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빵의 축제를 즐기며
바게트 문화에 빠져든다.
그리고 바게트 재료를 탐구하는
여정 끝에 그 사랑은 더욱 깊어진다.
진정한 빵의 축제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앞 광장에서 빵 굽는 냄새가 고소하게 번진다. 지금 이곳에 모인 수많은 인파는 복원 중인 노트르담 대성당이 아니라 빵과 이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집중하고 있다. 매년 제과제빵의 수호성인인 성 오노레Saint-Honoré를 기리는 5월 16일을 전후해 열리는 ‘빵의 축제Fête Du Pain’ 현장이다. 제27회인 올해는 파리에서 5월 7일부터 16일까지, 프랑스 전역에서 5월 11일부터 19일까지 빵의 축제가 펼쳐졌다. 나는 카리브해에 위치한 프랑스령 제도 과들루프Guadeloupe에서 온 제빵사를 만나 인사를 나누며 이 축제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펼쳐지는 지 체감한다. 2024 파리 올림픽·패럴림픽(이하 파리 2024)을 맞이해 올해 주제는 ‘빵은 스포츠를 기념합니다!’라고. 이곳에서 제빵사와 운동선수 모두에게 영감을 주는 열정이 가득 느껴진다.
빵의 축제를 통해 전국 각지에서 풍성한 행사가 열리는데, 파리에서는 ‘프랑스 최고의전통 바게트를 위한 전국 대회Concours National De La Meilleure Baguette De Tradition Française’가 5월 13일부터 15일까지 진행됐다. 프랑스 최고의 바게트를 만드는 제빵사에게 상을 수여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대회가 서울에서도 매년 열리는데, 바로 ‘르빵 바게트 챔피언십’이다. 이를 주최하는 르빵의 임태언 오너 셰프는 바게트에 대한 애정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5월 15일, 그는 이곳에서 최종 결선에 진출한 여섯 명의 제빵사가 바게트 만드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다. 긴장감이 감돌지만 휘파람을 불며 바게트 만드는 과정을 즐기는 제빵사의 모습도 눈에 띈다.
프랑스에서 바게트는 재료가 법으로 정해져 있으며 가격 등도 규제한다. 누구나 평등하게 바게트 먹을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다. 자유와 평등을 중시하는 프랑스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품은 빵이라고 할 수 있다. 결선에 참가한 제빵사 역시 1993년 법령 No. 93-1074 제2조에 따라 프랑스 전통 바게트를 6시간 내에 40개 만들어야 한다. 최종 완성된 바게트는 길이 50cm(오차 범위 +/- 2cm), 무게 250g(최대270g)이고, 다섯 개의 쿠프(빵 표면에 내는 칼집)가 있어야 하며, 밀가루를 묻히지 않은 상태로 제출해야 한다. 소금 함량은 밀가루 1kg당 16g을 초과할 수 없다.
전문가와 시민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이 익명으로 나열된 바게트를 평가하는데, 올해는 파리 2024를 기념해 브라질의 축구선수 하이Raí 가 특별 심사위원으로 합류했다. 그는 브라질이 1994년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데 기여했고, 파리 생제르맹 FC의 전설적인 선수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게다가 바게트를 아주 좋아한다고!
오후 5시에 제10회 프랑스 최고의 전통 바게트를 위한 전국 대회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우승자는 프랑스 동부의 부르고뉴프랑슈콩테Bourgogne-Franche-Comté 지방 대표로 출전한 니콜라 르두Nicolas Ledoux. 오트손Haute-Saône주의 작은 마을인 시테르Citers에서 르 두 팽Le Doux pain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모든 동료 제빵사가 매우 자랑스러워요!”라는 소감을 전하며 공로를 돌렸다. 반죽에 사용하는 효모의 구성이나 발효 시간 등 바게트의 풍미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요소에는 장인정신이 담겨 있다. 2022년에는 ‘바게트 장인의 제조 기법과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니콜라의 말처럼 제빵사들은 모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빵의 축제의 의의 중 하나는 이러한 제빵사의 고유한 창의성과 기술을 미래 세대에게 공유하는 것이다. 축제 현장에서는 유럽 베이커리 챔피언뿐 아니라 은퇴한 제빵사와 제과제빵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힘을 합쳐 팽오쇼콜라 등 다양한 빵을 만든다. 연륜 깊은 제빵사의 노하우를 놓칠세라 학생들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여러 질문을 던진다. 관록이 몸에 밴 장인들은 오랫동안 쌓아 온 연륜을 발휘하며 아낌없이 조언을 건넨다. 이들이 합심해서 만든 빵을 팝업 베이커리에서 구입해 맛본다. 이것이 진정한 빵의 축제구나! 임태언 셰프 역시 한국에서 르빵 바게트 챔피언십을 여는 이유로 역량 있는 제빵사를 육성하기 위해서라고 이야기한다. 전 국민이 바게트를 맘껏 즐겼으면 하는 마음도 담겨 있다.
