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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SIS ROAD TRIP @ASAN-DANG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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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호

아직 여름이 채 막을 다 내리지 못한, 가을의 초입이었다. 아산에서 당진으로 이어지는 로드트립은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라는 속내를 알 듯 말 듯한 명제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책 제목이기도 했던 이 문장은 영화가 끝난 뒤 극장을 나서면서 관객이 각자의 해석을 통해 이야기를 완성해내는 여정을 의미한다. 이 같은 맥락에서 여행 역시 비로소 일상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떠오르는 감흥과 말들로 재구성되기 마련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니 촘촘하게 계획을 세우는 대신 장소와 사람, 그곳에 쌓인 시간이 전달하는 말들에 귀를 기울여보겠다 생각하며 여행길에 오른다. 살아온 흔적이 여행지의 장소와 만나 어떤 삶의 챕터를 구성하게 될지 자못 궁금하고 기대가 된다.

GV70를 타고 석모방조제를 따라 달리다가 바다를 향해 길이 나 있는 마섬항에 멈춰 섰다. 차는 외부와 공존의 범위를 넓히며, 조화 속에서 순간의 가능성을 확장한다.

시간이 퇴적한 흔적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그에게 변곡점이 되었던 여행으로 이탈리아의 작은 섬을 떠올렸다. 섬 전체에 자동차는 한 대뿐이었고, 인구는 200여 명에 불과했으며, 운항하는 비행기 편수도 제한적이라 기상 상황에 따라 항공편이 취소되면 꼼짝없이 더 체류해야 하는 곳. 불행인지 다행인지 어쩌다 보니 예상했던 일정보다 며칠 더 그 섬에 머무르게 되면서, 잠시 그곳에 스며들었던 경험을 들려준다. 술을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저녁마다 마을에 하나뿐인 술집에 가고, 떠날 기약 없는 이방인처럼 머무르던 날이었다고 회상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섬의 주민들 대부분이 여행을 왔다가 눌러앉았다고 했다. 그러고는 그가 말했다. “인생은 예측
불가하다는 걸, 그 여행에서 깨달았던 것 같군요.” 그 섬의 이름은 카스텔로리조, 이번 로드트립의 첫 번째 목적지인 외암민속마을로 들어서며 타인의 삶으로 깊숙하게 들어갔던 여행의 순간을 떠올리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외암민속마을로 들어서는 길.

아산시 송악면 설화산 아래 자리 잡은 외암민속마을엔 500여 년 전 이 마을에 정착한 예안 이씨 일가가 여전히 살고 있다. 느티나무를 지나 차곡차곡 쌓아 올린 돌담을 곁에 두고 걷다 보면 대문 너머 일상 풍경이 얼핏 보인다. 담벼락에는 때에 맞게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었고, 감나무에 매달린 감은 아직 초록색이다.
골목골목 이정표를 따라 건재고택 쪽으로 향한다. 조선 숙종 때 성리학자이자 문신인 외암 이간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졌는데, 현재의 집은 그의 후손인 건재 이상익이 고종 6년에 지었다고 한다. 활짝 열린 대문 틈으로 아름다운 정원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찰나. 이 집의 주인이 남긴 과거의 자취와 지금 이곳을 여행하는 이의 방랑이 저 너머 모습을 드러낸 사랑채에서 조우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리고 마침 동선애 문화해설사가 나오며 반갑게 맞아준다. “어서 와요, 기다렸어요.” 문간채, 사랑채, 안채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동선을 이루는 고택을 여행하며, 집이 전하는 이야기에 잠시 귀 기울여보고자 한다.

마을 입구의 반석교를 지나 구릉지의 길을 따라 초가집들이 늘어선 모습.

외암마을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고택으로 들어서니 제일 먼저 고운 자태의 사랑채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기둥마다 빼곡하게 쓰인 주련柱聯이라는 글자에 시선이 멈춘다. “사실 사랑채는 조선시대 남성들의 공간이었어요. 공부하다가 머리를 식힐 겸 이곳을 거닐고, 바깥 풍경을 보다가 또 여기 적힌 글귀를 읊조리기도 하죠. 보통은 마음에 새겨야 할 글귀, 삶의 귀감이 되는 혹은 다짐을 위한 글들을 적어요.” 다시 말해 집주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새겨 놓은 셈이다.
글뿐이랴, 용트림하듯 멋진 형태를 지닌 사철나무도, 두꺼비를 닮은 돌도, 조금 멀리 거북이 모양의 바위도,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이 자리에 놓였다. 사소한 디딤돌 하나, 힘 있는 필체로 쓴 글귀 하나가 바로 지금 여기 놓이기까지의 모든 서사가 모여 하나의 세계를 완성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마음으로, 원하는 마음으로, 비어 있는 공간을 채워나가는 동안 누군가의 세계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위부터)
GV70를 타고 건재고택 앞에 다다르다.
문화해설사에게 듣는 고택 이야기.
여행자의 프레임 속에 담기는 장면들.

