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서로울 서(瑞)’ 자에 ‘뫼 산(山)’ 자를 써 ‘상서로운 산’이라는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충남 서산. 문화재와 자연이 함께 호흡하는 이곳에서는 고즈넉한 거리의 풍경을 따라 이름처럼 복되고 길한 여정만이 이어질 것 같다.
대한민국의 보물 목록이 나열된 문서에서는 서산을 이렇게 표현한다. ‘산세가 읍치를 둘러싸고, 바다가 삼면을 둘러싸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이 도시의 중심에는 서산호수공원이 자리하고, 공원을 따라 가족이나 연인이 함께 산책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주변으로 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테크노밸리가 형성되었고 지속적인 발전이 이루어지는 곳. 동시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한 천주교의 박해성지 해미읍성이 위치하고, 불교문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여러 국보도 자리한다. 널따란 목장을 배경 삼아 시대의 기억을 품고 있는 장소와 산책하기 좋은 길이 한데 어우러진 서산. 그곳에서 가는 길마다 마주치는 건 긴 시간을 품은 문화재들이었다.
과거를 걷다
둘레 1800m, 높이 5m의 해미읍성은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지어졌다. 성곽 아랫부분에는 큰 돌을, 윗부분에는 작은 돌을 사용해 벽을 세우고 안쪽은 흙으로 단단히 메웠다. 문은 동쪽과 서쪽, 남쪽 세 군데에 위치하며, 북쪽에는 적이 알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비밀 출입구인 암문을 달았다. 성곽에 꽂혀 있는 원색 깃발은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펄럭인다. 이는 조선시대의 주요 병영 깃발로, 군대 안에서 방위를 나타내는 역할을 했다. 과거에는 읍성 안쪽으로 펼쳐진 길에 겸영장이 집무하던 ‘동헌’을 비롯해, 관원이 정무를 보던 ‘관아’와 외국 사신이 묵도록 지은 ‘객사’ 등이 자리해 장관을 이루었다고. 언덕으로 오르면 앞뒤로 펼쳐진 소나무와 대나무 숲을 만나게 된다. 전쟁이 한창이던 때 대나무는 죽창이 되었고 소나무는 마차나 무기의 재료로 쓰였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은 있는 그대로 천천히 걷기 좋은 산책로가 되어준다.
몇 그루의 버드나무가 정자 주변을 지키는 양유정. 여기에는 1982년에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들이 서 있는데, 나쁜 기운이 마을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어하고, 좋은 기운이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막는 수구막이 역할을 한다. 1927년 발간된 서산군의 사찬 읍지 <서산군지>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물안개가 자욱하게 끼고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선비들의 놀이터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시간이 흘러 1960년에는 크고 작은 모임이나 집회가 이루어지는 지역의 명소가 되었고, 큰 극장이나 문화회관이 없던 1970년대까지 각종 유세나 강연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1990년에 들어서는 옆으로 흐르던 명림천이 생활하수로 오염돼 복개공사를 진행했다. 이제는 공원이 되어 여름엔 푸르른 녹음이 지고 가을엔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가 이어진다.
조선 중기의 무신 충무공 정충신의 사당인 진충사. 정충신 장군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17세의 나이로 권율 장군 옆에서 힘쓰며 행주대첩 승리에 일조한 인물이다. 1624년에는 이괄·한명련 등이 일으킨 이괄의 난을 진정시키고, 1627년 조선과 후금 사이의 정묘호란 당시에는 팔도부원사로 참전했다. 1636년 별세한 당시 임금이 어의를 벗어 수의로 쓰도록 하사했다고 한다. 이때 인조의 왕명으로 건립된 사당은 1737년 영조 때에 고쳐졌고, 1968년 후손들이 훼손된 사당을 복원했다. 진충사의 사당으로 향하는 길에는 빨간 홍살문과 솟을대문이 있고 안에는 동재와 서재가 자리한다. 본당에는 진충사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고 사당에는 영정과 유품, 위패를 비롯해 저서인 <백사북천일록(白沙北遷日錄)>, <만운집(晩雲集)> 등이 보관되어 있다. 담장 앞으로 향나무와 비자나무가 어우러진 이곳에서는 매년 4월 25일이면 시민과 후손, 유림 등이 모여 제향을 지낸다.
조선시대 여행자
음암면 유계리의 한다리마을. 16세기 중반부터 이 근방에는 경주김씨 가문의 사람들이 터를 잡고 모여 살았다. 서산 경주김씨 고택은 19세기 중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시대의 기와집으로, 집 앞 문패에는 지금도 집주인의 이름이 적혀 있다. 대문을 지나면 바로 앞에 사랑채가 보이고 왼쪽에는 행랑채가, 오른쪽으로는 별채가 위치한다. 별채 옆으로는 억새와 짚으로 지붕을 만든 작은 초당도 보인다.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사랑채에 있는데, 사랑채의 툇마루 앞으로 기둥을 세운 뒤 차양을 달아 공간을 넓게 확보한 것. 계암고택이라는 이름의 숙소도 함께 운영하고 있으니, 진짜 한옥에서 고요한 정취를 느끼고 싶다면 하룻밤 묵어도 좋을 듯싶다. 가지런히 벗어둔 흰 고무신과 고양이 밥그릇으로 쓰이는 떨어진 기와가 이루는 소박한 전경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중기 이후 학문 연구와 명현의 제사를 위해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 성암서원. 돌계단을 넘고 붉은 홍설문 아래를 지나면 잔디를 밟으며 걷기 좋은 길이 이어진다. 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외삼문을 지나면 마주보고 선 동재와 서재가 나타나고, 위패를 모신 사당 등을 만나게 된다. 성암서원이라고 적힌 현판도 보이는데, 1721년 나라에서 내린 것이라고. 1719년에 세워진 이곳에서는 고려시대 문신으로 홍건적의 난 때 공을 세운 유숙,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황해도 관찰사 등 여러 벼슬을 거친 김홍욱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1871년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리며 허물어졌다가, 1923년 서원을 재건하자는 의견이 모여 1924년에 다시 세워졌다. 이후 여러 번 고쳐지기를 반복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서산 시청에는 조선시대의 관아 건물인 관아문이 남아 있다. 관아문이란 외동헌의 정문으로, 외동헌은 조선시대 군수가 집무를 보던 곳이다. 현재 외동헌은 ‘서산 외동헌 문화유적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다. 관아문 앞쪽에는 ‘서령군문’, 외동헌에는 ‘서령관’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이는 서산시의 옛 이름인 ‘서령부’에서 따온 것이다. 관아문은 아래는 문, 위에는 사방을 살피는 누가 있는 2층짜리 문루 형태로 세 칸의 앞면과 두 칸의 옆면으로 이루어져 있고, 지붕은 옆면이 팔(八) 자인 팔작지붕이다. 돌기둥 모양의 주춧돌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기둥 사이에 대문을 달아놓았다. 1475년에 완공된 서산읍성 내에 자리하던 것으로, 당시에는 객사, 동헌, 사령청, 군관청, 군기고, 관노청 등 많은 시설이 있었지만 지금은 관아문과 외동헌, 객사만이 남았다.
