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토리니의 메마른 땅속에 견고히 뿌리 내린 포도.
현지인들이 땀 흘려 수확한 포도로 만든 디저트 와인은 섬의 본질을 드러낸다.
한 모금 안에 햇살이 가득 담겨 있다.
무화과와 꿀의 맛, 초콜릿과 캐러멜의 향이 은은하게 감돈다.
처음 머금어본 빈산토vinsanto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디저트 와인은 크리스마스에나 어울리는 무거운 와인이라 여겼는데, 빈산토는 목구멍을 타고 기분 좋게 넘어갈 만큼 가볍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산토리니의 석양을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한 레스토랑에 앉아 별다른 고민 없이 주문했던 흔한 와인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내 빈산토의 맛에 점차 취해갈수록 하얀색과 파란색으로 칠한 지붕 사이로 주황색 하늘이 더욱 짙어져간다.
아름다운 절벽 마을로 잘 알려진 산토리니는 사로닉제도Saronic islands에 속한 여타 지형과 다른 특성을 보인다. 무엇보다 경작을 해야만 작물이 겨우 자랄 정도로 흙이 건조하다. 산토리니 북부 오이아Oia에서 해안선을 따라 운전하다 보면 허전한 느낌이 들어 어색할 텐데, 이는 도로에서 나무 한 그루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드라이브 내내 검은색 화산과 황량한 언덕이 섬의 새하얀 건축물과 극적인 대비를 이룰 뿐이다.
산토리니에서 가장 큰 와이너리 중 하나인 에스테이트 아르기로스Estate Argyros에 도착하자 디미트리오스 케카스Dimitrios Kekas가 마중을 나와 있다. 30년 동안 와인에 집중해온 그는 여유롭게 포도밭으로 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나는 포도나무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으레 포도나무가 위로 뻗어 있겠거나 추측했던 나는 땅 아래로 엉켜 있는 넝쿨을 마침내 발견한다. 그러자 디미트리오스가 산토리니에만 존재하는 쿨루라스koulouras(넝쿨로 엮은 바구니 형태의 전지 기법을 뜻한다)를 들어올린다. 이곳에 있는 쿨루라스 중 일부는 자그마치 300년이 넘었다고 한다. “마치 둥지가 알을 보호하듯 쿨루라스가 포도를 보호하는 겁니다.” 그가 덧붙인다.
본래 포도는 일정한 조건하에 자라기 때문에 기후가 수시로 바뀌는 산토리니는 재배지로 적합하지 않다. 특히 수직으로 뻗어나가는 나무와 열매는 외부 환경에 큰 영향을 받는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섬의 와인 생산자들은 포도 넝쿨이 나무뿌리를 감싸면서 수평으로 자랄 수 있게끔 길들였다. 쿨루라스는 바람, 모래, 태양으로부터 포도를 지켜낼 뿐만 아니라 산토리니의 적은 강수량을 해결해주기도 한다. 나무뿌리가 땅과 인접하여 흙 속의 물을 쉽게 빨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여름에는 이른 아침에 바다에서 생성된 이슬을 가두는 효과도 있다. “수확 시기가 되면 와인 생산자들은 쿨루라스에 도시락을 넣어 보관하곤 합니다. 포도 넝쿨의 차가운 아침 이슬이 냉장고 역할을 하거든요.”(디미트리오스)
하지만 적당한 태양의 열기 또한 빈산토의 품질을 좌우한다. 한여름에 최대 2주 동안 자연 건조를 거친 포도는 진한 붉은색을 띠며 보다 깊은 풍미를 자랑한다.
잠시 후 디미트리오스가 우아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어느 공간으로 나를 데려간다. 예식장을 연상시키는 와이너리에서 그는 작은 잔에 빈산토를 따라준다. “버터스카치와 시가가 스며든 오크의 향을 맡아보세요.” 이어서 그가 건넨 블루치즈의 짠맛을 곁들이자 빈산토의 단맛이 극대화된다.
“두 가지 맛이 완벽한 균형을 이뤄줄 거예요.”
과거를 돌아보다
현지인들이 로컬 와인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는 데 비해 세계에서 그리스 와인은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저품질 와인을 수출했던 전력이 발목을 잡는 셈. 산토리니의 와인 생산자들은 과오를 바로잡고자 꾸준히 노력해왔지만 여전히 빈산토는 그리스를 여행하다가 처음 맞닥뜨리게 되는 ‘우연한’ 와인으로 취급받고 있다.
