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샤랑트 지역의 요리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는 중이다. 오래된 코냑 양조장에서는 진을 만들고, 코냑은 독창적인 칵테일과 풍미 깊은 발사믹 식초 등에 새롭게 활용되고 있다.

온통 포도밭에 둘러싸여 있는 지금. 가을은 깊어지고 붉게 물든 잎이 말려들어가는 풍경 속에서 와인이 아닌 온갖 것들을 맛보고 있다는 점이 참 낯설다. 더군다나 이곳은 프랑스이지 않은가. 하지만 프랑스 남서부 코냐크Cognac 지방은 예외적인 곳이다. 이곳 포도밭의 98%가 와인이 아닌 브랜디를 위해 포도를 재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코냑이 좀 고풍스럽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렇다. 나 역시 어린 시절, 부모님의 술 장식장 한편을 차지하고 있던 코냑 한 병 – 이곳 샤랑트Charente 지역에서 자란 특정한 백포도 품종으로만 만들 수 있는 브랜디의 한 종류 - 에 대한 기억을 슬며시 떠올려본다. 하지만 부모님의 코냑 병은 그 안에서 꼼짝 않고 먼지만 쌓여 있다. 내가 10대 시절 몰래 꺼내 물을 잔뜩 섞어 마셨던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금박 글씨가 새겨진 만돌린 악기 모양의 근사한 병은 그저 장식품처럼 남아 있고, 나는 그게 왠지 아깝게 느껴지곤 했다. 병에 금박으로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내게는 쓸데없는 낭비로 보였다. 그런데 최근에 바에서 누가 코냑을 주문하는 걸 들어본 적이 있던가?
사실 품질 좋은 브랜디의 3%만이 프랑스 내에서 소비된다. 가장 많이 소비하는 나라가 중국(2023년 6150만 병 수입)과 미국(5840만 병 수입), 하지만 작년 가을부터 중국이 유럽산 브랜디에 새로운 명품세를 부과하면서 코냑은 중국에서 상당한 매출 감소를 피하기 어려운 전망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역사적인 샤랑트 지역도 석탄 광산이 폐쇄되었던 영국 북부와 웨일스 지방과 같은 길을 걷게 될까 우려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거 탄광 마을이었던 영국이 겪은 쇠퇴와 달리 코냐크 지방은 시골 지역에서 코냑 부활의 시대를 이끌었던 샤토가 있어 우아하게 쇠락해가는 과정 속에서 여행자들을 매혹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나는 지금 코냐크 지방의 중심부 코냐크시에서 군용 막사를 닮은 코냑 하우스가 양옆으로 줄지어 늘어선 자갈길을 걷는다. 그런데 내가 처음 들른 증류소는 의외로 브랜디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이다.

