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이라는 두 글자에 의미를 부여해본다. ‘다시 태어남’ 다시 태어난 것은 예전의 그것과 같지 않다. 무언가는 폐허가 되었다가 다시 살아나기도 한다. 본래의 목적에 따라 땅이 쓰였다가, 운명이 다해 아주 오랫동안 버려졌다가 흙먼지를 뒤집어썼으나 다시 그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 또한 유산의 발견이자 발굴이다.
으레 강가가 그렇듯 부여의 백마강에도 사람들이 모였다. 규암 나루터 주변으로는 오일장이 들어섰고 부여의 물산이 집결했다. 금강 수로를 따라 강경을 지나 한양으로 통하는 물건들은 모두 규암 나루에서 실렸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 온 물건들은 규암에 내려, 내륙의 이곳 저곳으로 스며들었다.
사람들은 배를 엮어 배다리를 놓았고 소와 사람은 부지런히 강을 건넜다. 해방을 전후해 규암의 장은 부여읍의 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져 없는 것이 없었다. 규암 오일장은 매달 3일과 8일에 열렸는데 쇠전, 모시전, 포목전, 어물전까지 부여의 물산은 모두 모였다. 가구수는 점차 늘어 1945년 200호가 넘었다. 한 때 인산인해로 걷기조차 힘들었을, 지금은 사람 한 명 없는 어두운 신작로에 서서 가만히 그 당시를 떠올렸다.
스러짐과 다시 태어남
번성했던 땅과 시간도 한 시절이 지나면 잊힌다. 부여의 물산이 집결하던 나루터는 철교가 들어서면서 그 본래의 기능을 잃었고 강에 기대어 살아가던 많은 사람들은 생계를 잇기 어려워지자 터전을 버리고 도시로 갔다. 공장은 문을 닫았고 포구는 사라졌다. 오일장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으며 인구가 줄자 소학교와 면사무소, 우체국도 문을 닫았다. 사람이 떠나간 집은 하나 둘씩 서까래가 내려앉았고 폐허가 됐다.
하지만 그 안에 스몄던 사람들의 흔적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규암마을의 자온로를 걷다 보면 정미소였음이 분명한 큰 창고가 있고, 적산가옥으로 남은 우체국과 시멘트 벽면에 희미하게 쓰여있는 백마여관 건물과 여인숙자리, 벽돌 굴뚝이 우뚝 솟은 양조장 건물, 양장점과 사진관으로 쓰였던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극장 간판 아래엔 사람이 바글바글 했을 것이고, 여인숙에는 하룻밤 묵어가는 객들로 방을 잡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규암마을의 토박이로 주민협의회 회장을 지낸 현융재씨는 “나루와 장을 오가는 장사꾼들이 이 마을을 드나들면서 이들을 상대로 한 식당과 선술집, 하숙집, 요정, 정육점, 목욕탕 등이 들어서게 됐다”고 말한다. 그는 “1930~40년대 규암은 아주 화려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동해옥, 규암백화점, 태양사진관, 삼화양장점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일제 수탈의 상징과도 같았던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부여지소가 규암리에 있었다. 이들은 부여 일대에서 강제로 공출된 벼를 도정해 장항을 거쳐 일본으로 수송하는 작업을 했는데 이곳 규암 나루터에 집산물을 모아 배에 가득 실은 다음 백마강을 건넜다. 일본인들이 여럿 상주하다 보니 이들의 가족 역시 한동안 이곳에 거처를 마련해 생활을 했다.
규암에 있던 일본인 아동을 위한 공립심상 소학교는 1932년 당시 2개 학급에 36명의 학생이 다녔다고 한다. 작은 마을에 꽤 많은 수의 일본인 어린이가 있었다. 인근엔 구봉광산과 중천광산이 있어 일본의 광산업자들도 드나들었다. 1930년대, 작은 일본인마을 이었던 셈이다. 많지는 않지만 적산 가옥이 드문드문 남아있는 이유다.
해방 전후 활기를 띠던 동네는 다리 하나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1965년 백제대교가 만들어지면서 수로를 이용한 물동량이 크게 줄었고 더 이상 규암을 찾을 이유가 없어졌다. 중심지는 부여읍으로 옮겨갔다. 90년대에는 금강 하구둑까지 만들어지면서 금강을 통하던 내륙 수운까지 정지됐다. 뱃길이 멈추자 나루터는 그 쓰임을 완전히 잃었고 사람들은 떠났다. 한 때의 영화도 물길의 변화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한 집 건너 한 집, 빈집이 생기며 마을은 생기를 잃어갔다.
