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지역의 역사와 문화, 이어온 서사는 결국 땅의 힘에서 비롯되었음을 공감하며, 인문과 자연의 상호작용을 다양한 현장에서 재발견하고 빅 지오그래피 관점에서 살피는 여정을 시작해본다. 지리학자 김이재 교수와 함께한 전북 고창-고군산군도 지역 일대의 탐험은 장소마다 서사를 부여하여 여행자가 좀 더 깊숙하게 그 안으로 발을 내딛게끔 한다.
유네스코가 극찬한 ‘오래된 미래’
지리학자가 읽어낸 고창의 땅, 그 풍요의 흔적을 통해 찬란했던 과거를 상상하고 여행자가 새로운 영감을 얻을 이야기 속으로 안내한다.
문자가 없던 시대에도 지도는 있었다. 흙바닥에 지도를 그려 사냥 전략을 공유하고 고인돌로 부족의 경계를 나누고 별자리까지 표시했다. 살기 좋은 땅을 찾는 능력이 생존을 좌우했던 시절 고창은 부와 권력의 중심지였을 것이다. 선사시대 세워진 2000여 기 고인돌이 곳곳에 있는 고창은 유네스코가 극찬한 세계유산도시다. 인류의 지혜가 농축된 고인돌뿐 아니라 자연유산인 갯벌·지질공원, 무형유산인 농악·판소리, 동학운동 포고문 같은 기록유산까지 보유하며 세계 최초로 7개 유네스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영국의 스톤헨지, 이집트의 피라미드 등 거석문화가 발달한 곳에는 특별한 기운이 있다. 세계 거석 유적(고인돌·선돌·환상석·열석·피라미드 등)의 50% 이상, 고인돌의 60% 이상을 보유한 고창은 인간이 살기 좋은 땅의 조건을 완벽히 충족한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무덤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그 용도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제단과 별자리 관측을 통해 길흉화복을 점치는 점성대, 신앙의 대상물, 각 부족을 나누는 경계를 표시하는 의미도 있었다고 본다. 운곡람사르습지에 있는 동양 최대 규모 고인돌(300톤)을 중심으로 인근 고인돌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해 연결했더니 별자리가 그려진다는 것을 향토지리학자가 발견해 화제를 모았다. 아직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가 많은 고창 고인돌은 전 세계 연구자들의 발견을 기다리고 있다.
인류의 지혜가 농축된 땅, 고창은 ‘오래된 미래’다. 기원전 3세기부터 고창에 터를 잡았던 ‘모로비리국’이 고구려, 백제, 신라보다 앞선 왕국이었으니 고창이 한반도 첫 수도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운곡람사르습지뿐 아니라 고창군 전체가 유네스코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배울 거리, 체험거리가 가득한 땅 고창은 세계적인 수학여행 중심지, 교육 여행의 메카가 될 잠재력이 충분해 보인다.
고인돌의 지리학
고인돌이 세워진 곳은 인간이 살기 좋은 땅의 조건을 완벽히 충족한다. 대부분 구릉에 세워진 고창의 고인돌은 하천과 갯벌이 가까워 먹거리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에 있고 주변에 화산암 등 건축 재료도 풍부하다. 고창의 붉은색을 띠는 비옥한 황토에서는 비료를 많이 쓰지 않아도 곡식뿐 아니라 멜론, 수박, 땅콩, 복분자 등 모든 작물이 잘 자란다.
농지와 갯벌의 힘
농경 기술과 음식 문화가 발달한 땅, 한국인을 먹여 살리는 전북에 관하여.
