 사과파이 향이 감돌고, 역사적인 이유로 아직도 남모라비아 사람들 상당수가 독일어를 쓴다.

존재하지 않는 바의 바텐더가 ‘어포인트먼트appointment’라는 럼을 장식한다.

첫째 날. 도심과 협정

아침
브르노의 중심부에서 오스트리아나 헝가리의 건축과 조각을 쉽게 감상할 수 있다. 광장 한가운데 위치한 남근 모양의 천문 시계가 상징적이다. 시계에서 남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옛 시청 건물이 나타나는데 63m 높이 탑에 올라 인근의 성 베드로와 바울 대성당Cathedral of Saints Peter and Paul, 슈필베르크성Špilberk Castle을 한눈에 담아보자. 시청 아래에 위치한 양배추 시장 광장Cabbage Market Square에서는 4월부터 10월까지 농산물 시장이 열린다. 점심으로는 아시아 식당을 추천한다. 1950년대 공산주의 국가였던 체코슬로바키아는 북베트남과 우호 협정을 맺었고 이 때문에 브르노에 베트남 공동체가 다수 형성되었다. 브르노 주민들이 종종 자신들의 국민 음식이 포pho(쌀국수)라는 농담을 건넬 정도다. 나메스티 스보보디Náměstí Svobody에서 조금만 걸으면 포를 먹을 수 있는 디안디 레스토랑이 나온다.
diandi.cz


오후
응용미술관Museum of Applied Arts에 들어서자 크리스마스 괴물이 난간 위쪽을 덩굴처럼 감싼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바로 체코 출신 작가 크리스토프 킨테라Krištof Kintera의 설치작품인 〈성장의 악마Demon of Growth〉다. 이 미술관은 유리, 도자기, 직물 등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전시실마다 체코의 창의성이 돋보인다. 전시실을 천천히 둘러본 다음에는 1929년 독일 출신 건축가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가 유대인인 투겐트하트 가족을 위해 설계한 빌라 투겐트하트에 방문해보자. 이 빌라는 기능주의 건축의 정점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빌라를 설계할 당시 예산에 제한이 없어 벽 전체를 희귀한 제브라노나무zebrano-wood로 마감했다고 한다. 하지만 투겐트하트 가족이 이 빌라에서 행복하게 지낸 시간은 1938년 독일의 침공을 예상하고 도피하기 전까지 고작 8년에 불과했다.
moravska-galerie.cz, tugendhat.eu


저녁
어느 날 브르노에 좋은 술집이 부족하다며 한탄을 하던 얀 블라친스키Jan Vlachynský와 안드레이 발리시Andrej Vališ가 훌륭한 바에 대한 영감을 얻기 위해 2012년 돌연 미국으로 떠났다. 그 결과 ‘존재하지 않는 술집’이라는 간판을 내건 바가 남모라비아에 문을 열게 되었다. 뉴욕식으로 꾸며진 이 바에서는 조명이 켜진 벽면 위로 생소한 주류와 숙성된 오크통이 교차로 놓여 있다. 직원들이 시럽을 직접 끓여 만드는데 독특한 향을 풍긴다. 버거로 저녁을 때운 뒤에는 남모라비아에서 가장 큰 극장인 야나체크로 향해본다. 저명한 체코 작곡가 레오시 야나체크Leoš Janáček를 기리는 이 극장은 브르노 국립극장에서 관리를 도맡고 있다. 기능주의의 경이로움이 잘 드러나는 외벽 너머로 오페라가 성대한 막을 올린다. 대부분의 공연에서 영어 자막을 띄워준다.
barkteryneexistuje.cz, ndbrno.cz

(왼쪽부터) 남모라비아에서는 로마 시대부터 와인을 만들어 왔다. 레드니체-발티체 문화 단지 안에 있는 레드니체성.

