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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는 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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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04월호

여행의 순간을 촘촘하게 기억하고 싶다면
연희동과 연남동 일대,
기록 장인들의 공간에서 영감을 얻어보자.

(왼쪽부터 시계 방향) 흑심의 빼곡한 연필 상자가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연필과 짝을 이루는 흑심의 빈티지 아이템들.

WRITE
연필을 잡다

지하철 홍대입구역 3번 출구에서 도보로 10분 거리, 어느 낡은 건물 계단에 몽당연필이 보일 듯 말 듯 조그맣게 그려져 있다. 계단을 올라 3층에 자리한 ‘작은연필가게 흑심’에 들어서면 원목 가구와 초록색 벽, 노란색 조명이 차분한 분위기로 여행자를 맞이한다. 주인장은 작은 연필이 커다란 가구에 묻히지 않게끔 장을 전부 새로 짰는데, 특별히 공을 들인 연필장인 ‘흑심장’은 목수들의 공구함을 재해석했다고. 가지런히 놓인 연필들 주변에는 각각의 경도, 브랜드, 제조국, 생산 시기, 배경 지식 등이 적힌 설명서와 필기감을 직접 느껴보도록 연습지가 비치되어 있다. 사람마다 연필을 쥐는 힘이나 기록하는 방식이 달라 설명을 읽고 직접 써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행자에게는 속기용 연필의 일종인 빈티지 딕슨 스테노그래퍼 490Vintage Dixon Stenographer 490이 알맞겠다. 1970~1980년대에 생산되었으리라 추정되는 이 연필은 서둘러서 끄적이는 작은 글씨에도 뭉개지지 않을 만큼 심이 단단하나 필기감은 부드럽다. 혹은 〈분노의 포도〉를 집필한 존 스타인벡이 궁극의 연필이라 칭송한 블랙윙 602BLACKWING 602의 심도 몹시 매끄럽다. 참고로 흑심에서는 고심하여 고른 연필에 영어, 숫자, 기호를 조합하여 각인을 새길 수 있다. 
흑심 서울 마포구 연희로 47 3층 301호

Do it. 연필과 비슷한 시기에 전성기를 누렸던 재즈가 집중력을 높여준다. 빌 에반스, 쳇 베이커, 마일스 데이비스의 곡을 추천한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깊이 있는 질문이 수록된 기록지.
도서관을 연상시키는 독서관의 내부.
〈노인과 바다〉 기록 굿즈 3종.

READ
책을 펴다

번화한 홍대 골목길에서 단조로운 하얀색 간판이 시선을 끈다. 기록물에 대한 이끌림으로 ‘독서관’의 문을 연 전세환 대표는 큐레이션보다 컬렉팅에 자신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독립 서점과 도서관 사이, 판매와 대여를 두루 권장하는 새로운 성격의 공간이 되었고 이는 인테리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도서관의 길고 빽빽한 책장 사이를 거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어 필지가 좁고 긴 터를 찾아다녔어요.” 최근 독서관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주제로 북커버 브랜드인 혜슬, 여행 기록 브랜드인 뤼코뮤지엄과 협업하여 자체 출판물을 제작하기도 했다. 한 노인의 끝없는 도전이 담긴 일러스트북과 북커버, 그리고 자신의 도전을 회고해볼 수 있는 기록지가 한 구성을 이룬다. 이 기록지에는 36가지 질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세세히 답하다 보면 어느새 저마다의 책을 한 권 짓게 될 테다. “독립 출판물을 기록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신을 읽기 위한 행동’이라고 생각해요. 단지 머릿속에 저장된 이야기는 자신을 포함해 누구도 제대로 읽을 수 없으니까요.” 더불어 그는 어느새 14기를 맞이한 독서 모임과 포토 에세이, 여행 드로잉 등의 원데이 클래스를 운영하며 기록의 의미를 더욱 확장해나가고 있다.
독서관 서울 마포구 동교로27길 41 1층

Do it. 좋은 기록만 남기겠다는 마음을 버리고 되도록 많은 기록을 남겨본다. 기록에서 기록이 파생하여 많은 기록이 결국 좋은 기록이 될 것.

(왼쪽부터 시계 방향)
온기가 느껴지는 수납장.
우편함에 글월의 무드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창가 자리가 편지 쓰는 장면을 완성시켜준다.

