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 우리는 얼마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나 . 콩치노 콩크리트의 재즈 음악에서 시작된 여행은 파주 곳곳의 소리를 찾는 여정으로 이어졌다.
언젠가부터 ‘소리’보다는 ‘이미지’에 치중한 일상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를 보러 가도 작품에 오롯이 몰입하기보다는 그럴싸한 멋진 컷을 담기 위해 노력한다. 내가 전시장을 찾은 이유는 작품을 ‘보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오롯이 ‘감상’하는 것임에도 말이다. 작품을 통해 내적 대화를 하거나 기억 속의 여행을 떠나는 식의 수많은 가능성을 나 스스로 차단한 셈이다. 이번 여행은 단순히 외부의 소리를 듣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 바라보는 것에집 중하는 연습을 시작해보고자 했다. 이번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도 모든 감각을 열고 생의 순간을 음미할 수 있기를 바라며 파주에서 만나는 다양한 소리에 귀 기울였다.
몰입의 시간
침묵의 40데시벨
각자 하루 일과를 떠올려보자. 우리는 얼마나 침묵의 시간을 갖고 있나. 사무실에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연신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 종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말소리 등을 들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음악을 들으며 퇴근을 하고, 집에 와서도 다시 TV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마감한다. 소리에 너무 지친 탓일까. 나는 어느 여름날 시골 할머니 집에서 느꼈던 침묵의 시간을 떠올렸다. 매미도 울음을 쉬어 가고 바람이 멈춰 대나무 잎의 바스락거림도 잦아든 고요의 시간. 물론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도시생활자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나에게 적막의 틈이 아예 사라졌다. 다시 한 번 고요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을 생각하다 보광사를 떠올렸다. 어쩌면 오랜만에 아무도 없는 법당 안에 앉아 완전한 적막을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령산 기슭에 자리한 파주 보광사는 신라시대 894년 왕명에 따라 도선국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차에서 내려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대웅보전으로 들어서니 어디선가 스님의 염불 외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제사를 지내러 온 것인지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염불 소리가 괜스레 쓸쓸하게 들리는 것만 같다. 한참 동안 이어지던 염불이 끝나고 법당은 갑자기 정적에 빠져들었다. 문득 소리의 세기가 궁금해 데시벨 측정 앱을 켰다. 꽤 조용하다고 생각했는데 40데시벨이 나온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계곡의 물소리와 차소리 등이 섞여 데시벨 숫자가 쉴 새 없이 움직인다. 법당에 앉아 눈을 감고 바람과 주위의 공기를 오롯이 느낀다. 조용히 호흡하며 소리 그 자체에 집중하니 소란스러움이 사라지는 듯하다. 잠깐의 여유를 만끽하고 대웅보전을 나왔다. 보통 사찰은 흙이나 회로 바르지만 보광사 대웅보전은 모두 판벽으로 이뤄져 있다. 벽면에 그려진 백의관음도, 용선인접도 등의 벽화를 유심히 바라보다 맞은편 만세루로 눈길을 돌렸다. 툇마루 위에 머리는 용, 몸통은 물고기 모양을 갖춘 용두어신형의 커다란 목어에 눈길을 뺏긴 사이 범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식간에 70데시벨로 치솟는다. 12번에 걸쳐 울린 종소리가 보이지 않는 파문을 일으키며 공간으로 퍼져나가는 것만 같다. 내 몸속으로 소리의 파동이 스며들기를 바라며 잠시 멈추어 섰다. 마음에 쌓인 수많은 감정이 종소리와 함께 산산이 흩어진다. 전나무 숲이 펼쳐진 사찰 뒤편으로 올라가보았다. 푸르른 전나무 잎을 눈에 담으며 올라가니 숲 끝에 석불전이 보인다. 12.5m나 되는 웅장한 규모의 대불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눈을 감고 간절한 소망을 조심스레 건네보았다.
