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시대에서 유래된 이름을 가진 맨체스터는 산업혁명의 발상지로 인류 역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현재는 그 산업 유산을 재해석한 공간에서 재미있는 일을 잔뜩 벌이고 있다. 산업혁명을 넘어 음악과 축구의 도시, 동시에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거듭난 맨체스터의 유쾌한 반란.
MANCHESTER REVOLUTION
축구 종주국, 축구의 도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잉글랜드 최초의 트레블
우리에게 맨체스터라는 도시가 유독 익숙한 이유는 단언컨대 박지성 선수 덕분일 것이다. 1998-99년 시즌 잉글랜드 최초로 트레블을 달성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이하 유나이티드)는 프리미어리그 최다 우승 기록을 보유한 명문 구단이다. 유나이티드의 구장인 올드 트래퍼드 앞에 서면, 영국에서 런던의 웸블리 스타디움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축구 경기장의 위용을 실감할 수 있다. 본격적인 스타디움 투어에 앞서 박물관을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박물관 초입의 ‘전설과의 대담Interview the Legends’ 벽면에 박지성 선수가 공을 차는 사진이 눈에 띈다. 1906년부터 1921년까지 활약하며 유나이티드 역사상 최초의 전성기를 이끈 빌리 메레디스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데이비드 베컴이, 우측에는 박지성이 자리한다. 이것이 바로 박지성 선수의 위상이다.
투어 도중 라커룸에서는 아쉽게도 선수 이름과 등번호가 적힌 유니폼은 볼 수 없었다. 다가오는 시즌 스쿼드에 변화가 생겨 새로운 디자인의 홈킷만 걸어놓았다고 한다. 퍼거슨 감독과 인상이 비슷한 데다 껌까지 씹고 있는 가이드가 갑자기 어느 자리로 향하더니 “카세미루 선수가 유니폼을 입기 전에 이렇게 행동하죠” 하며 셔츠를 들고 킁킁 냄새 맡는 흉내를 내자 모두 웃음을 터뜨린다. 선수 입장 터널에 들어서자 엄청난 함성이 들려온다. 맨체스터 출신 밴드 스톤 로지스The Stone Roses의 ‘This is the One’이 울려 퍼지면서 유나이티드와 원정팀, 이렇게 두 줄을 만들어 선수처럼 입장해본다. 투어 참가자 중 자원한 사람들이 각 팀의 주장을 맡아 선봉장에 선다. 가이드는 어린이에게 먼저 기회를 주는데, 수줍은 아이들이 거절하며 대신 그 자리를 꿰찬 한 아저씨의 얼굴에 순수한 미소가 번진다. 100년 넘는 역사를 지닌 올드 트래퍼드에서 옛 모습을 간직한 구역은 남쪽의 보비 찰튼 경 스탠드뿐이다. 더그아웃이 있는 이곳에서 나도 퍼거슨 감독이 앉았었고, 이제는 에릭 텐하흐 감독이 고군분투하는 그 자리에 앉아 피치를 바라본다.
내가 투어를 마치고 만난 이는 3대째 유나이티드의 열혈 팬인 시아란 스미스Ciaran Smith. 마케팅 맨체스터의 커뮤니케이션 담당이기도 한 그가 들려준 유나이티드의 역사적이자 동시대적인 소식이 뜻깊게 다가온다. “지난 5월 경기장 서쪽 스트레트퍼드 엔드Stretford End 스탠드 바깥에 지미 머피Jimmy Murphy의 동상이 세워졌어요. 1958년 유러피언컵 경기를 치르고 잉글랜드로 돌아오던 길에 경유지인 뮌헨공항에서 비행기가 이륙 중 전복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8명의 선수를 포함해 23명이 목숨을 잃은 뮌헨 참사예요. 당시 감독이었던 맷 버스비 경도 사경을 헤매며 병상에 있었어요. 수석 코치였던 지미는 주축 선수를 잃은 유나이티드의 가장 암울한 시기를 이겨내는 데 묵묵히 기여를 한 인물입니다. 주목받지 못한 그의 존재감이 다시 드러나게 된 건 팬들의 열렬한 제안이었어요. 동상 제막식 때 1000여 명의 팬이 참석했을 정도죠.” 팀을 위한 헌신 그리고 그 공로를 인정해주는 일은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갈 본보기가 될 것이다. 유나이티드의 또 다른 영광을 기대하며!
INSIDER. 호텔 풋볼Hotel Footbal
올드 트래퍼드의 동쪽을 마주하고 유나이티드 트리니티 동상을 바라보는 호텔. 리셉션 벽에 유나이티드의 주장이었던 게리 네빌의 사인 유니폼이 걸린 것이 심상치 않았는데, 그와 라이언 긱스가 이 호텔을 운영 중이라고 한다. 경기를 실시간 중계하는 대형 스크린이 설치된 ‘카페 풋볼’은 축구를 테마로 한 메뉴가 이색적이다. 조식으로 선택 가능한 메뉴 중에는 얼리 킥오프 피자The early Kick off Pizza가 독특하다. 토핑으로 잉글리시 브렉퍼스트에 나오는 블랙푸딩뿐 아니라 베이크드 빈을 듬뿍 올려 주는데 보기보다 아주 맛있다. 경기가 있는 날에는 유나이티드의 전설적인 선수와 함께하는 Q&A 시간이 포함된 숙박 패키지도 운영한다. 옥상에는 작은 축구장까지 마련되어 있다.