산지가 70%가 넘는 한반도에서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은 흔치 않다. 전북은 너른 들판과 갯벌이 끝없이 펼쳐진 풍요로운 땅이다. 어머니처럼 푸근하게 감싸주는 모악산에서 발원한 만경강과 금강 사이 비옥한 땅에서 백제 문화가 꽃폈다. 특히 330년 백제 비류왕 때 축조된 김제 벽골제는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시설로 당대 발달한 농경 기술과 혁신적인 수자원 관리의 흔적을 보여준다. 벽골제가 바다를 막는 방조제였다는 의견도 있지만 사료가 부족한 시대의 유적을 연구하려면 현장 답사와 지리적 상상력을 활용한 빅 지오그래피 접근이 중요해진다.
10km의 해안선과 1200Ha에 이르는 광활한 갯벌이 펼쳐진 하전마을은 전국 최대 바지락 생산지다. 국내 생산량의 60%를 감당하고도 남은 바지락은 전량 일본으로 수출되어 일본 학생들을 위한 급식에 사용된다고 하니, 고창 갯벌이 한국인뿐 아니라 일본인까지 먹여 살리는 셈이다. 유네스코가 인정한 세계자연유산인 전북 갯벌에서는 꽃게, 골뱅이, 소라 잡기 등 다양한 갯벌 체험이 가능하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서 자라는 풍천장어는 보양식으로 인기가 높고, 지주식 황토김과 청정한 소금도 인근 해안 지역에서 생산된다.
갯벌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을 넉넉하게 먹여 살린다. 고창·부안 일대 갯벌은 전형적인 개방형(openembayed type)으로, 다양한 동식물의 서식지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조개류와 갯지렁이, 풀게, 동죽과 칠면초와 갈대, 나문재 등 염생식물의 서식지인 전북 갯벌을 찾아오는 조류는 60여 종인데, 그중 흰물떼새, 민물도요, 큰고니, 가마우지, 중대백로 등 멸종위기에 처한 조류도 10여 종이나 된다. 최근 한국의 갯벌은 탄소 포집 능력이 탁월한 ‘블루카본’으로 주목받고 있는데, 블루카본의 탄소 흡수 속도는 육지의 숲과 같은 그린카본 대비 최대 50배가 빠르다. 광합성을 하는 저서미세조류(단세포식물)가 풍부한 전북의 갯벌은 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배출하는 생태계가 건강하게 살아있는 ‘숨 쉬는 해안’이다.
바지락 등 먹거리가 많이 나오는 여름철에만 갯벌에 갈 게 아니다. 초겨울 찬 바람을 맞으며 트랙터를 타고 너른 갯벌에 나가는 것도 좋다. 특히 해 질 무렵 갯벌에서 바라보는 서해의 석양은 숨 막히게 아름답다.
“무녀도 주민들이 차가운 갯벌에서 건져 올리는 산낙지는 강인한
생명력으로 꿈틀거린다. 갯벌은 무한한 생명 자원의 보고이며, 우리가
소중히 지켜나가야 할 미래의 원천이다.”
-박하선 사진가
선각자의 땅
나라가 어지럽고 절망적일 때마다 선각자들은 전북 땅에서 호연지기를 길렀다.
고창 선운사 도솔암은 보물 제1200호인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로 유명하다. 미륵보살의 위로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투박한 입술, 뭉툭한 코는 위압적이지 않고 자애롭다. 내 자식이 잘되고 내 조상이 편안하길 바라는 소박한 민중들의 마음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미륵 신앙으로 이어졌다. 미륵 신앙의 씨앗은 익산 출신 백제 무왕이 심었다. 당시 수도였던 부여가 아닌 용화산 아래 드넓은 평야에 동양 최대 규모의 미륵사를 창건해 새로운 이상국가 비전을 제시했다. 백제-통일신라-고려 시대를 관통하는 미륵 신앙은 구한말 동학농민혁명을 꽃피우는 원동력이 되었다. 실제로 미륵불의 배꼽에서 꺼낸 비기로 용기를 충전한 동학혁명 세력은 무장읍성에서 가세한 농민군과 연합해 전국적으로 확장했다.