“모든 여행은 사실 공간을 다니는 건데, 결국은 공간을 다니는 여행은 시간을 다니는 여행이 돼요. 모든 공간은 역사성, 다시 말해 시간이 퇴적한 흔적을 볼 수 있기에 당연히 시간 여행이 될 수 있죠. 그런 측면에서도 ‘여행은 뒤로 걷는 일일 것이다’라는 문장을 설명할 수 있을 거예요.”

사랑채에서 보내는 오후.

들여다보기
전국 8곳의 민속마을은 저마다 각기 다른 특징을 지니는데, 이곳 외암민속마을은 인공수로를 그 특징으로 꼽는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이 마을 뒷산이 화기를 머금어 집에 불이 나기 쉽다고 하여 이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불과 상극인 물을 집집마다 끌어들이게 되었다. 수로가 마치 혈관처럼 집과 집 사이를 이어주고 있으며, 건재고택의 수로 또한 정원을 통해 그 다음 집으로 연결된다.
NAVIGATOR. 외암민속마을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민속길 5

(왼쪽부터)
모두의 집에는 무엇 하나 허투루 둔 것이 없다.
풍경이 소리를 내면, 문득 바람이 보이는 것 같다.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여행에 영감을 주는 ‘역사’라는 소재를 좋아하는데, 역사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점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그가 가진 호기심의 근원이 역사를 기반하는 경우가 상당하다. 민속박물관으로 가는 길, 그는 조금 속도를 늦춘 채로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아름다운 것들을 살펴본다.

 


 

구상 속 추상을 발견하다

“박물관 정원에 백일홍이 피기 시작했는데, 마침 맞게 잘 오셨어요.” 구름이 낮게 깔린 오전 구정아트센터로 향하는 길, 마중 나온 허효주 학예사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니 탐스러운 붉은 꽃이 곳곳에서 툭툭 꽃망울을 터뜨리는 중이었다. 이곳의 첫인상은 작정하고 꾸미지 않았으나, 그 상태로 아름답다는 것. 단정하게 난 길을 따라 이타미 준이 설계한 그의 첫 번째 한국 건축물 구정아트센터에 이른다. 충청도 전통 가옥에서 영감을 받아 지었다고 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ㅁ’ 자형 가옥 구조에서 비롯된 형태도, 이 건물 특징 중 하나인 기다랗게 낸 창도 그러하다. 긴 창으로 쏟아지는 자연광이 구석구석 스며들어 건물 내부를 부드럽게 밝힌 모습이 인상적이다. 올려다본 천장의 독특한 골조, 그 위에는 충무공의 땅이라는 상징성을 표현한 거북선 모양의 지붕이 얹혀 있다. “그리고 이 건물을 지을 당시 모든 벽돌을 직접 구워서 만들었어요. 아산의 돌과 흙을 사용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죠.” 학예사의 설명이다. 그렇게 완성한 공간에서는 나선형 계단과 아치형 통로와 직사각형 모양의 빛의 변주가 어우러지며 때때로 선보이는 전시가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왼쪽부터)
정원 한편에 자리한 문인석의 표정.

 

“자연이든 문화의 어떤 부분이든 당연히 구상일 테지만, 그 안에서 발견하는 추상의 느낌을 좋아합니다. 여행에서 사진을 찍을 때 정말 중요한 것은 시선이고, 앵글이고, 트리밍이라고 생각해요. 결국은 그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고 싶어 하는 거니까요.”

중첩된 아치형 통로 너머 이동진 영화평론가만의 시각으로 공간의 추상을 발견한다.

