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리프레시가 필요한 순간이 온다. 어쩌면 한 해의 절반을 보낸 지금이 바로 그때가 아닐까. 김현철의 노래 ‘춘천 가는 기차’처럼 조용히 몸을 싣고 떠나보자. 여백을 담은 여정이 초여름의 축복이 되어줄 것이다.
경춘선 청춘열차를 타고 호수와 폭포가 아름다운 호반도시로 떠난다. 춘천이라는 지명은 고려 태조 시절, ‘봄이 빨리 오는 고을’이라는 뜻의 ‘춘주’라는 이름에서 시작한다. 이어 조선 태종 때 ‘주(州)’를 ‘천(川)’으로 바꾸어 과거의 춘주가 지금의 춘천이 되었다. 봄에서 유래된 땅이라는 의미를 품은 춘천은 사실 우리나라에서 봄이 가장 늦게 도착하는 곳이다. 봄의 염원을 이름에 담은 도시 춘천은 소설가 김유정의 고향이자 그의 작품 <동백꽃>의 배경지이기도 하다. 유안진 시인의 말처럼 춘천은 여름에도, 가을에도 봄일까?
마음 양식 채우기
운교동의 육림고개 입구, 극장 옆으로 난 길을 오른다. 가장 높은 곳에 다다르면 강냉이집과 프로이데 아뜰리에 사이로 자리한 춘천일기가 있다. 어느 소설이나 독립영화에서 마주한 듯 익숙한 풍경이다. 여행 책방 겸 편집숍인 이곳은 오래된 기름집을 최소한으로 고쳐 마련한 공간이다. 부부인 강승용, 최정혜 대표는 5년 전 춘천으로 여행을 왔다가 이곳에 반해 정착하게 됐고, 청년 예술가를 모아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 시작했다. 책방에 들어서면 노출 콘크리트 벽과 옛날 영화 속에 나올 법한 교실의 나무 마룻바닥으로 이루어진 작은 공간이 드러난다. 책과 잡화가 나름의 질서로 밀도 있게 채워져 있고, 무릎 높이 진열대 위에는 아기자기한 소품과 문구류가 눈길을 끈다. 자개 거울 옆으로는 <우린 춘천에 가기로 했다> 같은 낯선 책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우리가 모르던 춘천이 다 여기에 숨어 있던 듯하다.
약사천수변공원 근처에는 담이 없는 가옥이 하나 있다. 담 대신 알록달록 낮은 울타리가 눈에 띄는 이곳은 복합문화공간 터무니창작소다. 1956년에 지어진 열 평 남짓한 가옥을 조금씩 개조해 완성한 곳으로, 창틀을 보니 ‘약사동 빈집에서 수거한 오래된 창으로 만든 창문 틀’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동네 주민을 위한 전시회가 열리는 이곳에서는 주민과 예술가가 만나 문화예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새 작품을 모색한다. 덕분에 주민들의 단조로운 일상이 예술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평이다. 지난 2월에는 수업에 참여했던 주민 8명이 서양화 수업 결과전 <다시 봄>을 개최했다.
춘천 사북면의 구불구불한 화악산 길을 따라 멈추지 않고 달리다 보면 신기루같이 자리한 이상원미술관이 등장한다. 새파란 이파리 사이를 뚫고 햇살이 내리쬐는 길 역시 잘 짜인 하나의 작품 같다. 자연과 예술, 휴식이 어우러진 이곳은 이상원 화백을 비롯한 여러 예술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작품 관람 후 도자나 유리, 금속을 이용한 공방 체험도 가능하다. 그러다 출출해지면 이탤리언 레스토랑인 라운지05에 들러 파스타나 스테이크 같은 요리를 맛보아도 좋다. 하룻밤 머무를 생각이라면 이상원미술관 뮤지엄스테이 객실을 이용하길 추천한다.