나라가 어지럽고 절망적일 때마다 선각자들은 전북 땅에서 호연지기를 길렀다. 12살 때 당나라로 건너가 과거에 급제하고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통일신라 말기 대학자 최치원은 전북과 인연이 깊다. 고군산군도의 황금 돼지 출생 신화에서 시작해 현재 정읍인 태산에서 군수로 공덕을 쌓은 그는 말년에 군산 옥구향교의 자천대에서 독서로 시름을 달랬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한편 아홉 마리 용이 여의주를 물려고 다투는 모습의 지형, ‘구룡쟁주지지(九龍爭珠之地)’를 품고 있는 해발고도 876m 성수산에는 고려와 조선의 개국 설화가 서려 있다. 현재 임실에 있는 성수산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백일기도 후 관음의 계시를 받고 기쁜 마음에 바위에 글자를 새겼다는 환희담과 함께 조선 창업에 성공한 태조 이성계가 발용의 대몽을 꾼 곳에서 친필로 새긴 삼청동이 전해 온다. 편백 숲이 머리를 맑게 하는 성수산 휴양림과 상이암은 한반도에서 가장 ‘기도발이 좋은 땅’으로도 유명하다.
조선 초기 왜구의 침략이 끊이질 않자 태종은 전북 고창 무장현에 요새를 구축한다. 1417년 무장읍성을 쌓는 대규모 토목공사에 무려 2만 명이 넘는 장정과 승려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무장읍성에는 사두봉과 용의 전설이 내려오는데, 용이 뿜는 김이 안개처럼
솟아 나와 고을을 뒤덮으면 장사도 잘되고 고을 사람들이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뱀과 황새가 싸우는 땅의 형국으로 장날마다 청년들이 죽고 가족들이 슬피 울자 뱀의 머리에 해당하는 사두봉을 깎아 연못을 만들게 된다. 한편 왕성한 땅의 기운이 쇠할 것을 염려하고 풍수지리를 믿는 사람들이 사두봉 높이만큼의 느티나무를 심고 뱀이 좋아하는 개구리 연못을 만들어 땅의 기운을 보했다고 한다. 구한말 뜨겁게 불타오르던 동학혁명의 기세를 누르고 싶었던 일제는 무장읍성을 국민학교로 만들어버렸지만 주민들의 노력으로 무장읍성은 조금씩 옛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일제강점기 운동장이었던 연못을 복원하니 100년 전 씨앗이 발아해 연꽃이 다시 무성해져 자연의 놀라운 생명력을 새삼 느낄 수 있다.
군산을 탐하다
꿈이 많은 사람들을 자석처럼 끌어들인 모던한 신도시.
‘자립 도시’ 군산에 가면 영국을 대표하는 항구도시이자 비틀스의 고향인 리버풀이 떠오른다. 거친 패기와 강한 근성으로 열혈 팬이 많은 리버풀 축구클럽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기로 유명한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야구팀과 왠지 닮았다. 최무선 장군이 왜구를 무찌른 진포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군산 내항 인근에 조성된 해양테마공원 거리에는 탱크와 전투기 등 신무기가 전시되어 있다. 모두가 배고팠던 시절 ‘군산에 가면 최소한 굶지는 않는다’는 소문에 대박 성공의 기회를 잡고 싶었던 사람들은 배와 철도를 타고 군산으로 몰려들었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주변의 세관 건물, 은행이었다는 군산근대미술관, 쌀을 보관하던 공간을 개조한 장미 갤러리 등은 군산이 일본이 탐하던 땅이었음을 말해준다.