수집 행위는 좋아하는 마음을 바탕에 둔다. 그것의 목적이 무엇이든 말이다. 박물관의 설립자인 구정 김원대 선생은 어린이 출판사 ‘계몽사’를 만든 이이다. 어린이와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그의 평소 철학을 구현할 다음 단계로 선택한 것이 바로 민속박물관이었다. 생활과 밀접한 유물을 수집하고 기록하는 일을 통해 지금을 사는 우리의 정체성이 좀 더 견고해질 것이라 믿었을 터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이곳에 자리한 모든 것에는 사용한 이의 흔적과 역사가 담겨 있다. “아이들에게 생명력 있는 전승 문화를 보여주고자 했던 김원대 선생의 수집 철학은 공간을 구성하는 유물 어느 하나 허투루 대하지 않게 했어요. 오래된 농기구, 짚으로 엮은 개집, 심지어 똥바가지 하나도 모두 값을 치르고 가져왔죠.” (허효주 학예사)
덕분에 구정아트센터에서 박물관 본관으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봐야 할 것들이 잔뜩이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
다양한 공예품.
곡식 저장고 역할을 한 나락뒤주를 비롯해 기능별 농기구들을 전시한 모습.
건물 입구 외벽에 백성 민民 자가 대칭을 이룬 모습.
제3전시실의 탈은 역할극마다 모든 탈을 수집하기 어려워 이두현 선생이 고증을 거쳐 제작했다.

그중 문인석 수십 기가 모여 있는 곳을 거니는데,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눈에 문인석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문인석을 과거에도 본 적이 있는데, 이렇게 무리 지어 둔 것을 보기는 또 오랜만이네요. 예전에 딱 한 번 사진전을 열었던 적이 있어요. 제목은 〈뒷모습 어쩐지〉였습니다.” 그의 시선을 따라 문인석의 뒤로 뒷걸음질을 친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속도가 느려졌고, 시선이 달라졌으며, 방금 전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를 찾는다. 그리고 마침내 본관 앞에 다다른다. 김석철 건축가는 이곳 본관을 설계할 때 자연에서 찾은 비례와 균형으로 한국인의 정신을 담아내고자 했다. 건물 내외부가 유기적으로 결합할 수 있도록 하고, 정문에서 길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기다 보면, 서서히 박물관 본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처마와 누마루는 한국 전통 건축에서, 벽돌을 쌓는 방식은 무령왕릉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한국인의 삶을 다룬 첫 번째 전시실. “아아, 출생의 순간부터 순서대로 이어지는 거군요. 태어나서 결혼하고, 이렇게 가다 보면 맨 마지막은 장례겠군요.”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예상대로다. 뒤이어 농업과 어업, 대장간의 모습 등 일터를 다루고 있는 제2전시실과 공예부터 문화 전반을 다루는 제3전시실에 이르기까지의 시간 여행이 이어진다. 그리고 깨닫는다. 이 공간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유물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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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개관한 지 46년째인 온양민속박물관. 본관의 복도 한편에서는 그간에 진행되었던 전시를 아카이빙하듯 포스터를 붙여 두었는데, 첫 번째 전시 포스터 속 귀주머니부터 삶의 지혜를 담는 부엌 이야기, 삶의 품격을 담은 의복 이야기, 그리고 올봄의 〈박물관 안 수선집〉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주제로 민속 유물을 다루어 왔음을 짐작케 한다.
NAVIGATOR. 온양민속박물관
충남 아산시 충무로 123

온양민속박물관 본관은 붉은 벽돌과 전통 문양에서 영감받은 패턴이 조화를 이룬다.

 


“ 바다는 실제로 세상 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바다와 육지가 면한 지점에 와 있으면 세상 끝에 있는 느낌이 들어요. 지금 이곳처럼요. 날이 흐려 일몰이 안 예쁠 것 같아 조금 실망했는데, 막상 이 시간이 되니 흐린 날씨 덕분에 하늘빛, 물빛, 땅 빛이 온통 회색이어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네요.”

GV70의 세레스블루 색상이 모노톤의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우연한 장면들, 어디에도 없는

이동진 영화평론가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과연 당신은 어떤 여행자인가 하고.
“에멘탈 치즈처럼 앞날을 계획하라는, 스위스 속담을 종종 떠올릴 때가 있어요. 구멍이 숭숭 뚫린 치즈처럼 성성하게 여행을 계획하는 편이에요.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계획을 바꾸기 좋죠. 그러다 보면 우연히 만나는 장면에 대한 기대감이 생깁니다. 영화도 마찬가지인데요. 비 오는 장면을 찍어야 한다면 살수차를 동원하거나 비 예보를 기다리기도 하죠. 비가 안 온다면 철수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어떤 감독들은 비 오는 장면을 찍기로 한 날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안 오는 대로 찍기도 해요. 그렇게 우연이 만들어낸 또 다른 일기 조건 속에서 그 상황을 살려내는 거예요. 만약에 서해안의 아름다운 낙조를 볼 생각으로 온 게 오늘이었다면 실패한 여행이 됐겠죠. 그런데 저처럼 아무 생각 없이 오면요, 그것도 괜찮아요. 여기 마섬항에서 이렇게 여정의 끝, 세상의 끝이라는 이상한 감정에 젖을 수 있으니까요.”