산토 와인스Santo Wines는 와이너리 내부에 자리한 레스토랑에서 화산을 감상하며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으로 날마다 사람들로 북적인다. 1911년 산토리니 바인&와인 보호 기금이 세운 이 와이너리는 현재 1200명의 조합원이 힘을 보태고 있다. 나는 2019년에 합류한 아나스타시오스 테르지디스Anastasios Terzidis와 함께 구경에 나선다. “저희는 섬에 있는 유일한 조합입니다.” 산토리니의 많은 가문들은 대를 이어 작은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지만 자체적으로 와인을 생산할 만한 여력은 없다. 조합에서는 수확한 포도를 산토 와인스에 판매하여 조합원들이 땅과 노동만으로 수익을 얻도록 돕는다. 부가적인 비용과 시간 등을 투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도시들이 이제 농사를 주업으로 삼지 않죠. 하지만 이런 체계가 아직 산토리니에서는 유효해요.” 아나스타시오스가 설명한다.
빈산토에 사용되는 포도인 아시르티코assyrtiko는 섬에서 자라는 토마토나 파바빈처럼 원산지 지명 보호(PDO) 품종으로 지정되어 있다. 따라서 와인 생산자들이 빈산토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PDO를 유지하려면 전통적인 재배법과 숙성기법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 먼저 포도를 태양 아래 건조한 후 와인을 오크통에 담아 최소 2년 이상 숙성시킨다. 더 오래 숙성시킬 때는 4년 단위로 기간을 끊어 당도와 산도의 균형을 맞춰준다. 숙성 기간은 와인 생산자가 결정하지만 템포를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다. 섬에 위치한 20여 개의 와이너리 중 빈산토를 만드는 곳이 손에 꼽히는 이유다.
와이너리의 지하를 소개하면서 아나스타시오스가 말한다. “와이너리는 여러 층에 걸쳐 수직으로 설계되어 있어요. 와인이 중력으로 인해 아래층으로 잘 흐르게 합니다.” 이렇게 하면 와인의 펌핑 과정이 줄어들고 그로 인한 에너지 소비가 감소하여 결국에는 와인의 맛도 좋아진다고 한다.
다시 지상으로 올라온 나는 여러 종류의 와인을 마주한다. 서로 다른 기간 동안 숙성된 빈산토 몇 가지가 눈에 띈다. 숙성을 오래 할수록 커피, 초콜릿, 캐러멜 향이 더욱 강해진다. 디저트 와인은 치즈, 올리브 그리고 그리스 전역에서 즐겨 먹는 보리빵인 팍시마디paximadi와 함께 시음한다. 와이너리에 수많은 이들이 오가지만 아무도 나를 재촉하지 않는다. 서두르기에는 태양이 너무 뜨겁다. 이곳에서는 햇살과 음식을 천천히 음미할 줄 알아야 한다.
다정한 섬 요리
산토리니의 요소를 담다.
파바빈
산토리니에서 약 3500년 동안 재배되어 온 파바빈. 덕분에 섬 전역에서 파바빈으로 조리한 음식을 만나볼 수 있는데 주로 마늘과 올리브오일을 넣은 부드러운 딥dip으로 즐긴다.
토마토 케프테데스
부침개의 일종인 토마토 케프테데스는 산토리니를 대표하는 가정식이다. 섬에서 자란 토마토는 유독 즙이 많고 단맛이 강한데 부침개로 요리해 먹으면 색다른 식감을 자랑한다.
아포치
돼지 엉덩이 살을 소금과 후추로 간한 뒤 식초에 절이고 나흘 동안 햇살에 건조한다.
클로로티리
이 염소 치즈는 샐러드에 첨가하거나 갓 구운 빵에 발라 먹는 것을 추천한다. 산토리니 내의 몇몇 주점이나 레스토랑에서만 취급해서 일상적으로 구하기는 다소 어렵다.
멜리차노살라타
산토리니의 가지는 화산 지대에서 자라 오묘한 하얀색을 띤다. 멜리차노살라타는 구운 가지를 마늘과 올리브오일과 함께 곱게 갈아낸 딥이다.
더위가 한풀 꺾인 오후, 해발 326m에 자리한 좁은 골목들로 이뤄진 아름다운 마을 피르고스Pyrgos로 향한다. 이 마을 끝자락에 하지다키스 와이너리Hatzidakis Winery가 들어서 있다. 거대한 동굴에 발을 들인 순간 따뜻한 온기와 웅장한 울림이 다가온다. 내부에 놓인 테이블에서 터져 나온 웃음소리로 온 와이너리가 웅웅 울린다. 와이너리 오너인 콘스탄티나스 크리수Konstantinas Chryssou가 손님맞이에 한창인 모양이다. 그녀의 아들인 안토니스Antonis가 나에게 다가와 손을 내민다. 그와 같이 걸으며 하지다키스 와이너리의 철학에 대해 듣는다. “아버지는 와이너리를 짓기 위해 포도밭을 훼손하고 싶지 않다고 하셨어요. 그 대신 동굴을 만들어보는 게 어떻겠느냐 제안하셨죠.” 지하 10m 지점에 내려오니 공기가 시원하다 못해 차갑다. “여기 온도는 자연이 결정해요. 신기하게도 항상 16°C 정도로 일정하게 유지가 되죠. 물론 한겨울에도요.” 안토니스가 시선을 돌리며 말한다. 그의 시선이 자기 키보두 배나 큰 오크통 안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들여다보는 동생 스텔라Stella에게 닿아 있다. 하지다키스 와이너리에서 만든 와인에 붙이는 라벨은 모두 스텔라가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저는 어릴 적 부모님이 장난감 가게를 운영하시길 바랐어요. 물론 지금은 충분히 만족하지만요.” 안토니스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속삭인다.