“여기가 프랑스 최초의 진 증류소예요.” 시타델 진Citadelle Gin 방문자 센터를 관리하는 요한 튀일리에가 설명해준다. 1996년 코냐크 남서부에 자리한 아르스Ars 마을에 처음 문을 연 곳으로 영국에서 크래프트 진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도 전에 이미 운영을 시작했다.
진 하면 영국 특유의 이미지가 워낙 강하지만, 사실 프랑스와 진의 인연 또한 꽤 깊다. 18세기부터 진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고
지금까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다. 영국에서는 1751년에 진을 대형 회사에서만 만들 수 있게 법으로 제한한 반면, 프랑스에서는 소규모 증류소들이 꾸준히 그 명맥을 이어왔다.
요한은 “지난 몇 년 동안 프랑스에서 진의 인기가 점점 더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은 역사적으로 고급 술로 대우받지 못했죠”라고 말한다. “그러다가 크래프트 진의 열풍 덕분에 진이 세련된 술로 자리 잡았고, 프랑스의 고급 증류소들도 진을 매력적인 술로 끌어올렸습니다.”
영국에서는 앞서 언급한 진 생산 제한법이 폐지되고 난 뒤 2008년이 되어서야 첫 크래프트 증류소가 문을 열었다. 하지만 코냐크 지방에서는 이미 그보다 훨씬 전에 여러 증류소가 진을 만들고 있었다. 아르스 마을에 있는 시타델 진은 1989년에 알렉상드르 가브리엘Alexandre Gabriel이 만든 메종 페랑Maison Ferrand 코냑 하우스의 부업으로 시작되었다. 영국의 진처럼 코냑 역시 매우 엄격한 규정을 따라야 했기 때문에 그 결과 알렉상드르는 1년 중 단 6개월만 진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규칙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던 알렉상드르는 진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주니퍼베리를 심기 시작했다. 프랑스 당국을 설득해 상업적으로 주류를 생산할 수 있는 허가를 받기까지 무려 5년 동안 실랑이를 벌여야 했지만 결국 허가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증류소에 자리한 기와로 된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크림색 석회암 저택이 깔끔하면서도 웅장하다. 저택 앞에는 잘 정돈된 주니퍼 나무들이 크리스마스트리를 연상시키며 줄지어 서 있다.
뒤이어 요한Yohann이 칵테일 만드는 법을 가르쳐준다. 코냑으로 만든 사이드카 칵테일, 바베이도스에 있는 메종 페랑의 웨스트인디스 럼 증류소에서 나온 럼을 넣어 만든 파인애플 럼 다이키리, 바이올렛 꽃잎 시럽을 섞은 루바브, 베리로 만든 진 등 다양한 블렌드 칵테일을 소개한다. 특히 코냑과 토닉워터를 섞은 간단한 칵테일은 놀라운 맛이다.
부드러운 시럽 같은 질감에 파인애플과 구운 헤이즐넛 향의 다채로운 풍미가 어우러진다. 또한 여기에 새로운 맛을 들여온 이가 있으니 인도양에 있는 프랑스령 레위니옹La Réunion 출신의 샨드라Shandra와 베르나르 곰베르Bernard Gombert 부부다. 마을에서 차를 타고 남쪽으로 25분 가면 나오는 코냑 하우스였던 도메인 드 플라듀크Domaine de Pladuc에서 그들을 만난다. 이 부부는 코냑 하우스였던 이곳을 고급 게스트하우스로 개조했다. 저택의 멋진 벽난로 앞에 있는 주방에 앉아 스프링롤 페이스트리를 삼각형 모양으로 자른다. 스토브 옆에 말린 고추가 매달려 있다. 페이스트리를 원추형 모양으로 만들어 그 안에 참치, 마살라, 마늘, 파, 파슬리를 섞은 페이스트를 스푼으로 떠 넣는다. 익숙해지자 채우고 접으며 사모사를 만드는 과정이 명상처럼 느껴진다. 더 스탤리언 같은 아티스트의 비디오에도 등장했다.
“많은 이들이 레위니옹을 여전히 ‘바나나 공화국’이라고 부릅니다.” 베르나르가 말해준다. 곰베르 부부와 아이들은 2021년에 코냐크로 이주했다. 고향인 레위니옹섬에서는 저녁을 먹을 때 보통 인도, 중국, 아프리카 대륙, 유럽계 친구를 비롯해 다양한 손님이 함께했다. “1848년에 노예 제도가 폐지되면서 농장의 저렴한 일거리를 찾는 사람들이 각지에서 몰려왔죠.” 샨드라가 말한다. 베르나르에 따르면 이 부부의 요리 수업은 ‘레위니옹의 유산을 과시하는 방법’이다.
기름에서 갓 건져낸 사모사는 바삭하게 튀겨져 캐러멜색을 띠고, 한 입 베어 물자 뜨거운 참치에서 매콤한 향신료 향이 퍼져 나온다. 여기에 톡 쏘는 식초 향의 엔다이브와 호두 샐러드를 곁들여 먹는데, 사모사의 기름진 맛을 깔끔하게 잡아준다. 곰베르 부부는 이곳 코냐크에서의 새로운 삶에 대한 존중을 담아 사모사와 함께 다양한 코냑을 맛볼 기회를 제공한다. 피노 데 샤랑트Pinneau des Charentes 강화 와인도 한 잔 내어준다. 코냑과 발효되지 않은 포도즙으로 만든 이 강화 와인은 메이플 시럽처럼 달콤한 맛으로, 사모사를 마무리하는 일종의 디저트인 셈이다.
마을 동쪽에서 차를 타고 포도밭이 펼쳐진 시골을 지나 30분 정도 가면 이곳에서 먹어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메뉴가 나온다. 바로 이탈리아에서 전통적으로 생산되는 발사믹 식초다.
코냐크 지방의 맛