다시 보광사 입구로 내려오며 ‘침묵의 소리와 데시벨 0이 동일한 뜻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40데시벨이 넘어가는 공간에서도 나는 분명 침묵을 느꼈으니까. 우리가 흔히 조용하다고 여겨지는 미술관은 어떨까. 0데시벨, 말 그대로 고요함을 목격하기 위한 소리의 여정을 이어간다. 문발동에 있는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으로 향한다. 팝아트의 황제 앤디 워홀과 낙서를 예술로 승화시킨 장 미셸 바스키아의 삶과 작품 세계를 그린 그래픽노블 <앤디워홀>과 <바스키아>를 모티브로 기획한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출판사 열린책들이 펴낸 책들로 가득한 1층의 서가와 카페를 지나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바로 데시벨 측정에 돌입했다. 전시장 깊숙이 들어왔음에도 50데시벨이다. 오후 1시 점심식사를 끝낸 출판사 직원들의 수다 소리와 카페의 믹서기 소리가 한데 섞여 귀에 들어온다. 그래도 3층은 조금 더 조용한 것 같다. 전시 <2021 아티스트 프로젝트 컬렉션>에 참여한 작가 12명의 작품을 면면히 살펴본다. 22데시벨. 이제 그만 고요의 소리가 0데시벨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할 것 같다. 작품 감상을 마칠 무렵 문득 ‘온전한 침묵은 데시벨 크기가 아닌 몰입의 깊이에 달린 게 아닐까’ 하는 깨달음이 들었다.
아날로그의 편안함
가장 기분 좋은 70데시벨
침묵과 데시벨에 대한 생각은 잠시 내려두고 음악 자체에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청명하고 깊은 울림을 주는 칼림바는 명상의 도구뿐 아니라 크기가 작아 휴대도 편하고 연주도 쉬워 코로나로 집콕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소소한 즐거움을 주는 악기로 인기를 얻고 있다. 와동동에 있는 우쿠리네에 들러 그 소리를 들어보기로 했다.
3년 전부터 우쿨렐레와 칼림바 등을 가르치고 있는 오헌국 대표는 일곱 살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대학에서 실용음악을 전공한 뒤 30년 넘는 시간 동안 음악과 함께해오고 있다. “제 인생을 돌아보면 음악과 함께한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아요. 기타를 배워볼까 하다가 우쿨렐레를 알게 됐고 칼림바 연주까지 하게 됐죠.” 그렇다면 우헌국 대표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소리는 무엇일까. “가게 어닝에 비 떨어지는 소리를 좋아해요.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거든요. 칼림바 소리도 마찬가지예요. 마음을 톡톡 두드리고 심신이 평온해지는 매력이 있어요.” 잠시 근처 공원에서 오 대표에게 칼림바 연주를 부탁했다. 그녀가 선택한 곡은 듀스의 ‘여름 안에서’. 미디엄 템포 뉴 잭스윙 장르의 ‘여름 안에서’가 맑고 영롱한 소리로 재탄생하다니! 근처 공원에 앉아 칼림바 소리를 들으며 무성하게 자란 풀잎을 눈에 담는다. 살갗에 닿는 습기마저도 오늘을 기억하는 매개체가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소나기가 내렸고, 우리는 짧은 버스킹을 마무리했다.
본격적인 음악 감상을 위해 탄현면에 위치한 콘서트홀 콩치노 콩크리트Concino Concrete로 향했다. 지난 5월 1일 오픈한 콩치노 콩크리트는 ‘노래하고 연주하며 화합하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지상 4층, 250평 규모의 콘서트홀로, 문을 연 지 채 두 달도 되지 않아 오디오 마니아들의 성지로 급부상하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정면에 1930년대 전설의 명기로 소문난 빈티지 스피커 미국 웨스턴일렉트릭의 스피커와 독일 유로노 주니어 스피커가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왼쪽에는 탁 트인 통유리창을 통해 느릿하게 흐르는 임진강 풍경이 보인다.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1만 장이 넘는 LP와 노이만 커팅 머신, EMT 턴테이블, 음악 믹싱 콘솔 등 오디오 기기가 자리해 여기가 콘서트홀이 아니라 오디오 박물관인가 싶은 착각이 들었다.
콩치노 콩크리트의 설립은 현재 의료계에 종사하고 있는 오정수 박사의 음악과 오디오에 대한 사랑이 있기에 가능했다. “10대 시절부터 오디오에 관심이 많았어요. 빈티지 오디오에는 역사의 영혼이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LP에 생생히 기록된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현재에서 1930년으로 시공간을 초월한 음악 여행을 할 수 있죠.”
재즈를 좋아한다는 에디터의 말에 직원이 재즈 뮤지션 찰리 헤이든의 음반 <녹턴>을 틀어주었다. 마침 ‘El Ciego’가 흘러나왔다. 오후 6시 44분 70데시벨. 이어서 소니 롤린스의 음악까지 나오자 마음이 점점 노곤해지는 느낌이다. 붉은 노을이 지는 저녁, 적당한 서늘함이 느껴지는 콘서트홀에서 재즈를 들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지금 나에게 데시벨의 세기에 대해 묻는다면 그건 중요치 않다고 말하고 싶다. 나를 기분 좋게 하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으니까.
