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PERFECT
PLATE
멀리 떠나야만 여행이 아니다. 문을 열고 일상적 공간에서 나와 차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이미 여행은 시작된다고 믿는다. 크게 의미 두지 않은 채 보통 날을 채우고 있는 다양한 요소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마다 새로운 것들을 슬며시 보여준다. 서울도 그렇다. 바쁜 일상에 치여 뭉뚱그려 하나의 풍경으로 보이던 도시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새롭게 발견하는 요소들은 여행자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준다.
STOP 1. 미래적 전통, 국립현대미술관
시간과 공간이 다양하게 혼재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들어서면 마치 낯선 도시를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곳은 1930년대에 지어진 기무사 청사를 복원한 건물과 직사각형 마당을 중심으로 2013년 신축한 미술관이 나란히 연결됐다. 담도 없고, ‘여기가 입구입니다’ 라고 명확하게 말해주지도 않으니 용감하게 들어가보는 수밖에 없다. 이건 아마도 이곳을 건축한 이의 노림수일지도 모른다. 일단 들어와서 경험해보라고.
건물 내부로 들어가도 명확하게 정해진 동선을 찾기는 어렵다. 그러니 미술관을 여행하는 이들의 선택에 따라 수많은 동선이 만들어지고 없어지기를 반복한다. 서울 여행의 시작으로 괜찮은 목적지다. 예술가들의 작품을 만나는 것은 일상에서 영감을 자극받기에 좋은 방법 중 하나. 미술관 길을 따라 아라리오 갤러리, 학고재를 지나 국제갤러리까지 이어지는 길을 산책하는 동안 일상에서 벗어날 채비를 마쳤다.
NAVIGATOR 1.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서울 종로구 삼청로 30 / 02-3701-9500 / 10:00~18:00 / www.mmca.go.kr
NAVIGATOR 2. 국제갤러리
서울 종로구 삼청로 54 / 02-735-8449 / 월~토요일 10:00~18:00, 일요일 및 공휴일 10:00~17:00 / www.kukjegalle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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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락고재
한옥에서는 집이 지닌 특유의 아름다움과 삶을 대하는 태도를 생각하게 된다. 게다가 구조적인 특성 때문인지 미처 몰랐던 것들을 끊임없이 찾아내게 만든다. 가회동 락고재에서 머무는 하루 동안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무로 만든 대문을 열고 돌계단 몇 개를 내려가면 담과 집 사이 오래된 항아리가 소담스럽게 놓인 길이 나온다. 앞뒤로 뻥 뚫린 대청마루로 바로 올라갈 수도 있고, 빙 둘러 돌아가 마당으로 향할 수도 있다. 햇살이 좋은 오후에는 마루에 올라 그늘진 처마와 한옥 구석구석 빛이 닿는 곳들을 따라 구경하기도 한다. 방 안 창호지를 붙여 만든 창문을 열어 두고, 계절의 변화를 호사스럽게 느껴보는 것도 가능하다.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흙냄새, 나무 냄새를 한층 짙게 맡을 수도 있다. 발견의 과정 중 조셉 리저우드 셰프의 눈길 끝에 걸린 가마솥, 그의 상상은 그 안에 어떤 음식을 뭉근히 끓여내고 있을까.
NAVIGATOR. 서울 종로구 가회동 218 / 02-742-3410 / www.rkj.co.kr
STOP 2. 재해석의 묘미, 서촌 강병인 캘리그래피 연구소
부암동에서 출발해 자하문로를 달린다. 그리고 효자동을 지나 옥인동으로 접어든다. 이곳은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서쪽에 위치해 ‘서촌’이라 불린다. 힙한 동네 중 하나로 자리 잡으며 옛것과 새것이 뒤엉키고 있는 곳이다. 다양한 모양의 골목으로 구성된 이 동네에서는 골목을 잘못 들어서면 목적지를 잃기 일쑤다. 길을 헤매다 보면, 머릿속에는 다양한 상상이 펼쳐진다. 그래서인가. 이 동네에는 유독 많은 예술가가 터를 잡고 살아왔다. 겸재 정선이나 추사 김정희, 시인 윤동주, 이상 등을 비롯해 나열하려면 과장을 조금 보태 페이지를 가득 채울 수도 있겠다.