이번 여행에서 맛본 여러 와인 중에서 하지다키스 와이너리의 16년간 숙성을 거친 빈산토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콘스탄티나스는 농약 등을 일절 사용하지 않는 그들만의 유기농 재배법이 포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고 믿는다. “좋은 와인은 와이너리에서 만들지만 훌륭한 와인은 포도밭에서 탄생해요.” 그녀가 작고한 남편 하리디모스Haridimos가 자주 하던 말을 되풀이한다. 콘스탄티나스는 오늘날에도 이 신념을 따르고 있다. “포도를 존중하고 아껴줄수록 포도 역시 최고의 것을 내어줍니다.”
미래를 마주하다
마지막 일정을 위해 19세기부터 6대에 걸쳐 운영되어온 카나바 루소스Canava Roussos 와이너리가 있는 섬 중앙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는 아가페 루소스Agape Roussos와 스피로스Spyros 남매가 와이너리의 운영을 전담하고 아버지인 아이니스Yiannis가 와인의 생산을 담당한다. 부겐빌레아 꽃이 만개한 마당과 진한 빈산토가 오랜 친구처럼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저녁이 되면 루소스 가족이 야외 만찬을 준비하고 이따금 연극 공연도 개최한다고. 단순히 와인을 한잔 마시러 들른 것인데 어쩌면 어둠이 내릴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산토리니에 오기 전 빈산토가 선명한 붉은색을 띠는 탓에 당연히 적포도로 와인을 담그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빈산토에는 토종 청포도인 아시르티코가 51% 들어간다. “아시르티코는 청포도지만 적포도의 성격을 띠고 있어요. 신맛이 나고 미네랄과 염분이 검출되죠.” 아가페가 설명한다.
빈산토 특유의 가벼운 목 넘김은 오랜 기간 숙성된 아시르티코에서 비롯된다. 오크통이 아시르티코의 거친 질감을 부드럽게 만든다. 곧이어 아가페가 오크통이 즐비한 공간으로 나를 이끈다. 각각 1400L 와인을 저장할 수 있는 오크통은 지금까지 봐온 와인통 중에서 가장 크다. “100년 남짓된 역사 깊은 오크통이죠.” 그 안에는 작고한 조부가 마지막으로 만든 43년산 빈산토가 보관되어 있다고. 산토리니를 상징하는 하얀색 건물과 파란색 지붕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이 섬의 본질은 근면한 농부들이 일구는 농업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행자들이 섬의 내면에 관심을 두는 것은 현지인들과 산토리니의 미래에 매우 중요하다. 개발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산토리니에서 아가페는 섬 곳곳의 포도밭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수 있도록 애쓰고 있다. “인간은 다시 땅으로 돌아가야 해요. 이전 세대 사람들이 죽고 그들의 지식, 능력, 역사가 빠르게 소멸되고 있으니까요.”
산토리니의 와이너리들을 둘러보며 빈산토를 넘어 섬의 역사를 알아가는 듯했다. 과거는 여전히 존재하며 현재와 미래의 중요한 자원이다. 문득 콘스탄티나스가 와인을 대하던 태도가 떠오른다. “굳이 설명은필요 없죠. 단지 느낌을 기억하면 돼요. 직접 느끼고
직접 맛보고 기억하는 것.” 그리고 내가 그간 빈산토를 시음하며 노트에 적은 글귀들이 눈에 들어온다. ‘잔잔하다, 섬세하다, 부드럽다, 따뜻하다’ 등. 그 몇 마디 안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담겨 있는지 아직도 생생하다. 산토리니의 와인에는 맛보다 진하고 깊은 그 무엇이 실재한다.
TRAVEL WISE
항공편
인천공항에서 산토리니로 가는 직항편은 없다. 터키항공과 에게항공을 연이어 탑승하여 이스탄불과 아테네를 경유하면 최소 17시간 40분 이상 소요된다.
현지 교통편
산토리니는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았으므로 차량을 렌트하는 편이 좋다.
머물 곳
오이아에 위치한 안드로니스 럭셔리 스위츠에 프라이빗 풀을 갖춘 빌라가 있다. 최소 2박 이상 투숙해야 하는 스위트룸이 조식 포함 약 99만원부터.
andronis.com
피라에 위치한 오라마 호텔&스파의 화산전망의 더블룸이 조식 포함 약 24만원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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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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