부여에 온 여자
건물이 지닌 가치와 역사, 이야기를 발견하려 하지 않는 자에 빈집은 얼른 헐려야 할 낡고 볼품없는 건물에 지나지 않는다. 규암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매월 6-7가구가 멸실 신청을 할 정도로 빈집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또 헐리고 있었다. 지붕과 서까래가 내려앉은 수풀이 무성한 땅을 새로 고쳐 살고자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면장과 이장이 나서 멸실 신청을 막아보려 했으나, 가는 세월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규암을 지키던 어르신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났고, 그 후손들은 옛 집을 고쳐, 들어와 살려고 하지 않았다. 마을에선 더 이상 저녁에 불빛이 켜지지 않았고 쓸쓸한 적막감만 감돌았다.
어느 날 밤, 스타트업 ㈜세간을 이끄는 박경아 대표는 신작로 같이 곱게 뻗은 규암마을의 자온길 도로 한 가운데에 섰다. 사위가 캄캄했다. 이른 저녁이었지만 문을 연 가게가 없었다. 낮에 다시 와보기로 했다.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그 길 앞에 서니, 오래 전 삼청동 길에 섰을 때 그 느낌이 드는 거에요. 전 삼청동의 흥망성쇠를 지켜보며 씁쓸히 떠났지만요” 그녀는 서울과 부여를 매주 왕복하면서 자리를 알아보고, 빈 집을 매입하기 시작한다. “마을이 살아날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아기자기함과 고즈넉함을 지닌 동네이고, 부여 터미널에서도 멀지 않고요. 강가도 가까이에 있구요.”
박경아 대표는 오랜 기간 인사동 쌈지길, 삼청동, 헤이리 등지에서 전통공예 상점을 운영해왔다. 매번 오르는 임대료로 공예인들이 떠나는 것을 보면서 더 이상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공예인들이 가꾼 땅에서 밀려나지 않을 방법을 구상했다. 가장 먼저 대학시절을 보낸 부여를 떠올렸고, 한달음에 부여로 달려갔다. “처음에는 부여 시내를 생각했었어요. 부여읍은 너무 비쌌고 궁남지 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엇보다 부여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올 수 있는 거리여야 했어요”
그녀는 부여읍과 궁남지 주변을 부지런히 돌았지만, 마땅한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임대료가 너무 높거나, 지나치게 붐비거나 이미 개발이 많이 되었거나, 교통이 좋지 않은 곳에 길을 만들 수는 없었다. 그 때 떠오른 것이 규암이었다. “대학을 다닐 때 민속 조사를 나갔다가 규암리 목욕탕에서 할머니 등을 밀어드린 적이 있어요. 이 마을의 정감 있던 분위기가 생각나 다시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가보니 너무 좋은 거에요.”
하지만 문제는 매입이었다. 빈집이 많다고는 하지만 부여의 시골마을엔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팔 생각이 없는 주인들이 많았고, 읍내 주변보다 낮다고는 하지만 택지 혹은 빈집의 매입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뿐만 아니라 택지의 소유권, 증축문제, 인허가권 등 수많은 문제들이 겹쳐있어 조금만 손보거나 크기를 넓혀도 법에 저촉되거나 용도변경을 할 경우 큰 비용이 발생하는 부분도 있었다.
“쓸 수 있는 땅인지, 어느 정도까지 리모델링이 가능한지, 용도 변경시의 문제는 없는지 아주 많은 부분을 체크하고 조율하고 또 설득해야 합니다. 그래서 단기간에 여러 채를 매입한 저를 두고 이것이 가능한 일인지 의아해 하시는 분들도 많고요” 항간에는 임대업자라거나 부동산 투기꾼이라는 등 좋지 않은 소문을 내거나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녀는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온길 프로젝트를 이어나갔다. 규암 사람들의 의심과 걱정은 조금씩 격려와 애정으로 바뀌었다.