오늘 목적지는 강병인 캘리그래피 연구소다. 내비게이션에서는 ‘목적지가 근처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라는 멘트가 연이어 나오는데…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결국엔 강병인 선생이 도로변으로 마중 나와서야 비로소 첫인사를 나눈다. 골목길 사이 좁은 막다른 길의 끝에 하얗고 단정한 모양새의 작업실이 보인다. 그는 글씨를 디자인한다. 글씨가 내포한 뜻을 모양으로 읽힐 수 있도록 때로는 힘 있게, 때로는 오로지 붓의 무게에 의지해 따라가며 가볍게, 글자를 써 내려간다. 주류 브랜드 ‘화요’, 드라마 ‘미생’, 영화 ‘의형제’ 등이 그의 글씨라고 설명을 덧붙이면 대부분은 고개를 끄덕인다.
작업실 1층 커다란 통유리창 앞에서 글씨 쓸 채비를 하고 조셉 리저우드 셰프와 마주 앉는다. “당신은 서울이 어떤 도시라고 생각하나요? 저는 서울을 생각하면, 높이 솟은 산과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물 그리고 이 공간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먼저 떠올라요. 서울은 제게 그런 의미인 거죠. 그래서 서울이라는 글자에 그 해석을 담아서 오늘 써보고 싶었어요.” 그런 다음 산을 닮은 ‘ㅅ’과 사람을 닮은 모음, 받침에서 강처럼 흐르는 ‘ㄹ’을 써 ‘서울’이라는 단어를 완성한다.
NAVIGATOR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7길 16-6 / 02-325-5567 / www.soolto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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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E A DRIVE
옛것과 새것의 공존,
경복궁 미술관 거리-부암동
주변의 속도에 맞춰 느긋하게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이 길을 지날 때에는 아무리 차가 막혀도 지루할 새가 없다. 계절에 따라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가로수 풍경과 수많은 여행자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으니 말이다. 멈춰 있어도 주변 풍경은 계속해서 변화한다. 생각해보면, 이 길에는 오래된 옛것과 가장 트렌디한 새것이 공존한다. 최근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블루보틀 2호점이 삼청동길 초입에 문을 열었고, 어느 시간에 가더라도 주문하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건너편 길에는 도로를 따라 이어진 돌담 너머로 경복궁이 오래전부터 이 지역을 지키고 있다. 경복궁길을 따라 미술관 여럿을 지난다. 삼청동길과 효자동으로 향하는 두 갈래 길이 나오면 좌회전 깜빡이를 켠다. 길이 난 대로, 자연스럽게 흐름에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부암동이다. 청와대 뒤편에 위치한, 경복궁을 중심으로 서북쪽에 자리한 동네. 이곳엔 분명 부암동만의 정서가 있다.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는 이들이 그래서 이 동네로 모여 든
것이 아닌가 싶다. 오래전,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아호를 붙여 ‘석파랑’이라는 아름다운 별장을 이곳에 지었고, 1920년대의 소설가 현진건은 이곳에 살면서 작품을 완성해나갔다. 그리고 요즘에도 예술가들이 부암동으로 이사를 갔다는 이야기가 간간이 들려오고 있다. 비탈길에 곡예를 하듯 차를 세우고, 동네를 한바퀴 산책하다가 클럽 에스프레소에 잠깐 들른다. 진하게 내린 커피를 한잔 들고 다음 목적지로 향할 준비를 한다.