산업화 이후 급증하는 본토 인구를 먹여 살릴 쌀이 절실했던 일본은 전북의 비옥한 농지에 주목했다. 1899년 군산을 개항시킨 일제는 전북의 이리, 전주를 중심으로 쌀을 수탈해 갈 철도와 인프라 구축에 열을 올렸다. 군산항에는 당대 최첨단 기술을 적용한 뜬다리 부두가 부설되었고 새로 조성된 간척지에는 일본인 이주자를 위한 가옥이 대규모로 들어섰다. 지금은 기차가 다니지 않는 임피역사에 전시된 일본 철도지도를 보면 전북 일대에 촘촘하게 구축된 철도 노선이 일본으로 쌀을 보낼 항구인 군산과 부산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40년대 대동아공영권을 표방하며 한반도, 만주 일대를 넘어 중국 본토까지 뻗어 나간 일본의 야욕이 지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본·한국·서양의 건축양식이 복합된 이영춘 가옥은 일본 대농장주 구마모토가 1920년대 국내 최초로 미터법을 적용해 지은 건물이다. 이 가옥을 구입한 이영춘 박사는 예방 의학의 선구자로 농촌 보건 사업에 헌신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군산은 전국 최초로 학교에 양호실이 설치되었고 보건 위생 분야 혁신의 중심지가 되었다.
고려시대 축조된 3층 석탑과 벚꽃길이 아름다운 탑동리는 병을 치유하는 영험한 약수로 유명한데, 최근 ‘93세 지구 최강 동안’으로 화제를 모은 원조 알파걸, 이길여 가천대 총장의 고향이기도 하다. 한편 꿈을 품고 군산에 온 외국인은 일본인뿐만이 아니었다. 지금도 미군 기지와 비행장으로 쓰이는 공항이 있는 군산은 ‘한 집 건너 교회’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기독교 문화가 뿌리 깊은 도시다. 미국인 선교사 전킨은 군산에 영명학교(현 군산제일고)를 세우고 인재를 양성해 3·1독립운동의 정신이 서울에서 한강 이남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되는 데 기여했다. 군산 짬뽕거리를 지켜온 원조 중국요리점 빈해원에는 100년 전 전북으로 이주한 화교들의 삶과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일본인 사업가의 히로쓰 가옥과 함께 시간 여행을 온 듯한 군산의 거리 풍경은 바로 영화를 촬영해도 될 법한 세트장 같다.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였던 초원사진관은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빵집이라는 ‘이성당’과 함께 군산을 찾는 여행자에게 행복한 추억을 선물한다.
지도 읽기
일제강점기 뜬다리 부두와 철도 건설, 의학 기술과 건축의 혁신이 눈부셨던 군산 시내는 이전에 바다였던 곳을 메꾼 간척지였다. 하지만 진짜 군산의 과거를 알려면 바다 쪽 군산, 선유도를 중앙에 두고 연꽃처럼 퍼져 있는 섬들의 세계 고군산군도로 나가야 한다.
바다와 섬을 잇다
고군산군도는 고려시대 국제 해상 교류의 중심지이자 삼국시대부터 외세의 침입을 막아낸 격전지였다.
최근 CNN은 ‘세계에서 가장 저평가된 여행지’, ‘아시아의 숨은 명소’로 고군산군도를 선정했다. 16개 유인도와 40여 개 무인도로 구성된 ‘고군산군도’라는 지명은 섬이 많이 모여 산처럼 보여 ‘군산진(群山鎭)’으로 불리던 지명 앞에 옛날 ‘고古’를 붙여 조선 중기 이후 불리게 된 이름이다. 이전에는 전북의 정치·군사·외교의 중심지가 현재 육지 쪽 군산이 아니라 바다로 향하는 섬들에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지금도 아름다운 자연 풍광과 해산물로 유명하고 낚시꾼에게 인기가 많은 고군산군도지만, 고려시대에는 더 화려한 전성기를 누렸다. 고려 인종 원년인 1123년에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다녀간 서긍의 기록을 보면 바닷길로서 고군산군도의 입지적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에 의하면 사절단 일행이 송나라로 돌아갈 때 밤마다 서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봉수대에서 불을 피워 뱃길을 환하게 밝히는 등 이곳 관리들의 접대가 대단했다고 한다.