(왼쪽부터) 마섬항 바다의 포말.
이 계절에는 학꽁치와 전어를 잡으려는 낚시꾼들이 모여든다.

 

여행의 루틴

하루의 여행을 마치고 한밤중에 도착한 알마게스트. 불 켜진 밤의 숙소는 마치 거대한 우주 속 작은 행성처럼 하나의 점으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이곳의 이름을 지을 때 프톨레마이오스가 집필한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최고의 천문학서, 위대한 책이라는 뜻을 지닌 〈알마게스트〉에서 영감을 받았다더니, 왠지 알 것 같은 기분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오랜 기간 무언가를 수집하며 그 안에 담긴 시간과 이야기를 탐닉해왔는데, 2만 권의 책과 1만 장이 넘는 음반, 5000장의 DVD와 수집품이 빼곡하게 들어찬 작업실 파이아키아를 완성하는 동안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관하여 끊임없이 생각했노라 말한다. 그렇게 작업실을 완성한 이후, 누군가의 취향이 반영된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이 좀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고. 창 너머 호숫가에 동이 터오고 그렇게 여행의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다. 조용한 공간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소리, 찻물 끓는 소리가 겹겹이 쌓인다. 그는 여행을 떠날 때면 늘 장소를 생각하며 고른 CD 몇 장과 장소와 상관없는 책을 두세 권 챙긴다. “알고리즘 때문에 본인의 취향이 얼마나 갇히게 되는지 분석한 〈필터월드〉를 가져왔고, 오전엔 김유림 시인이 쓴 에세이집 〈단어 극장〉이라는 책을 읽었어요. 제가 여행지에서 책을 읽거나 어떤 음악을 듣는 이유는 그 두 가지 행위가 공간적, 시간적 맥락을 함께 소환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책의 내용과 이곳의 느낌이 밀착된 공감각적인 경험을 좋아해요.”

정오에 가까워지는 시간, 슬슬 다시 시동을 걸어야 할 때가 되었다.

“예전에 어느 소설가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누군가와 사랑을 할 때 그 사람이 나를 잊지 못하게 만드는 방법 중 하나는 음악을 선물하는 것이라고요. 음악은 상황과 긴밀하게 엮여서 어떤 장면과 하나로 묶이기도 하죠.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면서 자연스레 떠오르는 순간이 있는 것처럼요. 제가 여행을 올 때마다 몇 개의 CD를 챙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문학을 하는 사람은 결국 언어의 가능성 혹은 언어의 불가능성을 가지고 치열하게 싸움을 하는 사람들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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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게스트의 로비 공간인 관리동에서 이곳을 설계하고 운영 중인 김진령 대표를 만난다. 집을 짓는 과정이 담겨 있는 책과 저마다의 이야기를 지닌 소품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고, 창 너머 멋진 수형의 오래된 향나무 두 그루와 그 아래 반듯한 직사각형의 스테이 공간이 내려다보인다. 여행자가 머무는 숙소는 아늑한 침실과 주방 등으로 구성된 본채와 호수를 오롯이 감상하며 티타임을 하기 좋은 별채로 이루어져 있다.
NAVIGATOR. 알마게스트
충남 아산시 송악면 송악저수지길 273


(왼쪽부터) 책방의 이름은 1991년 출간한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책 〈오래된 미래〉에서 차용한 것.
애서가인 이 평론가는 책방 구석구석을 누비며 마음에 드는 책 몇 권을 골랐다.