NAVIGATOR. 서울 종로구 소격동
STOP 3. 서울의 풍미, 남산길과 길상사 그리고 파인다이닝
다시 도로 위, 경복궁 미술관길의 양 갈래 길 중 가지 않은 길을 달려볼 심산이다. 지금은 철 지난 유행처럼 여겨지는 삼청동을 통과한다. 그런데 사실 유행이 조금 지나버린 지금이 오히려 더 좋다고 말하는 이도 많다. 화려한 것이 조금씩 걷히고 난 뒤, 숨겨져 있던 뽀얀 맨살을 드러내는 느낌이니까. 삼청터널을 지나고 나면, 갑자기 화면이라도 전환된 듯 전혀 다른 동네 풍경이 나타난다.
여기부터는 성북동이다. 시간의 흔적이 곱게 레이어된 아름다운 사찰 길상사를 찾기 위해서 이 동네에 왔다. 길상사에는 100년 가까운 시간에 걸쳐 시인 백석과 그의 연인 김영한의 이야기가, 그리고 법정 스님의 흔적이 쌓여왔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당대의 모던보이로 살던 시인 백석이 사랑한 기녀 김영한. 그녀와의 사랑은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그는 그녀를 위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를 남겼다. 그녀는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운영했고, 엄청난 부를 이루었다고. 그 모든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루지 못한 사랑의 빈자리를 채울 수는 없었을 것. 나중에 그녀는 법정 스님의 책 <무소유>를 읽고는 깊이 공감해 대원각을 시주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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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다이닝의 정석,
강민구 셰프의 밍글스
멸치육수와 함께 내주는 바닐라 라비올리. 이 짧은 문장을 읽는 순간 수많은 맛을 상상하게끔 하는 게 밍글스 강민구 셰프다. “사실 모던 한식에서 멸치육수를 빼고 말할 수 없어요. 밍글스에서 선보이는 메뉴의 절반 이상은 이 육수를 베이스로 하죠.” 몇 해 전, 그가 선보였던 바닐라 라비올리는 중국의 샤오룽바오에서 영감을 얻었고, 한국식 만두피에 게살과 크림, 레몬그라스, 바닐라빈 등을 곁들였다. 이렇듯 그는 다양한 것을 섞어 새로운 것을 만들기 좋아한다. 때때로 예상을 벗어난 맛과 모양으로 한식을 선보이기도 하고, 한국적 맛을 극대화하고 싶을 때에는 간장, 된장, 고추장 등을 넣어 요리한다. 그리고 새로운 맛과 풍미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그가 관심 가진 것은 바로 ‘발효’였다. 하나의 원재료에서 출발할지라도 발효과정을 통해 고급스럽고 새로운 맛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NAVIGATOR.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67길 19 / 미쉐린 2스타 / 12:00~22:30 (BREAK TIME 15:00~18:00), 월요일 휴무 / www.restaurant-mingl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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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의 세계,
박무현 셰프의 무오키
남아프리카공화국 방언으로 ‘참나무’를 뜻하는 ‘무오키’. 이름은 박무현 셰프의 우직하고 단단한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프렌치 요리를 선보인다. 다만, 전 세계 대륙을 옮겨 다니며, 문화와 요리를 경험한 것이 그의 요리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요리를 시작한 지 15년이 됐고, 그중 10년을 해외에서 활동했고, 그중 5년을 남아공에서 일했다. 한국에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국내 식재료를 공부하기 위해 두 달여 동안 여행한 것이다. 그 결과 클래식한 프렌치 레시피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만의 창의적인 플레이팅을 하게 됐다. 그의 요리는 긴 여정을 구성하고 있는 과정인 셈이다. “저는 식재료의 다양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싶었어요. 맛의 레이어를 만들어 완성된 요리를 입에 넣는 순간 복합적인 맛의 세계로 이끄는 거죠. 물론 먹었을 때 단번에 맛있다고 느끼는 것이 중요해요.” 그렇게 만든 시그너처 메뉴는 무오키 에그. 닭가슴살에 달걀 흰자를 넣어 무스 상태로 만들고 그것을 달걀 껍질 안에 넣고 조리된 푸아그라와 함께 쪄내는 것. 그런 다음 양파, 닭간 등을 볶아 깔아준 뒤 트러플 크림 소스를 부어 완성한다.