상념 버리기 연습
해사한 빛이 쏟아지는 정원으로 초대받았다. 여기는 남산면 영태산 중턱에 위치한 제이드가든으로 유럽식 정원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수목원이다. 뾰족한 지붕과 키가 큰 나무를 보고 있자니 동화 속 한가로운 마을에 떨어진 것만 같다. 지금 같은 초여름에는 새파란 초록의 기운을 얻을 수 있고, 가을에는 짙은 분홍빛 핑크뮬리를, 눈 쌓이는 겨울에는 그림 같은 설경을 감상하기 좋다. 정원을 산책하는 동안에는 만 가지 병을 치료한다는 만병초부터 비비추, 목련 등 3900여 종의 꽃과 나무를 만날 수 있다. 붓꽃과 부들, 갈풀처럼 물가에서 잘 자라는 수생식물을 식재한 수생식물원도 들러본다. 이곳에서 느리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빼곡했던 마음에 조그마한 틈이 생기는 것만 같다.
제이드가든을 나와 다음 행선지가 있는 근화동으로 향했다. 여기에 온 이유는 소양강 위로 시원하게 트인 전망을 자랑하는 소양강스카이워크가 있기 때문이다. 투명한 유리 다리를 건너는 동안 마치 강 위를 걷고 있는 듯한 착각이 인다. 하늘과 강 사이 어드메를 걷는 감각이 마음에 든다. 스카이워크 끝 지점에 다다르면 쏘가리 동상이 보인다. 박종재 작가가 물 위로 튀어 오르는 쏘가리 한 마리를 보고 영감을 얻어 제작한 작품 ‘자연의 생명’이다. 주둥이로 하늘을 향해 물을 뿜고 있는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렇게 온통 새파란 세상 속에 있다 보니 어딘가 막혀 있던 마음도 금방 원래의 자리를 찾는 기분이다. 흐렸던 감정이 소양강의 풍경처럼 쾌청해졌다.
마음에 돌덩이가 있거든 우선 몸을 움직이라고 했다. 고전적인 방법은 많은 순간 좋은 답이 되어준다. 조금 가파른 감이 있지만 무작정 걷기 위해 아까 지나쳤던 육림고개로 다시 왔다. 지금은 굳게 닫힌 육림극장과 저 너머의 중앙시장을 이어준다. 이곳은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춘천의 중심지였지만 쇠퇴의 기로에 선 적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지고 살기를 반복하듯 방치됐던 이 길목도 지금은 새 주인을 찾았다. 2015년 춘천시가 시행한 거리조성사업으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동안 비어 있던 점포들은 다시금 단장을 했다. 또 비어 있던 집은 머신이 분주하게 돌아가는 카페가, 청년들이 밥을 짓는 식당이, 이국적인 분위기의 상점이 되었다. 지향점이 다른 가게들의 면면을 보고 있자니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재충전을 위한 한 입
건강하게 한 끼 식사를 하고 싶다면 어쩌다농부에 가보는 건 어떨까. 죽림동에 위치한 이곳은 올바른 음식 철학을 중심으로 마음 편히 먹을 수 있는 한 끼 식사를 지향한다. 이곳 땅에서 자란 농산물은 농부와 요리사의 손을 거쳐 음식으로 다시 태어난다. 메뉴를 주문하면 훌륭한 비주얼의 그릇이 식탁 위로 놓인다. 농부네한그릇텃밭, 농부네소보로텃밭 등 메뉴는 신선한 채소가 가득해 입안 가득 봄 내음이 퍼진다. 제철 재료를 양껏 버무린 명란들기름파스타, 곰취페스토파스타 등 면 요리도 인기다. 담백하고 깔끔한 맛으로 주민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자극적이지 않은 요리로 배를 채우고 싶은 날 추천할 만하다.
