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을 사랑한 예술가와 문인들이 터를 잡으며 특유한 삶의 방식이 형성된 서촌.
여행자들은 이곳에서 일상 속 짧은 여정을 통해 문화적・예술적 장소들을 발견하고
예술가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수집하며 삶의 극적 환기를 경험하게 된다.”
INTO THE FOREST
산속 깊이
3년 전 가을, 옥인동의 다정한 골목길을 거닐다 들렀던 강병인 캘리그래피 연구소. 그곳에서 작가가 힘 있게 써 내려간 ‘인왕산’이라는 글씨와 조우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의 인왕산은 호랑이의 강인한 기개를 닮았었다. 그보다 훨씬 이전 조선 영조 시대, 서촌에 기거했던 겸재 정선은 인왕산의 장대함에 영감을 받아 76세의 나이에 <인왕제색도>라는 예술적 여정을 완성했다. 이처럼 강렬한 영감의 발원지가 된 인왕산은 깊은 녹색의 향연 너머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채비를 하는 중이다.
인왕산 자락길에 위치한 인왕산 초소책방에서 한숨을 돌린 뒤 460여 개의 길고 가파른 계단 앞에 선다. 인왕산 숲속 쉼터로 가기 위함이다. ‘쉼을 위한 고행’이 시작되는 것. 물론 돌아가는 길도 있지만 산길을 오르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이라면 질러가는 이 방법을 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드디어 마지막 계단, 아찔한 계곡과 맞닿은 필로티 구조 위로 들어선 유리 건축물을 발견한다. 이곳은 과거 김신조 사건 이후 일반인들의 인왕산 출입이 통제되면서 세워졌던 군 초소 중 하나였다. 이후 산의 출입이 전면 개방되는 시점과 맞물려 관련 시설이 철거되었고, ‘인왕3분초’는 역사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측면에서 공간을 재구성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숲을 담은 창을 향해 느긋한 각도의 의자와 기다란 책상이 일렬로 놓여 있다. 이 자리에선 숲속 한가운데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렇게 자연과 하나되어 예술적 여정을 위한 탐구를 시작해볼 수 있다.
인왕산 숲속 쉼터
서울 종로구 청운동 산4-36
ASPIRATION
삶의 양식
삶과 예술이 공존하는 서촌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살며 작업하며 소통하기를 기꺼이 즐겼다. 80년 전, 서정주, 김동리 선생 등이 머물며 <시인부락>이라는 문학동인지를 만들던 보안여관은 오늘날 재생건축 공간으로 탈바꿈하여 젊은 예술가들의 아지트 같은 장소가 되었다. 몇 개의 갤러리를 지나고 주택가 골목을 따라 이동하다 야트막한 경사면에 위치한 박노수미술관 앞에 섰다. 높다란 담 사이 하얀 철문을 통과해 마치 비밀의 화원 같은 그의 공간 속으로 들어선다. 이 저택은 1937년경 절충식 기법으로 지어진 가옥으로, 1973년 박노수 화백이 소유한 뒤 거주하며 작업을 했던 곳이다. 이후 사회 환원의 뜻을 품고 기증 협약을 맺어 2013년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이 개관하기에 이른다.
현재 미술관에서는 개관 8주년 기념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1층 거실 공간에 전시된 작품 <산(山)>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끈다. 거대한 쪽빛 산과 화면 밖을 관망하는 소년, 이를 포용하는 여백이 무척 아름답다. 자신만의 시각으로 사물과 자연을 재해석했던 박노수 화백의 독보적인 화풍이 어렴풋이 엿보인다. 그다음 나무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면 재현해놓은 작가의 작업 공간이 나타나고, 사진가 조선희가 아이의 시선으로 계절마다 가옥 곳곳을 포착한 작품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세월의 간극이 빚어낸 경계는 오히려 세련된 감성으로 다가왔다. 집 안 곳곳은 예술가가 수집한 물건들이 자리했고, 세월에 다듬어진 예술가의 열망은 작품처럼 공기 중에 부유하고 있었다.
박노수미술관
서울 종로구 옥인1길 34
AWAKEN YOUR SENSES
취향의 축적
집은 주인의 취향과 삶의 방식을 여실히 보여주는 공간이다. 상인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진 홍건익은 1934년 필운동 토지를 매입하고 2년에 걸쳐 건물을 지었다. 대문채, 행랑채, 사랑채, 안채, 별채와 후원으로 이루어진 가옥은 사랑채 중문으로 안채, 바깥채가 나뉘고, 일각문을 통해 후원으로 이동하게끔 이끈다. 특이한 점은 후원의 지대가 높아 그 단차를 이용해 빙고(氷庫)를 만들었다는 것. 본래 자연 지형을 살려 집의 형태를 완성한 이 근대 한옥은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서울시 민속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주)리마크프레스에서 위탁 운영하며 주민을 위한 프로그램과 아카이브 전시 등을 꾸준히 기획했다. 덕분에 주민들과 교류하는 유기적인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오가며 자연스레 들러 대청에 앉아보고, 때마침 진행하는 문화 프로그램을 체험해본다.
화가의 감수성과 오래된 가옥의 삶을 체득한 뒤 그 여운을 즐겨보고자 근처 무목적빌딩으로 향한다. 빌딩은 동네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채 건물 안에서 물 흐르듯 공간이 배치되어 있다. 4층에 위치한 대충유원지를 가기 위해서는 미로 같은 복잡한 구조를 지나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리듬이 생기는 느낌. 커다란 커피머신은 뷰를 해칠 수 있어 과감히 생략하고, 매주 2가지 원두를 골라 드립 커피로 선보인다. 야외 베란다에 앉아 인왕산을 감상하며 삶에 있어 어떤 것을 취하고, 어떤 것을 놓을 것인지 그 기준에 대해 생각해본다.
인왕산 대충유원지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 46 4층
홍건익가옥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1길 14-4
ART IN LIFE
아름다움에 관하여
“아카시아 코베니Acacia covenyi를 참 좋아합니다. 세상이 온통 무채색인 2월에 노란 꽃을 피워 오가는 이들의 마음에 빛을 밝혀주니 참 기특하지 않나요. 제게는 아름다운 감식안을 갖도록 했고, 기다림 끝에 행복을 마주할 수 있게 했죠.”(노가든 노은아 대표)
식물 가게 노가든이 서촌에 문을 연 것은 8년 전이다. 꽃시장에서 사온 유칼립투스를 다듬다가 문득 화분에 심어 오래 키워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 시작이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여러 우연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바깥에서 가을 햇살을 받던 아카시아 코베니는 지금의 수형이 완성되기까지 3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우연처럼 예뻐 보이고 마음이 가는 식물의 원산지가 호주인 경우가 많아 노가든엔 호주산 식물이 꽤 많은 편이다. 낯선 환경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더 많은 햇빛, 더 많은 바람 등으로 보살핀다. 그녀의 바람은 식물이 누구나의 일상에 윤슬처럼 잠깐의 반짝임을 선사해주는 것. 계절이 바뀌는 시기, 자연의 시간을 배운 여행자는 노가든에서 공들여 피워낸 아름다움의 가치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덕분에 기존 나무의 결을 해치지 않고 낡은 한옥을 다듬어 완성한 진서재에서의 머뭄이 좀 더 특별해졌다. ‘볕이 깃드는 공간’이라는 뜻을 지닌 진서재는 기와 틈 사이로, 침대에 누워 바라보는 천장의 지붕 틈으로 하늘이 고스란히 보인다. 통인시장과 가까운 골목 어귀에 위치해 어쩐지 하루 사이에 동네 주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노가든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9길 6
진서재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 6길 1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