<자온길 프로젝트>의 시작
<자온길 프로젝트>이라는 이름은 규암 나루터의 바위 '자온대'에서 왔다. ‘마을 사람들 누구든 ‘자온대’ 하면 모르는 이가 없었다. 가장 익숙하면서도 오래됐고, 마을 주민 누구나 알아보는 이름을 프로젝트 명으로 정했다. “저도 인사동, 삼청동에 오래 있었지만 공예 작가들이 모여들어 거리를 조성해 놓으면 나중엔 작가들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월세가 올라요. 권리금과 월세가 오르고 쫓겨나길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쫓겨나지 않는 거리를 조성해보고 싶다’라는 욕심이 생기더라구요. 지금까지 제가 매장을 운영하면서 낸 월세만 족히 1억은 넘으니까요”
그 뿐만이 아니다. 좋은 손을 가진 대학 후배들이 ‘50만원을 벌어도 이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을 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움을 느꼈다. “제 회사가 더 커지고, 지역을 꾸려갈 힘이 생겨야 다양한 공예 작가들과 함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녀는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모여 매입을 우선 진행하고 있다. 올해는 작은 빵집 ‘봄과 여름사이’, 브런치카페 ‘다시 봄’의 정헌주, 이남규 부부가 박경아 대표의 소개를 받아 규암마을에 가게를 오픈 했다. 빵집, 카페, 북스테이, 서점, 공예 상점 등 하나씩 속속들이 오픈을 하고 있다. “늘 매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동네 어르신들의 도움을 받아요. 부동산이나 다방에서 커피도 마시고 수다도 떨고요. 빈 집 안도 꼼꼼하게 들여다보고요”
카페 수월옥을 리모델링 할 때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이미 다 허물어진 빈집이었지만 농협의 소유와 개인의 소유가 맞물려 있는 땅인 까닭에 사전 조율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주민 분들도 처음엔 의아해했어요. 공사를 하고 있으면 이렇게 누더기가 된 집은 그냥 부수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소리도 많이 들었고요. 하지만 막상 완성을 하고 나면 다들 멋있다고,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냐고 말씀들을 하시죠.” 지금은 주말 여행으로 부여를 찾는 사람들이 카페를 찾는다. 평일엔 주민들의 사랑방으로도 쓰이고 있다.
이제 자온 양조장 창고를 개조해 브루어리로 오픈할 계획도 갖고 있다. “지난해 자온 양조장 건물이 멸실 신청을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주인 분을 찾아갔어요. 양조장을 운영하셨던 분께서 돌아가신 후 아드님이 그 건물을 헐고, 땅을 팔려고 하셨던 것 같아요. 제가 찾아가서 문화유산과도 같은 이곳을 잘 살려서 양조장의 본래 모습이 오래 남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씀 드렸어요. 다행히 제 뜻에 동의해주셨고 양조장 자리를 저희가 인수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녀는 ㈜세간을 이끌며 투자자를 구했다.
그녀는 20대의 많은 시간을 부여에서 보냈다. 부여군 소재 한국전통문화대학교와 대학원 공예과에서 전통 공예를 공부했다. “부여는 제가 학교를 다녔을 당시부터 지금까지 10년간 변한 게 너무 없었어요. 사람들에게 경주나 군산, 전주는 여행지로 사랑을 받는데 부여는 그렇지가 않았거든요. 부여가 가진 매력에 비해서는 저평가돼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부여로 사람들을 오게 만들어야겠다는 박 대표의 바람은 점점 커졌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오는 길로 만들려면 보는 것과 먹는 것, 잠을 자는 것 이 모든 게 한 지역에서 가능해야 해요. 먼저 재능을 살려 공예상점을 만들고 ‘웃집’이라는 작은 숙소를 공방 뒤 공간에 짓고, ‘책방 세간’과 카페 ‘수월옥’, 공예상점 ‘편지’를 열었죠. 양조장을 개조한 브루어리, 창고자리를 개조한 극장도 계획하고 있고요.” 그는 ㈜세간의 이름으로 자온로와 수북로와 일대의 집 16채와 대지 1만3200㎡(4000평)를 구입했다. 곧 지어질 청년공방 입주작가들과도 교류하며 규암마을을 어떻게 가꿔갈지 늘 생각 중이다.