공간의 역사엔 삶이 녹아 있다

숙소에서 출발해 30분쯤 달려 삽교천을 통과한다.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모든 풍경이 슬라이드 필름을 감아내듯이 한 장면씩 점멸한다. “로드트립을 하는 길이 굉장히 아름다웠는데, 그 길을 빠르게도, 느리게도 달리면서 달라지는 속도를 느끼는 게 흥미로웠어요.” 여행을 회상하며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떠올린 장면 중에는 이날의 반짝이던 윤슬도 포함되어 있을 터. 그렇게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듯 보이는 당진의 면천읍으로 서서히 들어간다. 마을을 둘러싼 면천읍성을 지나 1100년 넘게 마을을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를 스친다. 진짜 옛날식 별다방과 당진 서리태를 새벽부터 삶아 만든 콩국수 가게도 그 길에 있다. 그리고 마침내 낡은 자전거포를 서점으로 탈바꿈한 ‘오래된 미래’ 앞이다. 1층 서가에는 판매하는 책들이 이곳만의 규칙에 따라 잘 진열되어 있고, 때때로 표지가 보이게끔 둔 책에는 인상 깊었던 문장과 주인장의 정성스러운 감상평도 함께 적혀 있다. “김애란 작가의 책 표지를 이렇게 보이도록 둔 것은 좋아하는 작가님이기도 하지만, 그림 때문이기도 해요. 그림 작가님이 당진 출신이기도 하고, 책방의 단골이기도 해요. 여러 이유로 좀 더 많은 이들이 한지민 작가님의 그림을 봐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진, 면천에 관한 책도 이렇게 있죠. 심훈 선생이 당진에서 〈상록수〉를 집필하셨고, 김대건 신부에 관한 책이 있고요.” (주인장 지은숙) 그곳에서 책을 산 뒤에는 좁은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본다. 이동진 평론가는 이곳을 두고 잠시 파리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를 떠올렸는데, 그곳에 마련된 작은 방 때문이었다. 지방의 작가들이 파리에 방문했을 때 잠시 머무르다 갈 수 있도록 했던 다락방이, 여행자들이 잠시 쉬어가며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한 이 방과 닮았다.

(왼쪽부터) 당진의 옛이야기를 가장 많이 간직한 면천에는 수령이 1100년 넘은 은행나무도 있다.
세종 21년 축성되어 현재는 중요한 연구자료가 된 면천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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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오래된 미래의 2층엔 조용히 책을 읽기 좋은 작은 방과 100년 넘은 역사를 가진 면천초등학교 자리에 복원된 객사를 감상하기 좋은 시선의 창문도 있다. 지대가 높은 곳에 자리한 덕분에 동네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1층 서가 사이에서는 종종 작가들의 북토크가 열리는데, 로드트립 중이었던 날에는 박연진 작가의 북토크 준비에 여념이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모든 과정이 아날로그 방식으로 진행되어 독자를 모으는 일은 일찌감치 지난 4월부터 시작이 됐다.
NAVIGATOR. 오래된 미래
충남 당진시 면천면 동문1길 6

 


산책로를 따라 길 끝에 다다르면 성당과 순교미술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공간의 맥락

한낮의 뙤약볕 아래 잔디밭에서 수녀님 두 분이 한창 잡초를 뽑고 계신다. 그 너머로는 신리의 농부들이 보살피는 논에서 벼가 잘 여물어가고 있다. 각자의 일을 충실히 해내고 있는 사이에서 여행자의 일을 하기 위해 낯선 공간이 건네는 말들에 귀 기울여보기로 한다.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너른 잔디밭 위에 드문드문 마치 하나의 작은 집과 같은 5개의 경당. 이곳에 들러 조용히 기도를 하며 순교자의 삶에 관해 잠시 생각하다 유적지 가장 안쪽 성지 내 유일하게 십자가가 세워진 순교미술관으로 향한다. 일랑 이종상 화백이 꼬박 3년을 작업해 봉헌한 신리 다섯 성인의 영정화와 13점의 순교 기록화를 전시하고 있는 이곳엔 고통과 고요가 공존했다. 잠시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카페 공간인 치타 누오바로 들어선다. 탁탁탁탁, 커피가 내려지는 동안 커다란 통창 너머로 해가 조금씩 기울고 있다.
여행을 마치고 나오는 길, 신리성지의 전담 김동겸 베드로 신부와 우연히 마주친다. 담을 만들지 않고 지역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 경계 없이 공존하려던 그의 마음이 대화 중 얼핏 엿보인다. 동시에 처음 이곳에 들어섰을 때 마주했던 장면이 오버랩된다. 머지않아 벼가 조금 더 무르익기 시작하면 신리성지에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펼쳐질 거라며 다시 한번 들르라고 초대하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끝으로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고 있었다.

