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시아는 이 지역의 고유한 파에야 요리에 쓰이는 쌀을 생산하는 습지 자연 공원부터 숲이 우거진 산까지, 스페인에서 가장 다양한 풍경이 펼쳐지는 도시다. 파에야는 쌀을 재배하는 농부들이 밭에 모여서 가지고 있는 재료를 모두 냄비에 넣고 조리해 같이 나눠 먹던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수 세기에 걸쳐 파에야는 실용적인 식사에서 가족과 친구를 위해 준비하는 거의 신성한 의식에 가까운 요리로 발전했다.
초록색 허파 또는 심장으로 불리는 투리아 가든Turia Gardens. 현지인이라면 대부분 이 정원이 발렌시아에 꼭 있어야 할 생체 기관이라는 데 동의한다. 강을 따라 약 12km 길이의 구불구불한 리본처럼 펼쳐진 이곳을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찾는다. 여느 때와 같이 내가 방문한 날에도 하늘이 맑았고 온갖 즐거움이 펼쳐져 있었다. 나처럼 자전거를 타거나 인라인스케이트를 탄 이들이 길을 따라 나아간다. 잔디밭에는 소풍이나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인다. 보랏빛 꽃이 피는 자카란다 나무 그늘에서는 한 여성이 바이올린을 연주한다.
발렌시아에서 투리아 가든은 공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희망이자 재앙을 이긴 승리의 상징이다. 지중해 연안에 있는 스페인에서는 비가 주로 고타 프리아gota fría(‘차가운 물방울’이라는 뜻) 기간에 많이 내린다. 1957년에 투리아강이 범람해 81명이 사망한 것도 이러한 가을 폭우 때문이었다. 그 뒤로 강은 도시 주변을 우회하게 되었다.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는 강을 메워 고속도로를 건설하려고 했지만, 현지인들이 ‘강은 우리의 것이고 강을 푸르게 만들고 싶다’는 구호를 내걸고 싸웠다. 이는 환경운동의 초기 사례로 꼽힌다.
이 승리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오늘날 발렌시아 시민 중 97%가 녹지와 근접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유럽위원회가 발렌시아를 2024년 녹색 수도로 선정했다. 투리아 가든에서 자전거를 타면 전체 길이가 약 32km가 넘는 거대한 자전거 도로망을 통과한다. 지속가능성을 향한 이 도시의 노력을 보여주는 4개의 그린 루트 중 하나이다. 나는 더 넓은 지역과 다양한 자연환경으로 안내하는 5일간의 탐험을 통해 발렌시아의 생태를 처음 경험했다.
대여한 자전거 바구니에 휴대전화를 올려놓고 내가 가는 길을 구글 지도에 기록하면서 발렌시아의 역사적 중심지로 향한다. 자전거 도로는 대부분 보행자 전용 길과 나란하다.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마르케스 데 도스 아구아스 궁전Palace of the Marqués de Dos Aguas(현재는 도자기 박물관)과 꿀처럼 빛나는 발렌시아 대성당 등 아름다운 건축물이 끝없이 펼쳐진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현대식 중앙 시장이다. 발렌시아 음식의 성지인 이곳이 베니스의 산 마르코 대성당의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발렌시아에서 가이드로 일하는 카를로스 안드레스 가르시아 야바타Carlos Andrés García Llabata는 “현지인들의 진정한 시장이에요”라고 말한다. 시장 문턱을 넘기 전에 잠시 멈춰 서서 높이 치솟은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감상한다. “대부분 현지 농산물이에요. 발렌시아 앞바다에서 잡은 생선, 발렌시아의 과수원과 밭에서 수확한 과일과 채소죠.”
시장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위를 올려다보니 이 지역에서 유명한 오렌지가 그려진 도자 타일이 눈에 띈다. 돔형 천장의 창문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장밋빛 토마토와 위풍당당한 가지를 비롯한 농산물이 반짝거린다. 이와 같은 시립 시장은 발렌시아의 지속가능성 사슬에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비옥한 토지로 알려진 라 후에르타 데 발렌시아La Huerta de Valencia에서 소규모로 작물을 재배하는 농부들이 중간 유통 단계 없이 소비자에게 농산물을 직접 판매해 저렴한 가격을 유지할 수 있다. 1200여 개의 노점 사이를 거닐며 발렌시아의 유명 요리에 쓰이는 재료를 발견한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전통 음료 오르차타horchata를 만들 때 사용하는 타이거너트, 파에야 발렌시아나paella Valenciana에 필요한 각종 필수품까지. 특히 파에야 발렌시아나는 이 지역의 대표 음식으로, 이모티콘까지 생길 만큼 유명하다. 이 요리는 발렌시아에 오랫동안 검소하게 요리하는 전문적인 노하우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쌀의 바다
발렌시아 최고의 아로스(쌀)는 도시에서 남쪽으로 약 18km 떨어진 지역에서 생산된다. 권위있는 ‘DOP(원산지 명칭 보호)’ 라벨을 받으려면 봄바bomba, 세니아senia, 바이아bahía 같은 품종을 212km²에 달하는 보호구역인 알부페라 자연 공원Albufera Natural Park의 경계 내에서 재배해야 한다. ‘원산지 명칭 보호’는 특정 음식과 음료가 일정 지역에서 고유한 방식으로 생산되었음을 증명한다.