식사 후에는 향긋한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로맨틱한 막걸리 펍 꽃술래에 가보자. 꽃을 보며 우리 술을 음미할 수 있는 곳으로 꽃막걸리와 칵테일막걸리, 퓨전 한식을 선보인다. 주목할 만한 메뉴로는 황잣 향을 물씬 품은 프리미엄 막걸리 ‘문삼이공잣’, 오디의 달콤한 맛과 탄산의 청량감이 조화로운 ‘별산 오디 스파클링’, 무농약과 무화학비료로 재배한 문경 쌀과 우리 밀 누룩으로 빚은 ‘희양산막걸리 으랏차차!’ 등 이름만 들어도 궁금해지는 전통주가 한가득이다. 술과 함께 곁들이는 해산물로제떡볶이와 뭉텅수육, 봄달래무침이 술의 풍미를 더한다. 낯선 곳에서 무엇을 주문해야 할지 고민된다면 막믈리에 사장님에게 자문을 구해보자. 막걸리와 꼭 어울리는 안주를 추천해줄 것이다.
이제는 명물이 돼버린 감자밭에도 발걸음을 아니 할 수 없다. 춘천역에서 내려 소양댐 방면의 버스에 올라탄 뒤 상천초등학교라는 목적지 안내 음성이 나오면 하차한다. 도보로 1분 남짓한 거리에 감자밭이 자리하고 있다. 청년 농부가 일구고 운영하는 농장 카페로 전국 각지의 농부들이 키운 농산물로 제철 음료와 디저트를 만든다. 빵을 주문하면 진짜 감자와 똑같이 생긴 빵이 나오는데, 진짜와 구별하기조차 어려운 비주얼에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한 입 베어 물면 포슬포슬한 식감이 재미있다. 감자의 품종은 로즈홍감자. 강원도에서 개발한 품종으로 겉은 붉고 속은 노랗고 맛은 달콤하다. 여기에 합성첨가물을 일절 넣지 않아 담백하게 즐길 수 있다. 보통 카페에서는 만나보기 어려운 감자라떼도 인기 메뉴이니 꼭 주문해보자.
INSIDER
춘천 디자이너의 산책 코스
춘천의 강과 산이 좋아 이곳에서 살고 있다는 권용식 디자이너는 지역을 주제로 다양한 창작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풍경을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디자이너이고, 춘천문화재단에서 발행하는 잡지의 에디터인 동시에 무인 카페 운영자다. 프라이빗 티룸 겸 커뮤니티 공간인 안하무인( @anha.muin)을 운영하는 그는 여유와 평온의 가치를 전하고자 한다.
중도
춘천대교를 두고 도심과 분리된 이 섬에서는 제주 곶자왈처럼 살아있는 자연의 원시림을 만날 수 있다. 여름에는 푸른 숲을, 가을에는 울긋불긋한 낙엽을, 겨울에는 눈 쌓인 설국을 감상할 수 있는 명소다. 자연을 좋아하는 이에게 인적 드문 이 공간은 조용히 사색하며 걷기 좋을 듯하다.
춘천숯불닭갈비 중앙로점
춘천에는 동네마다 닭갈비집이 있지만 낙원동 골목에 위치한 이곳은 권용식 디자이너가 특별히 손에 꼽는 맛집이다. 닭갈비를 백김치와 방풍나물에 싸 먹은 후 불에 구워 먹는 주먹밥이 별미다. 저녁 8시면 장사를 끝내니 시간을 잘 체크해 방문할 것.
코너스톤
한적한 효자동 골목에 위치한 코너스톤에서는 지역 농산물로 만든 건강 빵을 판다. 인심 넉넉한사장님이 반갑게 손님을 맞고, 맛있는 크루아상 샌드위치와 따뜻한 차가 준비되어 있다. 2층 좌석에서 멀리 바라다보이는 봉의산과 아담한 동네 풍경이 아름답다.
서툰책방
봉의산으로 가는 옥천동 골목길에 단골 서점이 있다. 두 남녀 주인장의 취향이 담긴 책들이 큐레이션되어 있고, 책을 구매하면 희망하는 문구를 주인장이 직접 캘리그래피로 써 준다. 만일 책을 고르는 게 어렵다면 블라인드 북을 이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