한국의 정서를 현대의 것으로 담아내다
그녀는 ㈜세간의 대표다. “말 그대로 세간은 살림살이에 쓰이는 온갖 물건을 말해요. 한국적 정서를 담은 리빙 라이프 브랜드로 가꿔가려 합니다. 고유의 전통을 살리면서 현대의 감각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도록 연구하고 있어요. 전통 유기이지만 티스푼을 만들어 본다던가, 천연 염색한 원단을 서양 복식에 응용해본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에요. 일상에서 쓸 수 있는 것들을 만들어 제안하는 회사라 보시면 됩니다”
세간의 부여 크래프트샵 ‘편지’는 최근 자온로에 문을 연 곳으로 1931년 규암 최초의 우체국이 있던 자리다. 이후 전파사로 운영되던 곳은 오랫동안 버려졌다. 박경아 대표는 이 공간을 인수해 도자기 상점으로, 옆 공간은 공예 상점으로 꾸렸다. 지금은 ‘책방 세간’ 뒤 별채를 북스테이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책을 보거나 작업을 하며 편히 쉬어갈 수 있는 곳이다. 자온길의 랜드마크인 책방 세간은 부여 유일의 독립서점이자 사랑방으로 커피나 차를 마시는 공간을 겸하고 있다. 80년 된 담배 가게를 리모델링해서 만들었는데 담배를 팔던 곳은 책방의 서가로, 진열장은 책장으로 변신했다. 과거에 쓰던 금고와 슬레이트 판자도 그대로 남아있다.
“관광객을 위한 부여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이 살고 싶어하는 곳이었으면 해요. 도시생활이 익숙한 사람들에게 지방의 작은 마을은 답답하기 그지없죠. 우리가 자주 가던 책방, 우리가 자주 가던 갤러리 혹은 극장과 술집 도시에서 아무렇지 않게 즐기던 문화가 이곳에도 있어야 해요. 농사와 자연만으로는 시골 생활을 지속하기에 한계가 있죠. 부여에 온 젊은 친구들이 시골 생활의 여유로움을 느끼되 충분히 도시에서 누리던 문화생활을 이곳에서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청년 공방인들을 만나다
규암마을의 사비공예문화산업지원센터 ‘청년공방’ 지원사업에 지원한 두 팀을 만났다. 한 팀은 도자 공예를 하는 팀 <혜안>으로 팀 대표인 김정훈씨를 비롯 팀원인 진소율, 이희광씨 세 명 모두 전통문화대학교를 졸업했다. 진소율씨는 전통미술공예학과 도자 전공으로 대학원을 졸업한 뒤 ‘혜안’에 합류했다. “저희 ‘혜안’은 부여를 기반으로 문화기획 사업을 하고 있어요. 규암에서는 도자 자체 생산을 통한 브랜드화, 부여기반의 공예인들과 협업을 통한 상품 개발, 이를 온라인에서 판매하는 플랫폼 비즈니스 오픈 등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대표 김정훈씨는 부여에 정착 한지 14년이 됐다. “학교를 졸업하면서 지역기반의 로컬 문화 비즈니스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경주에 비해 덜 알려진 백제 역사 도시로서의 가능성을 더 알리고 싶었습니다. 미개척지에서 상상력과 기획력을 발휘해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과정도 재미있었고요”
그는 부여의 청년들의 고민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부여 내 청년의 절대적 숫자가 적다보니 청년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춘 문화시설이 거의 없는 것이 사실이에요. 대부분 대전, 세종 그리고 서울에서 이러한 부분을 해소하고 있어요. 부여에 정착을 했다가도 수도권과 큰 차이 없는 주거비용, 일자리 문제, 문화적 고립감 등을 해소하지 못해 떠나는 청년들이 많은데 안타깝죠” 그는 앞으로 부여 청년들의 문화, 즐길거리 등을 스스로 만들어나가고 불리한 지역적 상황을 개선하는데 힘쓸 계획이다.
트레셋의 정혜림 대표는 ICT융합교육을 위해 창작지원센터의 공간을 활용할 계획을 갖고 있다. “부여의 학생들과 함께 빅데이터를 활용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코딩과 프로그래밍을 비롯 로봇, 교구 등의 키트를 만들어 볼 계획이에요. 현지 인프라가 수도권 지역에 비해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서 더욱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역학생들의 니즈도 있고요.” 그 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지역 공방, 청년 공방과 연계해 공예, 디자인, 일상용품에 간단한 IoT기술이 들어갈 수 있도록 시도해 볼 계획이다.