폴페트
코냐크 시내 북쪽에 있는 이 산업 시대 스타일의 세련된 레스토랑은 코스 요리로 메뉴가 정해져 있으며 두 가지만 고를 수 있다. 채소 요리가 싱거울 수 있지만 풍미는 강하다. 구운 예루살렘산 아티초크 요리가 하이라이트다. 3개 요리가 코스로 나오는 메뉴가 약 5만5000원부터.
주소: 46 Av. de Lattre de Tassigny, 16100
브라세리 데 플라뇌르
전통적인 비스트로 식사를 세련되게 내놓는다. 제철 농산물 식재료를 강조하기 때문에 가을에는 버섯 중심 메뉴가 나올지도 모른다. 볶은 느타리버섯에 달걀 파르페를 곁들인 요리 등이 있다. 와인 리스트는 어마어마하다. 주요리가 약 4만원부터.
almae-collection.com
르 베레 아 피에
코냐크 중심부에 자리한 바인데 널빤지 합판으로 마감한 천장 때문에 배 안에 있는 것만 같다. 혹시 배가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때부터는 와인을 천천히 마실 것. 와인 선택의 폭이 아주 넓은 이곳에서는 주인장의 전문적인 추천에 따라 코냐크 지방에서 유일하게 생물학적 다양성을 인정받은 와인을 맛볼 수 있다. 괜찮은 치즈와 샤퀴트리 접시 덕분에 흔들리던 배도 안정된 느낌을 준다. 약 1만3000원부터.
le-verre-a-pied.webnode.fr
라 벨 에포크
호텔 헤리티지 코냐크 센터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여름날 저녁 나무 그늘 아래에서 느긋한 식사를 즐길 수 있는 안뜰이 특히 아름답다. 메뉴를 보면 달팽이, 굴, 송아지고기, 삶은 배 같은 ‘클래식 요리’가 프랑스식 빙고게임 카드같이 펼쳐진다. 가격 대비 음식의 질이 우수한 것도 장점. 주요리가 약 3만원부터.
hotelheritage.fr

1980년대에 자신의 딸이 이탈리아 모데나Modena 지역 출신의 남성과 결혼했을 때 자크 뷔페는 모데나와 코냐크 지역의 놀라운 공통점에 주목했다. 두 지역 모두 토양이 비슷했고, 우니 블랑(이탈리아에서는 트레비아노라고도 한다) 포도를 재배하고 있었다. 그는 모데나에서 발사믹 식초가 잘 만들어진다면 코냐크에서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확신에 가까운 생각으로 1990년대에 식초를 만들기 시작했고, 셰프들에게 직접 팔다가 2004년에는 본격적으로 공장을 세우게 된다.
르 봄 데 부테빌 공장은 일반적으로 브랜디 3~4L가 담긴 코냑 통에서 식초를 숙성시킨다. 나는 시음 세션에서 식초를 맛본다. 하나는 꿀 같은 달콤함이, 또 다른 하나는 영국식 마마이트 스프레드처럼 구수하고 깊은 풍미를 지녔다. 특히 훈연 향이 강한 식초는 베이컨 맛 과자를 연상시켰다. 우리는 이런 식초들을 잘 숙성된 콩테와 모르비에 치즈 조각에 살짝 뿌려 먹는다.
사모사와 진 그리고 발사믹 식초가 코냐크 지역에서 새로운 미식 문화를 열어가는 가운데, 브랜디 자체에 대한 희망은 있을까? 뜻밖에도 대중문화가 구원이 될지도 모른다. 지난 25년 동안 미국의 래퍼들이 코냑을 즐겨 마셔왔고, 가사에 등장하거나 부스타 라임스와 메건 더 스탤리언 같은 아티스트의 비디오에도 등장했다. 머지않아 중국 쪽 매출이 줄어들 예정이기에 미국에서의 인기는 분명 반가운 소식이다.
어쩌면 이 주류의 부흥은 대중문화보다는 새롭게 마시는 방식 때문일 수 있다. 요한과 함께 맛보았던 스트레이트 진을 떠올려본다. 영국 대학생들이 좋아하는 저렴한 진과는 거리가 멀지만, 고급 코냑도 보통은 그냥 마시기 어렵다. 하지만 그가 코냑과 토닉(보르도산 엘더플라워, 레몬, 오이 같은 풍미가 나는 히솝)을 섞었을 때 그 맛은 아름답고 복잡한 무언가로 바뀌었다.
“진을 그대로 마시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코냑을 그대로 마시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처럼요.”(요한)
어쩌면 코냑이 진짜 필요했던 건 브랜드 리뉴얼이 아니라, 제대로 즐기는 법을 알려주는 안내서였을지도 모른다.

*** 더 많은 기사는 <내셔널지오그래픽 트래블러> 4월호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