맨체스터 시티 FC, 잉글랜드 최신의 트레블
맨체스터 시티 FC(이하 시티)의 에티하드 스타디움Etihad Stadium으로 향한다. 도시의 동부에는 시티, 서부에는 유나이티드, 이렇게 홈구장이 서로 정반대에 자리한다. 지역 연고전인 맨체스터 더비에 걸맞은 위치 선정이다. 에티하드 스타디움 주변은 비교적 근래에 활약한 선수인 다비드 실바, 뱅상 콩파니, 세르히오 아게로의 동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시티는 2020-21 시즌부터 리그 3연패를 이루었고 2022-23년 시즌에는 FA컵과 챔피언스리그까지 우승하며 트레블을 달성했다. 현재 가장 잘나가는 명실상부 최고의 구단. 스타디움 투어 리셉션 부근에 전시된 지난 시즌 프리미어리그와 FA컵 트로피가 반짝인다.
함께하는 투어 참가자 중에 시티의 유니폼을 입은 어린이가 많다. 가이드 매튜 도란Matthew Doran이 본격적으로 투어를 시작하기 전, “시티 팬 아닌 분, 손 들어보세요!”라고 말하자 부모 중의 일부가 쭈뼛쭈뼛 손을 들었고 장내에 웃음이 터진다. 물론 나도 손을 살포시 들었다. 구름이 잔뜩 끼고 흐린 날이었는데, 스타디움에 들어서자 하늘이 시티의 상징인 푸른색으로 맑아진다. 원정팀의 라커룸에는 세심하게 다양한 클럽의 선수들 유니폼이 걸려 있다. 짐에서는 시티 선수들이 평소 어떻게 운동하는지 영상이 흘러나와 코앞에서 운동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드디어 대망의 시티의 라커룸에 입성한다. 원형의 라커룸은 선수들 간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펩 과르디올라 감독이 직접 설계했다고 한다. 존경하는 아버지가 뛰었던 팀에 합류해 트레블을 달성한 엘링 홀란. 유독 홀란의 9번 유니폼을 입은 아이들이 많았는데 다들 줄을 서서 그의 셔츠가 걸린 자리에서 사진을 찍는다. 너무 귀여워서 그의 유니폼 앞에서 사진 한 장 못 건진 나조차 만족스러울 정도. 나는 케빈 더 브라위너의 자리에서 서랍을 괜히 열어본다. 라커룸에서 선수 입장 터널로 향하는 길에 벽면을 채운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온다. 에티하드 스타디움에서 펼쳐진 경기의 극적인 순간을 담고 있다. 2021-22시즌 프리미어리그 마지막 라운드, 2위인 리버풀과 승점 차가 단 1점이었기 때문에 시티에게는 아주 중요한 경기였다. 대결 상대인 아스톤 빌라에 2점을 내주며 패배 위기에 놓였으나 후반 31분부터 5분 만에 3골을 휘몰아치는 대역전극을 쓰며 우승을 해냈다. 매튜가 일카이 귄도안이 역전골을 넣고 팬들을 향해 달려간 사진 속 장면을 설명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집중한 부분이 선수가 아니라 관중석의 수많은 팬이라는 것. 스타디움 투어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한 팬들의 반응을 이야기해주었는데, “오 마이 갓!”은 기본이다. 그중 “2년 연속 우승을 확정했을 때 지어야 하는 표정의 정석은?”이라는 질문을 듣고 저마다 손으로 누군가를 신중하게 가리켰는데, 매튜가 콕 찍은 이는 포효하듯 울부짖는 할아버지 팬이었다. 그 모습이 아직도 선연하다. 프레스룸에서는 자원한 어린이 2명이 펩 감독와 인터뷰하듯 이야기를 나눈다. 지금 펩은 이 자리에 없지만, 모니터에서는 가상의 그와 자연스럽게 인터뷰가 진행 중이다. 게다가 프레스룸에서 펩과 함께 사진도 찍을 수 있다. 물론 합성 효과 덕분이지만, 정말 감쪽같아서 진짜 그와 촬영했다고 믿는 지인들이 속출한다고.
INSIDER. 축덕 집합
축덕의 눈이 빠르게 굴러가는 걸 직접 목격한 장소.
국립축구박물관National Football Museum
영국의 리그와 클럽뿐 아니라 국가대표 그리고 전 세계의 축구에 관한 모든 것을 아우르는 방대한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다. 영국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유일한 여성 선수인 릴리 파Lily Parr의 동상과 처음으로 커밍아웃한 선수인 저스틴 파샤누Justin Fashanu의 잉글랜드 대표팀 유니폼 전시도 의미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 이야기도 발견할 수 있으며, 직접 승부차기나 인터랙티브 게임을 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클래식 풋볼 셔츠Classic Football Shirts
‘아까 국립축구박물관에서 봤던 그 유물 같은 유니폼을 직접 살 수 있는 곳’이라는 축덕의 정의가 딱 들어맞는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시티뿐 아니라 영국 리그를 넘어 세계 각국의 클럽 그리고 전 세계 국가대표 셔츠까지 폭넓은 빈티지를 자랑한다. 메시가 실제로 입었던 아르헨티나 어웨이 셔츠뿐 아니라 박지성의 이름이 마킹된 유나이티드 유니폼 한 장도 어렵게 발견했다. 가격은 희소성에 따라 천차만별.
"영국은 축구 종주국이고, 맨체스터는 축구의 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