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진가의 백일몽-지구 침공
칸에서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는 뉴스에 적잖이 놀란 나는 개봉일만을 손꼽아 기다려 비교적 한적한 평일 오후에 여의도에 있는 IFC몰에서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해져서 조용한 카페에 앉아 커피라도 한잔 마시며 정리하고 싶어 무작정 마포대교를 건너 공덕동으로 가는 중이다.
해 질 무렵의 한강은 영화 <괴물>을 떠오르게 한다. 무심코 여의도 63빌딩을 바라보니 건물 전체가 황금빛을 발산하고 있다. 문득 어릴 때 들었던 일종의 괴담이 떠오른다. 북한, 소련, 중공 등 공산당이 쳐들어오거나 (다소 황당하지만)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하면 남산타워의 안테나에서 여의도에 있는 63빌딩을 향해 레이저가 발사되고 63빌딩은 다시 그 레이저를 국회의사당의 돔형 지붕으로 되쏘아 국회의사당 지붕을 뚫고 로버트태권브이가 출격해 우리나라와 지구를 구한다는 시나리오다.
한강에서 괴물을 보고 영화화한 봉 감독처럼 나도 지구 침공과 구출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 건가 싶어 재빨리 반대편에 있는 국회의사당을 바라본다. 그러나 붉은 노을에 물든 채 고요함을 유지하고 있는 국회의사당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세월이 한참 지났는데도 여전히 어릴 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이런 상상을 하는 내가 우습기도 하다. 한편 1980년대의 여의도는 내게는 맨해튼 같았고 그래서 자주 놀러오던 곳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추억 속의 여의도를 소환해 21세기 현대판으로, 좀 더 본격적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 김현민
인어공주
서울 사람도 꼭 한 번 가보아야 한다는 63빌딩. 몬테레이, 시드니, 괌, 부산 등에서 방문한 이후로 실로 오랜만에 다시 찾은 아쿠아리움이라 설레기도 한다. 아쿠아리움에 입장하기 위해 63빌딩 지하 2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왠지 이 아쿠아리움이 한강의 깊은 바닥에 지어졌다는 상상을 해본다. 검은색으로 칠해진 어두운 입구를 지나 들어가자 평일 오전 시간인데도 아이와 함께 온 엄마, 중국 관광객으로 보이는 일련의 사람들, 달달한 연인 등 제법 많은 사람이 눈에 띈다.
먼저 다양한 수중생물이 사는 아쿠아가든 존을 둘러본다. 신체의 일부가 잘려 나가도 쉽게 재생된다고 알려진 뽀얀색 우파루파를 한참 동안 들여다본다. 성장하면서 지느러미나 꼬리가 자취를 감추는 도롱뇽과 달리 우파루파는 올챙이 모습 그대로 자란다고 한다. 650~850볼트라는 괴력을 뿜어내는 전기뱀장어는 원래 진흙에 서식하는 물고기답게 어두운 수조 바닥에서 꼼짝 않고 똬리를 틀고 있다.
오전 11시 20분이 되자 모든 사람이 판타스틱 머메이드 존의 대형 수조 앞으로 모인다. 곧 아쿠아리스트가 등장하고 부채가오리, 얼룩말가오리, 제브라샤크 등 아쿠아리움의 셀럽들이 한곳으로 모여든다. 식사 시간이다. 부산스럽고 활기찬 식사가 끝나고 ‘꿈과 사랑이 가득한’ 애니메이션 OST에 어울리는 여성 가수의 노래가 흐르자 대형 수조에 인어공주와 요정이 등장한다.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 바다를 보며 병들어가는 요정을 먼바다에서 온 인어공주가 그녀의 마법으로 구출하고 바다를 회복시킨다는 내용으로, 약 10분 동안 일종의 공연을 관람한다. 아이들용이겠거니 생각하다가 뜻밖에 수중 라이브 뮤지컬을 관람하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 최윤정
지하 비밀벙커에 미술관이 들어서다
지난 2005년 버스환승센터 공사를 진행하던 중, 우연히 지하로 통하는 철문이 발견되었다. 당시 문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고 내시경을 넣어 조사한 끝에 벙커라는 사실을 확인되었다. 대통령 경호용 비밀 시설로 1970년대에 지어졌을 것이라는 추정이 지금까지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이다. 이후 서울시가 문화 공간으로 조성하기 위해 ‘여의도 지하벙커’를 개관했고, 서울시립미술관이 운영 및 관리를 맡으면서 2017년 ‘SeMA(세마)벙커’라는 정식 명칭으로 재개관했다.
밖에서 보면 세마벙커의 출입구는 마치 지하철역 출구 같다. 출입구를 통해 내려가보면, 매우 쾌적하고 생각보다 시원하다. 당시 사용했던 소파, 세면대, 화장실 등을 최대한 원형 그대로 보존해 방문자들에게 공개하고, 전시회를 할 수 있는 공간을 새롭게 마련했다. 150여 평의 전시장을 지나면, 20여 평의 역사갤러리에 도착한다. 비밀스럽고 조금은 다소 음산한 이 갤러리에서 2017년 개관 당시 ‘나, 박정희, 벙커’라는 주제의 특별전이 열리기도 했다.
현재 작가 BBB가 <현대세계사전부분>(~ 6월 23일) 전을 열고 있다. 그는 매일 집으로 배달되는 신문을 직접 가위로 오리고 풀로 붙여 신문 콜라주를 만든다. 신문 속에 있는 동시대적이고 교과서적인 사진 이미지를 작가의 상상으로 재조합해 이야기를 한다. 크고 작은 콜라주 작품 350점과 함께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하루에 하나씩 ‘데일리 뉴스레터 프로젝트 2016. 2017. 2018’을 만들고 있다. 지난 3년간의 사건을 20m 정도의 길이로 길게 이으며 나열해보는 것이다.
— 임보연
나는 여의도를 왜 좋아하는가
다시 묻게 된다. 한 세대를 풍미한 방송과 정치의 흔적을 품고, 어두운 역사의 민낯을 감추고 있고, 한 건축가의 완성되지 못한 꿈이 한 켠에 존재한다는 사실? 그런가 하면 일요일에 여의나루역에 내려 따릉이를 빌려 타고 입주자들이 떠난 ‘맨해튼’을 가로질러 리에주식 레시피의 바삭하고 쫄깃한 와플을 먹는 유유자적한 즐거움? 사진가 김현민의 지적대로 골목이 존재하지 않는 여의도의 거대하고 광활한 대지야말로 가상의 미래 세계는 결국 미완의 유토피아가 될 것이라는 불길하고도 확실한 예감? 여전히 인어공주를 보며 박수를 치고, 벚꽃 아래 윤중제를 걷고, 펑펑 하늘로 쏘아 올린 불꽃에 감탄하고, 여름 밤이면 한강에서 아웃도어 라이프를 즐기는 사람들이 만드는 은유적인 유토피아 때문일지도 모른다.
— 최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