빵과 친구
4년마다 제과제빵 분야의 프랑스 최고 명장Meilleur Ouvrier de France(이하 MOF)을 뽑는다. 선발 과정이 매우 까다로운데, 대회 6개월 전에 공개되는 주제로 논문을 쓰고 발표할 뿐 아니라 공들여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심사위원은 지식과 기술은 물론이고 인성과 성품까지 종합적으로 평가한다. MOF를 준비하다 이혼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아주 고되고 힘든 여정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2004년 제과제빵 분야의 MOF가 된 불랑주리 밥티스트Boulangerie Baptiste의 조엘 드파이브Joël Defives를 만났을 때 명장이 가진 마음가짐이나 태도가 더욱 궁금해졌다. “밖으로 나가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MOF 준비를 하면서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빵집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았습니다. 지칠수록 사람을 만나고 소통하면서 수많은 영감을 얻었어요.” 조엘이 프랑스 최고 명장이 된 숨은 비결을 풀어낸다.
이는 빵의 축제에서 경험한 사회적 유대와 연장선상에 있다. 빵집이라는 공간뿐 아니라 제빵사라는 사람 역시 그렇다. 빵의 축제를 함께한 르빵의 임태언 셰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라 파리지엔느La Parisienne의 지하 주방에서 플로리안 블리스Florian Bleas와 함께 바게트에 쿠프를 넣는다. 플로리안은 임 셰프의 작업에 엄지를 척 들어 올린다. 임 셰프가 한국에서 만든 바게트의 사진을 궁금해하기도 한다. 둘은 언어가 서로 다르지만, 빵으로 통한다.
임태언 셰프가 파리에서 만난 모든 제빵사에게 잊지 않고 건네는 말이 있었으니 바로 한국으로의 초대다. 바게트에서 비롯된 유대감이 프랑스를 넘어 한국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서울에서 르빵 바게트 챔피언십을 통해 한국과 프랑스의 문화 교류에도 이바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파리에서 빵의 축제를 경험하며 배운 것이 많습니다. 르빵의 바게트 챔피언십도 하나의 축제처럼 구상하고자 해요. 올해는 크루아상 챔피언십도 함께 개최하려고 합니다. 많은 분이 이러한 문화를 즐기셨으면 합니다. 놀러오실 거죠?”
라 파리지엔느를 막 떠나려는데 플로리안이 임태언 셰프를 부른다. “당신이 만든 빵이에요!”라고 말하며 건넨 갓 구운 바게트. 프랑스에서는 ‘빵pain’을 나누는 행동이 바로 ‘친구copain’라는 단어가 되었다고 한다. 프랑스어로 빵과 친구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파리의 한국인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한국 제빵사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일드프랑스 최고의 플랑 1위, 서용상
2023년 일드프랑스 최고의 플랑 대회Concours du meilleur flan d’Île-de-France 1위, 2024년 그랑 파리 최고의 크루아상 대회 10위에 오른 서용상. 그의 부단한 노력으로 탄생한 플랑은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스위트파크에서도 맛볼 수 있다.
Q 밀레앙 플랑이 1위를 한 비결은 무엇인가요?
푸딩처럼 탱글탱글한 느낌의 플랑을 만들기 위해서는 손이 좀 가는 편이에요. 그래서 크림을 끓일 때, 구울 때 등 온도를 계속해서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레시피를 정확하게 지키지 않으면 똑같은 품질의 제품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죠. 매일 결과를 살피고 피드백을 주고받습니다.
Q 한국적인 요소를 곳곳에 반영하고 있어요.