둘째 날. 야생과 와인


아침
다음 날 버스를 타고 즈노이모로 출발한다. 즈노이모는 1945년까지 주민 전체가 독일어를 사용했던 마을이다. 고딕 양식의 첨탑 9개가 치솟은 라트하우스투름Rathausturm에서 시작해 빈 스타일 카페를 지나 11세기에 지은 프르제미슬리트성Přemyslid Castle 가운데 유일하게 건재한 세인트 캐서라인스 로툰다St. Catherine’s Rotunda까지 역사적인 루트를 따라가본다. 특히 세인트 캐서라인스 로툰다에서는 5월부터 9월까지 그리스도의 생애를 묘사한 프레스코화를 전시하곤 한다. 다이제강Dyje River을 지나자 1335년에 신성로마제국 카를 4세의 여동생이 결혼식을 올렸던 세인트 니콜라스 교회St. Nicholas’ Church가 모습을 드러낸다. 당시 요란스러운 행사로 인해 교회가 한 차례 불탔으나 카를 4세가 자금을 조달하며 재건축에 공을 들였다고 한다.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블코바 베시Vlkova Věž에 올라서면 도시를 감싸고 있는 낡은 성벽이 내려다보인다. 성벽 너머의 가판에서 체코산 인증을 받은 즈노이모 와인을 시음해봐도 좋겠다.


오후
레스토랑 겸 바인 슬레피차크Slepičák에 들러 체코 정통 스비츠코바svíčková를 먹어본다. 크림처럼 부드러운 소스에 만두와 스테이크를 푹 쪄낸 덕분에 부드러운 식감이 일품이다. 포디이 국립공원Podyjí National Park에 이르려면 언덕을 따라 지그재그로 난 길을 내려가거나 마쇼비체Mašovice 자치구로 가는 817번 버스를 타고 곧장 중심부로 들어가야 한다. 면적이 약 62km²에 달하는 이 국립공원은 의외로 체코 내에서 가장 작은 국립공원에 속한다. 다이제강 부근으로 초원과 소나무 숲과 포도밭이 빼곡하다. 크랄루프 스톨레츠Králův Stolec 전망대에서 강 위로 조용히 곡예비행을 하는 송골매를 관찰할 수 있다.
흐라디슈테Hradiště 계단식 경작지를 천천히 산책하면 즈노이모의 멋진 풍광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한때 농사를 짓던 토지였으나 이제는 야생의 땅으로 변모했다. 더 이상 걷는 게 부담스럽다면 국립공원 안에 있는 소베스Šobes 포도밭의 야외 매대에서 피노 그리pinot gris 와인과 리슬링 와인을 몇 잔 기울이며 오후 시간을 보내자.


저녁
다시 버스를 타고 브르노로 돌아가 술집을 배회하기 전, 먼저 로칼 우 차이플라Lokál U Caipla 레스토랑에서 체코 음식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운다. 그중에서도 구운 오리 다리에 양배추와 사과와 만두를 곁들인 페체나 카흐나pečená kachna가 기억에 남는다. 그러고는 시간에 맞춰 카페였다가 식당이었다가 칵테일바로 변신을 거듭한 4포코예4pokoje로 간다. 칵테일바가 되는 타임에는 맥주와 브르노에 위치한 리벨빈Rebelbean 로스팅 공장에서 볶아낸 커피가 주목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비밀스러운 콘셉트를 유지 중인 슈퍼 판다 서커스Super Panda Circus에서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 바에서는 손님과 태블릿을 통해 주고받은 대화를 토대로 바텐더가 칵테일을 만들어 준다. 어떤 칵테일이 나올지 손님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식. 칵테일의 종류 또한 독특한데 다시마의 일종인 와카메 해초처럼 낯선 재료가 들어간 주류도 있다.
lokal-ucaipla.ambi.cz, miluju4pokoje.cz, superpandacircus.cz


*** 더 많은 기사는 <내셔널지오그래픽 트래블러> 12월호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글. 사라 길레스피SARAH GILLESPIE
사진. 사라 길레스피SARAH GILLESPIE, 알라미, 올드리치에이치알비닷스튜디오, 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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