최근 선유도 망주봉 인근에서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객관이었던 ‘군산정’과 숭산행궁의 주춧돌이 발견되었다고 하니 고려시대 이전 무역과 교류의 중심지로서 선유도의 확고한 위상을 재확인하게 한다. 신선이 풍류를 즐겼다는 선유도(仙遊島) 망주봉 인근 몽돌 해변 주변에는 코끼리를 닮은 거대한 바위가 있어 여행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태종은 코끼리를 처음으로 길들인 왕이기도 한데, 태종에게 아부하기 위해 일본 조정은 코끼리를 진상한다. 코끼리가 전국을 순회하며 화제를 모으는 가운데 전직 공조판서인 이우가 코끼리가 추하다고 놀리며 침까지 뱉자 화난 코끼리가 그를 밟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태종은 코끼리를 순천의 외딴섬으로 귀양 보내는데 코끼리가 슬피 울며 식음을 전폐해 뼈만 남자 어쩔 수 없이 1년 만에 다시 육지로 불러들인다. 하지만 엄청난 식욕에 사람까지 해하는 코끼리를 반기는 지역이 없어 귀한 식량만 축내는 애물단지 취급을 받으며 떠돌아다녔다고 한다. 당대 세계에서 가장 정확한 세계지도였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만들어진 1402년은 태종이 나라의 기반을 다지던 조선의 초창기였다. 자바의 마자파힛 제국에서는 조선 태종에게 바칠 진귀한 약재와 향신료, 공작 같은 희귀 동식물을 실은 배와 사신을 보내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자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왜구에 의해 배가 약탈당하고 난파되어 인도네시아에서 보낸 귀한 선물이 태종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못했다.
안타까운 사연을 접한 태종은 향후 외교 관계를 고려하여 마자파힛 제국의 사신이었던 진언상을 환대하고 선물과 함께 돌려보냈다고 하니 조선 초기만 해도 세계로 열린 진취적 기상이 살아있었던 듯하다.
설화의 재발견: 개양할미
장자도의 할매바위, 무녀도를 비롯해 여성과 관련된 설화가 많은 전북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느낌과 거친 자연미가 어우러진 땅이다. 용감한 남성들이 먼 바다로 나가 한계에 도전할 때 여성들은 가족의 생계를 담당하고 마을을 지켰을 것이다. 부안 변산반도 끝에는 서해에서 으뜸이라는 개양할미와 딸 8명의 초상을 모신 수성당이 있다. 7명의 딸을 전국 팔도에 보내고 막내딸만 곁에 두었다는 개양할미 설화에는 할머니-어머니-딸로 이어지는 모계사회의 전통이 스며있다. 굽이 있는 큰 나막신을 신고 서해를 걸어 다니며 안전한 뱃길을 인도해온 개양할미. 육지의 흙과 돌을 치마에 담아 바다 깊은 곳을 메우고 고기가 많이 잡히는 곳까지 콕 찍어준 그녀는 빅 지오그래피를 실천한 지리학자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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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많은 사람은 지도를 사랑한다. 2024년 1월 18일 전북특별자치도로 이름을 바꾸는 전북의 힘을 재발견하고, 풍요로운 땅에서 기술과 문명을 꽃피운 사람들이 가슴에 지도를 품고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기를!”
-지리학자 김이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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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학자 김이재 교수는 서울대에서 지역연구 석사, 지리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런던대 교육연구대학원(IOE), 싱가포르대 아시아연구소(ARI), 국립교육원(NIE)에서 연구를 했다. 7개 언어를 구사하는 그는 오지에 겁없이 뛰어 들어 생생한 사진을 찍는 현장형 학자로 통한다. 빅 지오그래피라는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 지리학자의 시각으로 보는 다양한 여행을 제안하고 있다. 〈내가 행복한 곳으로 가라〉, 〈치열하게 그리고 우아하게〉 등 다수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