(위부터) 순교미술관의 작품 〈강경 포구를 통해 입국한 선교사들〉을 감상 중이다.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 공중에 설치된 고래 조형물.
마치 하나의 작은 집과 같은 5개의 경당이 잔디밭 곳곳에 고요하게 자리한다.

들여다보기
바닷길을 통해 외부와의 접촉이 용이해 조선 천주교회의 중요한 거점 지역으로 자리 잡게 된 삽교천 상류에 위치한 마을 신리. 이곳 신리성지는 천주교가 조선 구석구석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했던 신부와 신자들이 순교한 유적지로, 기록에 따르면 신리의 첫 순교자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손경서(안드레아)라고 전해진다. 성인들의 경당, 순교미술관 등 성스럽고도 아름다운 건축물이 신리성지 주변에 자리한다.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어쩐지 이곳을 아름답다고 표현하기 미안한 마음이 들었노라 말한다.
NAVIGATOR. 신리성지
충남 당진시 합덕읍 평야6로 135

GV70를 타고 모든 경계가 허물어진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했다.


EPILOGUE - 파이아키아, 여행은 두 번 시작된다
이곳 어딘가에 당진의 책방 오래된 미래에서 구입한 〈나의 비타, 나의 버지니아〉와 〈발터 벤자민 평전〉도 꽂혀 있을 것이다. 아산에서 구입한 마그넷은 여행지에서 사 모은 기념 마그넷이 빼곡하게 붙어 있는 공간 한편을 차지했다. 여행의 끝, 그의 작업실에도 사소한 변화가 생긴 것이다.

로드트립을 마치고 돌아와 파이아키아에서 그의 수집품들과 그가 사랑한 이야기들에 귀 기울여본다.

여행은 때로 나를 발견하는 여정인데요. 이번에 자신의 어떤 면모를 발견했으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나요?
이동진 음, 이번 여행에서 삶을 사는 속도에 관해 생각하게 됐어요. 조금 느리게 살아봐도 좋겠다는 마음을 먹었던 계기가 있었는데, 사실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도 이유가 됐겠죠.(웃음) 너무 빨리 가면 보지 못했을 것들을 아산, 당진에서는 조금 천천히 보게 되었어요.

그렇다면 로드트립의 묘미도 속도와 연관이 있을까요.
이동진 인간은 물리적으로 보면 속도를 느낄 수 없잖아요. 인간이 느끼는 건 언제나 가속도뿐이죠. 다시 말해 속도가 항상 똑같으면 속도가 바뀌는 걸 알아채지 못해요. 그런 이유로 여행에서도 가속도가 중요할 텐데, 개인적으로 아름다운 길을 운전하는 동안 속도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이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깊은 인상을 남겼어요.

우린 여행은 두 번 시작된다는 명제를 두고 로드트립을 시작했어요.
이동진 돌아오는 차에서 여행이 두 번 시작되었어요. 영화가 두 번 시작될 때 두 번째는 영화가 끝나고 극장 문을 나설 때라고 생각했어요. 여행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첫 번째 여행은 시간의 흐름대로 장소를 체험하는 것인데, 두 번째 여행은 같은 장면을 여러 번 반복해서 생각하기도 하고 그때 왜 그랬을까 혹은 그걸 더 이렇게 해볼 걸 선택적으로 생각하기도 하죠. 그렇게 생각을 중첩하면서 여행을 반복적으로 재구성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여행이 두 번 시작되는 지점이겠죠.

(왼쪽부터) 수많은 여행의 흔적들.
면천읍의 1100년 된 은행나무를 그려 넣은 마그넷.

“아마도 여행은 뒤로 걷는 일일 것이다. 그게 내 삶의 자취이든 세상의 뒤안길이든, 뒤로 걸을 때 익숙하고 빠르게 지나쳤던 것들이 새로운 의미로 재발견된다.”

막 가을이 시작되는 찰나였고
창밖의 풍경은 시시각각 변화했다.
진짜 나에게로 몰입하며, 여행 내내 내게로 향하는 질문을 던져본다.
과연 이번 여행의 끝에 나는 어떤 답을 구하게 될 것인가.
그리고 길 위에서 펼쳐진 여정 속에서 그리고 당신의 프레임 속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글. 임보연BO-YEON LIM
사진. 김현민HYUN-MI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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