NAVIGATOR.
서울 강남구 학동로55길 12-12 / 미쉐린 1스타 / 010-2948-4171 / 12:00~22:00 (BREAK TIME 15:00~18:00), 일요일 휴무 / www.muoki.kr
STOP 4. 본질에서 비롯된 상상력, 잠수교와 노량진수산시장
잠시 서울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이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한강이 그리웠다고. 긴 여행 끝에 만나는 한강은 많은 이야기를 전하는 것만 같다. 여행은 고되지 않았는지 묻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돌아왔다고 반기는 것 같기도 하다.
이른 새벽, 도시는 깊게 잠들었다. 교각 위의 불빛도, 절대 꺼지지 않을 것 같았던 빌딩 숲의 조명도 드문드문 꺼진 곳이 많다. 하지만 새벽 4시, 리저우드는 한강 다리를 지나 가장 활기차게 깨어 있는 노량진수산시장으로 향하고 있다. 잘 정돈된 수족관 사이를 지나, 흥건하게 젖어 있는 바닥을 수레가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경매장 쪽으로 들어선다. 한창 경매가 이루어지는 시각, 상인들은 그들만의 언어와 손짓으로 바삐 소통하고 있다. 산소를 공급하는 물통 안에는 펄떡거리는 방어가 눈에 띄고, 스티로폼 상자 안에는 굴이 뽀오얀 속살을 드러내고 있으며, 가리비는 반짝거리는 껍질을 앙 다물고 신선함을 뽐내고 있다. 더불어 날것의 신선함이 셰프의 영감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NAVIGATOR. 노량진수산시장 서울 동작구 노들로 674 / 02-2254-8000
STOP 5. 서울 여행의 에필로그, 그의 레스토랑 에빗에서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여행지의 다양한 문화와 식재료를 재해석해 하나의 플레이트 안에 담아온 조셉 리저우드 셰프. 그가 서울에 정착해 레스토랑 에빗을 오픈하고, 한국의 식재료와 조리법을 탐구한 지 벌써 1년이 넘었다. 이번에는 다양한 영감을 수집하고자, 제네시스 G90를 타고 서울 로드 트립을 이어왔다. 달리고 멈추기를 반복하면서, 서울은 전에 없던 매력적인 얼굴을 비로소 그에게 보여주었다. “서울은 정말 드라마틱해요. 단순히 커다란 도시가 아니라, 인생의 다른 측면을 깊이 파고들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자극하죠.” 마침내 여정이 마무리됐고, 수집한 여행의 영감을 바탕으로 그는 얼음 그릇 위에 그림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준비한 것은 움푹 파인 형태에 얼음 결정이 살아 있도록 만든 그릇이다. 그리고 재료 그릇에 소복하게 담긴 검은 가루는 조개의 검은 부위를 따로 분리해 말리고 빻아서 만든 것이다. 식재료의 어떤 부분도 허투루 내버리는 일이 없다는 것. 검은 가루에 조금씩 물을 부어가며 개어 적당한 농도로 만든다. 그는 강병인 선생의 작업실에서 본 먹물과 글씨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다고 말한다. 마치 먹물과 같이 완성된 재료를 붓에 고루 묻힌 다음, 얼음 그릇 안쪽에 섬세하게 터치하기 시작했다. 글씨를 쓰듯 정성 들여 채운다. 그런 다음 소스를 진주처럼 알알이 바닥에 짜고는 얇게 슬라이스한 가리비 관자와 말린 장미꽃잎, 절인 장미꽃잎, 그리고 와송꽃을 켜켜이 쌓아 올린다. 어느덧 완성된 요리의 리드미컬한 획이 서울 속 한강을 닮았다.
NAVIGATOR. 서울 강남구 도곡로23길 33 / 미쉐린 1스타 / 070-4231-1022 / 화~금요일 18:00~23:00, 토요일 12:00~23:00 (BREAK TIME 15:00~18:00) / www.restaurantevet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