여러 빵집에서 캐러멜이나 피스타치오 등 다양한 맛의 플랑을 내놓습니다. 남들이 잘 안 하는 것을 하고 싶었고, 제가 한국인이니까 흑임자를 사용해 만들어봤어요. 일단 제가 만족해야 하고 이보다 더 나아질 수 없겠다 싶을 때 손님들에게도 선보일 수 있으니 연구를 거듭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외 꽈배기나 빙수도 현지에서 반응이 정말 좋습니다. 최근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높다는 걸 느낄 수 있어요.
Q 프랑스 제과제빵업계에 도전하려는 한국인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요즘에는 노력해도 그 보상이 예전처럼 희망적이지 않다고들 합니다. 저 역시 고통을 견디라고 쉽게 말할 순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제과제빵 시장이 한국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이 직업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데다 장인정신을 함양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도전하는 것을 주저하지 마세요. 프랑스에서 조금만 열심히 하면 분명 좋은 기회가 주어질 겁니다. 처음부터 유명한 곳에서 이력을 쌓겠다는 생각보다는 자신이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부터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꿈의 무대
2024년 그랑 파리 최고의 크루아상에서 8위에 오른 이태경 제빵사가 대회 참가 방법을 설명한다. “이 대회는 현장에서 크루아상을 직접 만드는 게 아니라 자신이 만든 것을 제출하는 방식이에요. 출품 당일 심사를 마치고 순위가 모두 결정되지만, 발표와 시상은 한 달이 지나고 빵의 축제 현장에서 이루어집니다.” 연고도 없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프랑스에 온 그는 6년 만에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다양한 대회에 도전하겠다고 한다. 누구보다 그를 진심으로 축하해준 이는 보리스 루메 불랑주리Boris Lumé Boulangerie의 수석 제빵사인 김하영이다. 이 빵집은 슈퍼히어로 애니메이션 <미라큘러스: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에 등장해 인기가 더욱 높아졌다. 그는 빵의 본고장에서 도전해보겠다는 일념으로 2018년 무작정 프랑스로 건너왔고 2021년에 파리 최고의 바게트 9위에 선정되었다. “여기서 천연발효종 빵을 계속 만들고 싶어요. 상업용 이스트를 사용하면 쉽게 갈 수 있겠지만, 맛이 다 비슷해 저만의 개성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다양한 변수에 따라 풍미가 달라지는 천연발효종에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어요. 손님이 해준 말도 ‘당신이 만든 빵은 매일 조금씩 새로운 맛이 나서 기다려진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나는 우연히 빵의 축제에서 한국인 학생인 정아현 씨를 만났다. 그는 일본에서 빵을 전공하고 프랑스에서 공부를 이어갈 계획으로 현재 어학연수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파리에서 무궁무진한 장래를 그린다. 르빵의 임태언 셰프도 파리로의 진출을 계획하고 있다. 빵의 축제에는 수많은 꿈이 모인다.
바게트 재료를 찾아서
“밀가루, 물, 소금, 효모. 바게트는 이렇게
단 네 가지 재료만으로 맛있게 만들어야 해서
가장 어려운 빵이죠.” 임태언 셰프가 이야기한다.
파리에서 만난 수많은 제빵사는 좋은 원재료를
쓰는 것이 기본이라고 말했다.
밀과 센강
파리의 제빵사들은 탄소 배출 같은 환경 영향을 고려해 가까운 일드프랑스 지역에서 생산된 밀을 선호한다. 주로 사용하는 밀가루는 100년 넘는 역사를 지닌 그랑 물랭 드 파리Grands Moulins de Paris(이하 GMP)의 제품이라고. 르빵을 포함한 한국의 많은 유명 빵집에서도 GMP 밀가루를 쓰고 있다. GMP는 비베시아VIVESCIA라는 협동조합의 일원으로 만 명 이상의 농부와 협력한다. 농부가 수확한 밀은 센강을 따라 배로 운반되어 파리 인근의 젠느빌리에 공장Moulin de Gennevilliers에서 제분한다. 수출용 밀가루는 다시 센강을 통해 프랑스 북부의 르아브르Le Havre로 향하고 이곳 항구에서 한국 등지로 떠난다.
*** 더 많은 기사는 <내셔널지오그래픽 트래블러> 7월호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