“앞으로 공방 분들과 논의해 시제품, 공예상품을 만들 때 기술이 접목된 프로토 타입을 먼저 제작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공예와 기술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스마트 공예로 자연스럽게 연결됐으면 합니다”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부여로 본사를 옮긴 트레셋은 “지역에 있더라도 유투브 등 온라인 채널로 충분히 활동이 가능함을 확인했다”고 말한다. “서울 및 수도권은 ICT관련 교육 산업이 포화상태인 것에 비해 지역은 여전히 인프라가 부족해요. 넓은 공간을 지속적으로 활용하기도 어렵고요. 앞으로 충청지역을 기반으로 대학, 엔지니어들과 협업을 할 생각이에요”
청년 공방 지원 사업에 선정되면 규암 내의 빈집, 창작지원센터의 공간을 얻어 이를 리모델링해 사용할 예정이다. 팀에는 최대 3000만원의 리모델링 비용이 지원된다. 충청남도 산하 부여군 상권활성화재단은 사비 공예문화산업지원사업으로 지난 5월 청년공방 신청을 받아 심사 및 선정 절차가 진행 중이다. 2020년 9월까지 1~2차로 나누어 총 20여팀을 모집해 규암 내에서 청년 공방을 열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사비공예문화산업지원센터 오희영씨는 “아직 참여 신청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조금씩, 청년들의 힘이 모이고 있다”고 말한다. “먼저 농협창고를 창작 센터로 만들고, 함께 레지던시 공간을 1-2층으로 리모델링해서 꼭 입주를 하지 않더라도 시설물, 창작에 필요한 기기를 함께 이용할 수 있게 하려 해요. 오픈은 올해 12월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2차 역량강화 사업의 일환으로 유통, 판매, 홍보에 대한 추가 지원도 있을 예정이고요” 지원센터는 백마강 나루의 둑 250m공간을 활용해 생태터널을 만들고 그 위에 컨테이너를 올려 전시공간으로 활용한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도시재생특별법 발의를 위해 애쓴 박수현 현 유엔해비타트 한국위원회 회장은 “제대로 된 도시재생을 위해서는 지역 전문가가 관의 행정,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 및 개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도시재생의 가치가 정책에 묻어있어야 해요. 큰 틀에서의 역사성과 지역성을 담아내는 마스터플랜이 필요하고요. 대부분 눈에 보이는 개발이 발전이라 생각하는데 이는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고는 할 수 없거든요” 그는 컨텐츠를 보고 이를 적용하는 시각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전통에 숨을 불어넣는 학생들
부여 소재 전통문화대학교에서 ‘법고창신’이라는 공예 창업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안성윤, 최지훈, 김세인, 이예지 4인의 대학생을 만났다. 이들은 프로젝트 명을 ‘숨, 잊혀져 가는 우리 전통에 숨을 불어넣다’로 정했다. 프로젝트를 이끄는 안성윤씨는 “잊혀져 가는 전승취약종목에 있는 무형유산들을 소개할 예정”이라고 말한다.
“갓을 만드는 갓일, 베틀에 딸린 바디를 만드는 기술을 지닌 바디장, 매듭장, 궁중 의례에 사용되는 종이 꽃을 만드는 궁중체화장이 등 점차 잊혀져 가는 유산들을 끄집어내 이 일의 아름다움과 전승의 필요성을 알려 나가려고 해요.” 이들은 무형유산과 제품을 결합한 제작 키트 등을 만들어 판매할 계획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디퓨처의 마무리에 공예적 요소, 매듭을 넣거나 궁중체화를 모티브로 한다던가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기획하고 있어요” 지금 부여는 청년 공예인과 대학생들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에너지로 가득하다.
박경아 대표는 “백제는 공예인들에게 관직을 허락해줬던 유일한 국가라고 해요. 공예인들이 기지개를 펴고, 자신감 있게 자신의 삶을 펼쳐나가기 좋은 곳이죠. 더 많은 공예 작가들이 들어와서 활동하는 마을이 됐으면 합니다”라고 말한다. 정부와 지자체의 도움만으로는 분명 한계가 있다. 공간에도 기획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티스트에게 기획사가 필요하듯 공예인들에게도 에이전시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더 잘할 수 있도록 역량을 끄집어내고, 기획하고 알리고 상품을 유통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간에 이어 혜안과 트레셋, 법고창신에 이르기까지. 지금 부여의 청년들은 잊혀진 길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고 있다.
이제 밀레니얼 세대는 골목을 소비하며 골목에서 새로움을 찾는다. 먼 서울에서 SNS 하나로 이렇게 많은 이들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을 마을 어르신들은 놀라워한다. 골목길은 역사, 추억, 감성을 기록할 수 있는 공간이자 문화적, 사회적 자본인 셈이다. 골목을 구성하는 매력적인 소상공인들과 청년들이 힘을 합해 마을을 가꿔간다면 자온길은 정말 ‘스스로 따뜻해지는 길’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