SEND
편지를 부치다

오래된 제과점 앞에서 연화아파트 방향으로 돌아 연궁이라 쓰인 빌라의 입구를 마주한다. 이곳 4층에 오늘날의 우체국을 자처하는 ‘글월’이 들어서 있다. 글월은 편지를 뜻하는 순우리말이자 편지를 높여서 부르는 말로, 편지에 관한 모든 것을 다룬다. 편지지, 봉투, 펜을 비롯해 편지 쓰는 장면을 완성시켜줄 향수와 램프까지. “천천히 온 것은 마음에 더 오래 남아요. 편지를 보내는 일은 이메일을 보내는 것처럼 클릭 한 번으로 완료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인간의 우아한 전달법이죠”라고 말하는 주인장은 레터 세트 제작에 진심을 다했다. 캘리포니아에서 1년간 기록된 사진을 묶어내거나 아틀리에 드 에디토의 〈문장수집가〉를 발췌하는 등 정성을 들인 레터 세트는 금세 품절되곤 한다. 글월에 오가는 사람들은 한 달에 800명 정도로 펜팔 서비스를 이용하려는 이들의 비중이 상당하다. 익명의 편지를 부치고 다시 익명의 편지를 받아보는 과정이 매우 흥미로운데, 오로지 봉투의 다채로운 형용사와 우표를 대체하는 표식으로 자신을 은밀하게 드러낼 수 있다. 연화아파트의 옥상이 엿보이는 창가에 앉아 무명의 수신인에게 솔직한 기록을 전달해 보는 건 어떨까. 어쩌면 ‘입이 무거운’ 형용사에 걸맞은 무명의 발신인에게서 편지가 날아올지도 모른다. 종종 오늘의 기록을 미래에 받아보는 레터 서비스를 진행하기도 하니 글월 인스타그램을 살펴보자.
글월 서울 서대문구 증가로 10 403호

Do it. 편지의 황금기로 여겨지는 19세기에 작가 루이스 캐럴 역시 일상을 기록해 편지로 주고받았다고. 그가 보관한 편지는 무려 9만9000여 통. 당대에 루이스 캐럴이 편찬한 〈편지 쓰기에 관한 여덟아홉 가지 조언〉에서 첫 줄 쓰는 법, 계속 쓰는 법, 맺는 법 등을 배울 수 있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비스켓스튜디오의 여행기를 엮어낸 기록물.
다양한 사람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벽보 엽서.
쇼룸에 햇살이 따뜻하게 스며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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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나누다

연희동 자치회관 버스 정류장은 ‘비스켓스튜디오’의 이정표나 다름없다. 정류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 문구점은 최자민, 이강산 대표가 여행 경험을 나누고자 차리게 되었다. 그들은 여행 중에 손으로 일기를 쓰는 습관을 토대로 ‘쓰는’ 제품을 주로 만들어낸다. “저희는 늘 여권과 함께 포켓 노트를 지니고 다녔어요. 일기뿐만 아니라 카페나 공원에서 바로 적어내는 글이 다른 어떤 것보다 생생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더라고요.” 문구점 안의 작은 방, 여행집이라 불리는 곳은 그 생생한 기억이 모두에게 공유되는 전시 공간이다. 현재는 〈여름, 동화: 나를 지탱해주는 것들〉이 전시 중이며 시즌별로 새로운 기록물을 선보인다. 혹여 전시를 감상하고 떠오르는 문장이 있다면 구비된 필기구로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남겨주신 기록물은 다시 여행집에 전시됩니다. 저희의 이야기이자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전시를 하고 싶었거든요.” 작은 방에서 나와 60여 종의 엽서가 꽂힌 나무함과 주인장 부부가 찍은 사진으로 제작한 문구류가 즐비한 테이블을 둘러본다. 창가의 책상 한편에는 몇 권의 노트가 나란히 놓여 있다. “처음에는 방명록처럼 간단한 메모만 적고 가시는 분이 많았는데 요즘엔 고민이나 추억, 전하지 못할 편지 등을 남기고 가세요.” 문장을 나누는 책상이라는 명칭이 깊이 와닿는 순간이다.
비스켓스튜디오 서울 서대문구 증가로 16 201호

Do it. 과자 봉지를 모아두고 ‘단짝 친구에게 처음 받은 과자’라는 소중한 메모를 남겼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그냥 버리려던  이 조각과 짧은 메모도 다시 본다!

글. 김호경HO-KYUNG KIM
사진. 흑심, 독서관, 글월, 비스켓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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