사찰이라는 역사교실
개심사는 상왕산에 세워진 백제시대의 사찰이다. 백제시대 651년 혜감국사가 창건했을 당시의 이름은 개원사인데, 고려시대인 1350년 승려 처능이 고치고 다시 지을 적에 ‘마음을 열고 씻는다’는 의미를 지닌 개심사로 이름을 바꿨다. 조선시대에 헐고 고치는 몇 번의 중창을 거쳤고, 마침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숲 사이 돌계단을 건너 사찰로 들어서면 기다란 모양의 인공연못과 오래된 나무들이 눈에 띈다. 현판에는 ‘상왕산 개심사’라고 적혀 있는데, 근대 명필인 해강 김규진이 쓴 것이다. 해탈문을 지나면 휘어진 나무를 재료로 지은, 이 사찰에서 가장 오래된 심검당을 만날 수 있다. 지혜의 칼을 찾는다는 의미의 심검당은 대웅전, 명부전과 함께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개심사의 이름이 적힌 안양루에서는 저 멀리의 풍광을 내다보기 좋다.
1968년, 백제시대 금동여래입상과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된 백제시대의 절터 보원사지. 1970년대 들어 이곳에서는 목장 경영이 대대적으로 진행됐고, 이때 마을 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 시작해 지금은 절터만 남았다. 석조와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당간지주, 통일신라 때부터 고려 초까지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띤 오층석탑 같은 유물만 이곳에 남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인 10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당간지주는 부처나 보살의 위엄과 공덕을 표시하는 역할을 하는데, 사악한 것을 쫓아낸다는 ‘당’이라는 깃발을 건 당간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사자상이, 위층 기단에는 불교의 여덟 수호신인 8부중상이 새겨진 오층석탑과 더불어 오랜 시간을 간직하고 있다.
높은 돌계단 위에 자리한 백제 후기의 마애여래삼존상. 2.8m의 커다란 크기로 암벽에 세 개의 불상이 나란히 조각되어 있다. 백제의 불상은 단아한 분위기를 간직한 귀족 성향의 불상과 온화한 느낌을 자아내는 서민적인 불상으로 나뉘는데, 서민적 불상의 예시로 마애여래삼존상을 꼽을 수 있다. 자연 암벽에 입체적으로 새긴 ‘마애불’ 형식으로, 보주를 든 입상 보살과 반가보살을 함께 새긴 것은 중국, 일본, 고구려, 신라를 통틀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형식이라고. 가운데에는 넉넉한 미소를 짓는 석가여래 입상이, 왼쪽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품은 제화갈라보살 입상이, 오른쪽으로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머금은 미륵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불상의 특징은 환한 아침에는 해사하고 평화로운 웃음으로, 저녁에는 그윽하고 자비로운 표정으로 다가온다는 것. 낮과 저녁에 한 번씩 들러 찬찬히 살펴볼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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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터줏대감의 추천지
서산시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가옥이자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경주 김씨 고택에는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다. 독립운동가 백림 김용환 의사의 아들로 서산시장을 지낸 한다리 김씨의 후손 김기흥 씨가 그 주인공. 추사 김정희, 학주대감 김홍욱의 후예인 이곳의 터줏대감이 여행자에게 추천한 곳을 귀띔한다.
간월도
과거 간월도는 천수만 안에 자리한 조그마한 섬이었다. 간월도가 육지가 된 것은 38년 전인 1984년으로 대규모 간척사업의 영향으로 바다에서 육지가 되었다고. 매년 260여 종 50여 만 마리의 철새가 모여드는 곳이므로 가을에 방문하면 특히 멋진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운산목장
운산면에는 운산목장을 비롯한 많은 목장이 자리한다. 너른 초록의 한우 목장을 멀리서 바라보면 점처럼 작게 보이는 수많은 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는 평화로운 모습을 볼 수 있다. 봄이 되면 푸른 들판 위로 연분홍 벚꽃이 만개해 많은 이들이 충남 벚꽃 명소로 꼽는 곳.
만리포
조선 초기, 중국에 사신을 보낼 때 ‘수중만리 무사항해’를 기원해 만리장벌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만리포는 북쪽에 자리한 천리포해변과 함께 명소로 꼽히는 곳이다. 낮에는 햇살에 반사된 흰 모래사장이, 노을이 지는 일몰 때에는 석양이 눈부시게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