자연에서 듣는 마음의 소리
숲의 적막 29데시벨
소리를 찾아 떠난 여정은 다음 날 율곡수목원으로 이어졌다. 파평면 율곡리에 위치한 율곡수목원은 2015년 6월부터 임시 개원해 운영하다 지난6 월 4일 정식 오픈했다.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려 조성한 21개의 주제원에 1300여 종 이상의 식물이 자라고 있으며, 남녀노소를 위한 산림치유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아침 일찍 새소리를 듣기 위해 수목원 입구에서 김광희 산림치유지도사를 만났다. 그녀는 “율곡수목원에는 5km 길이의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어요. 수목원에 조성된 꽃을 감상하고 새소리를 들으며 전망대까지 올라가 볼 거예요”라고 간략하게 오전 일정을 설명했다. 시선을 저 멀리 던져 늘어선 계단을 바라보며 등산 난이도를 확인해보았다. 예상과 달리 전망대까지 다소 경사진 길을 올라야만 할 것 같다. 캘리포니아 양귀비가 노란색, 붉은색, 오렌지빛으로 흐드러지게 피어난 수국원을 지나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계단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잠깐 오르막길을 올랐을 뿐인데 벌써 숨이 차오른다. 새소리보다 생생하게 들리는 건 내 숨소리인 것만 같다. 쉼터에서 숨을 고르고 새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발걸음을 재촉한다. 수목원 중간에 이르자 물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왠지 더 조용해진 듯해 소리의 세기를 측정하니 35데시벨.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좀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간다. 구절초가 피어 있는 치유의 숲을 지나니 온전한 적막 속에 둘러싸인 것 같다. 소리의 세기를 측정하니 29데시벨이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생강나무 잎의 청량한 향기를 맡으며 지친 몸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곧 장원종이 보일 거예요. 그 종만 지나면 목적지인 전망대가 나옵니다”라고 말하는 김광희 지도사의 말에 힘입어 다리에 힘을 주고최종 고지를 향해 올랐다. 드디어 장원종이 보이고 전망대에 서서 임진강 일대를 바라본다.
꿀맛 같은 휴식 후 내려갈수록 다시 새소리가 커진다. 딱따구리 등 다양한 새소리를 들으며 명상의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다. 내 안에 쌓아두었던 부정적인 기운은 내보내고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긍정적인 에너지로 채워본다. 눈을 뜨자 김광희 지도사가 곁에 있는 소나무를 가리키며 “나무를 껴안고 나무에 물 오르는 소리를 들어보세요”라고 권한다. 그녀의 말에 따라 물이 차오르는 소리를 들어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나무는 속살을 그득히 채우며 잘 자라고 있을 것이다. 새소리에 집중하며 길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덧 3시간 전에 보았던 입구가 멀찌감치 보였다. 오전 시간 동안 가이드를 맡아준 김광희 지도사에게 인사를 건네고 바람의 소리를 찾아 마지막 장소인 평화누리공원으로 향했다.
3만 평 규모의 잔디밭이 깔린 평화누리공원에 들어서니 단연 눈길을 끄는 건 다그르르 돌아가는 알록달록한 바람개비. 한반도를 오가는 자유로운 바람의 노래를 표현한 김언경 작가의 작품 ‘바람의 언덕’이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개비 몇몇이 천천히 움직이다 멈춘다. 그러다 바람이 거세지자 차르르 소리를 내며 제법 빠르게 돌아간다. 파도가 넘실대듯 파르르 돌아가는 바람개비 소리가 경쾌하다. 소리의 세기는 45데시벨. 오른편에 이스터섬 모아이상을 연상시키는 대나무로 만든 조형물인 최평곤의 작품 ‘통일 부르기’가 북쪽을 바라보고 서 있다. 북녘을 그리워하는 실향민들의 슬픔을 통일에 대한 염원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마침 의 일환으로 경기도미술관이 기획한 ‘DMZ아트프로젝트-다시, 평화’가 펼쳐지고 있는 기간이었다. 평화가 다시 오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아 조각, 회화, 설치, 영상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중 백남준 작가의 ‘호랑이는 살아있다’ 앞에 섰다. 백남준이 직접 ‘금강에 살어리랏다’를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통일을 염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느껴진다. 바람의 소리를 찾아온 여행의 마지막 장소에서 나는 그리움의 목소리를 들었다. 평화를 바라는 마음이 바람처럼 불어나가 결국에는 모두의 소망대로 기어이 이루어지길. 파주의 마지막 소리로 염원을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