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은 눈(雪)과 큰 산(嶽)이라는 한자를 쓴다. 눈이 많아 설악이었나 보다. 요즘은 옛날만큼 그리 많은 눈이 내리진 않지만 큰 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참으로 골격이 장대하고 아름답다. 흰 눈이 덮인 풍경도 수려하지만 가을 장마의 운무도 참으로 빼어나다. 거대한 골격 사이로 바람이 휘몰아 다니며 유유히 흐르는 운무는 마치 연인들이 만나 사랑을 나누는 듯하다.

설악은 참으로 매력적인 상대다. 나는 20여 년 동안 산악잡지사에서 암벽사진 칼럼을 맡았기에 설악산의 바위를 오를 일이 많았다. 설악산 바위와 부대끼며 삶과 죽음의 경계선까지 닿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면 행복한 시간이었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그렇게 설악산을 좋아한다면서 사랑하는 연인들의 사진처럼 촬영한 적이 있는지?’ 가족사진을 찍는 것처럼 말이다. 이 설악산 사진은 그렇게 탄생하였다. 설악의 사진으로 전시를 여러 차례 열다 보니 그 아름다움에 더욱더 몰입했고, 사람들도 그 미감 덕분에 치유를 경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아예 설악에 뿌리내리고 있다. 아마 나는 설악산 자락에 한 가닥, 두 가닥쯤 뿌리를 내린 것 같다. 언젠가 가을 단풍이 형형색색 물들고 그 단풍에 지지 않겠다며 화려하게 차려입은 등산객들이 재잘대며 계곡을 오르고 있었다.
나는 계곡에서 청년들의 퍼포먼스를 촬영 중이었고 계곡 한쪽 끝에서는 마침 창 하시는 분이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 모든 풍광이 어우러져 마치 무릉도원에 있는 듯한 날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불현듯 깨달았다. ‘아 우리가 산으로 가는 것이 아니구나. 벌이 꽃의 아름다움에 끌려 다가가듯 저 자연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거였구나!’ 설악산 가을 정취의 최고조는 천불동계곡일 것이다. 나는 흑백으로밖에 표현을 하지 않아 그 아름다움을 글로써 말할 수밖에 없지만, 올해 혹여 천불동의 부름에 이끌려 그곳에 가시거든 색감을 감상하는 것도 좋으나 가만히 눈을 감고 색조의 아우성을 한번 들어보길 권한다.

♦ 강레아는 우리나라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 클라이밍 사진가다. 사진을 통해 클라이머의 숨결을 그대로 전해주는 그녀는 대학산악연맹의 공식 사진가로 활동하며 자신만의 작품 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마음에 맺힌 설악산의 순간을 더욱 강렬한 흑백으로 단장해 사진으로 전통 수묵화를 그려낸다. 산과 바위 등 자연을 인격체로 대하는 그녀의 철학은 우리나라 전통 산수화가 추구하는 정신이기도 하다. 전시에서는 사진을 한지에 인화해 이러한 분위기를 극대화한다. 최근 프랑스 알프스의 그르노블에서 설악산 사진전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