벼농사와 관련된 ‘알부페라’라는 단어는 스페인의 과거 무어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아랍어로 작은 바다라는 뜻의 ‘알부하이라’에서 비롯되었는데, 711년부터 1492년까지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통치했던 무슬림 제국이 소나무 숲이 우거진 모래언덕에 의해 지중해와 분리된 거대한 담수 석호를 일컬었다.
석호를 둘러싼 논은 1년 중 아홉 달 동안이나 물에 잠겨 있어 마치 꿈결처럼 느껴지는 풍경을 만들어낸다. 특히 해 질 녘에 주로 지중해에서 사용하는 대형 삼각돛을 단 배나 알부페렌스albuferenc라고 부르는 전통 목선을 타고 골라데 푸홀Gola de Pujol 부두에서 출항해 알부페라 석호를 돌아보는 투어를 할 수 있다. 갑판에서 파에야를 제공하는 투어도 있다. 한때 어업이 이곳의 주요 산업이었기에 많은 어부가 이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초가지붕의 독특한 A자형 가옥인 바라카barraca에서 살았다. 지금은 대부분 여름 별장으로 사용되며, 나른한 점심식사를 위해 손님을 초대하는 곳이 되었다. 가끔 레스토랑으로 운영되기도 한다.
“파에야는 문화가 아니라 종교입니다.” 아로스 데 발렌시아Arroz de Valencia PDO와 협력해 제품을 보호하고 홍보하는 산토스 루이스Santos Ruíz가 말한다. 우리는 자연 공원의 중심부에 있는 섬마을인 엘 팔마르El Palmar에서 다른 손님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다. 회사의 바라카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열띤 표정을 짓는 산토스는 쌀 전도사 그 자체다. 야외 주방에서 파에야를 요리하기 위해 피운 불에 나무를 던져 넣으며 이야기한다. “토끼고기와 닭고기, 채소로 만드는 진정한 파에야 발렌시아 나는 일요일에만 만들어요.” 손님이 요리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전통인 만큼 산토스가 나에게 껍질을 벗겨야 할 콩 한 바구니와 카바Cava(스페인식 스파클링 와인) 한 잔을 건네준다.
모든 주요 종교와 마찬가지로 파에야에는 많은 규칙이 있는데, 산토스가 포도나무 덩굴이 감싼 아치형 구조물의 그늘에 앉아 이를 설명해 준다.
“첫째, 파에야는 워낙 만들기가 어렵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요리하는 동안 얼마든지 불평해도 됩니다. 예를 들어 “마늘을 안 넣는다고요?” 등등. 하지만 일단 파에야가 식탁에 올라가면 셰프에게 박수를 보내야 하죠. 그런 다음 모두가 포크가 아닌 숟가락으로 팬에서 떠먹습니다.”
어린이에게만 접시에 따로 담아 주기에 처음으로 팬에서 식사하는 청소년에게는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여겨진다고 덧붙인다.
“각자 구역에서만 가져가세요.” 산토스가 손으로 내 구역의 경계를 가리키며 말한다. “원하지 않는 고기는 가운데로 옮겨서 다른 사람이 가져갈 수 있게 해주세요!” 나도 식탁에 둘러앉은 다른 사람들처럼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먹으며 한 입 한 입 서로를 격려한다. 밥은 진하고 고소하며 흡수율이 높아 땅의 풍미가 가득하다.
알부페라 자연 공원 면적의 70%를 차지하는 논은 철새의 주요 서식지이기도 하다. 다음 날 습지 방문자 센터에서 가이드 야니나 마지오토Yanina Maggiotto를 만난다. “이곳은 완전히 인공적으로 조성된 ‘자연 공원’입니다. 사실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풍경이죠.”라고 설명한다. 그녀가 일하는 비지트 나투라Visit Natura는 야생 및 조류 관찰 또는 출사 여행을 운영한다. 나는 야니나처럼 작고 호기심이 많으며 거의 끊임없이 움직이는 새의 모습에 감탄한다. “저는 아르헨티나 출신이지만, 여기에 도착하자마자 집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그녀가 이야기한다.
나는 그녀를 따라 야자수와 소나무로 우거진 길을 걷는다. 발밑 모래에는 소나무 잎과 조개 조각이 박혀 있다. 높은 나뭇가지에는 덩굴이 매달려 있어 그늘을 드리우는 동시에 두꺼운 캐노피가 되어준다. 야니나에 따르면 이곳은 ‘마키아 지중해macchia mediterranea’로 알려진 생태계의 일부라고 한다. 대부분 울창한 상록 관목과 키 작은 나무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길에서 나와 소금 띠를 두른 작은 석호로 간다. 이곳에서 우리는 수백 마리의 깃털 달린 친구들이 모여 수다를 떨고 먹고 마시는 일종의 새들의 파티를 조용히 지켜본다. 야니나가 검은 날개를 지닌 장다리물떼새와 샌드위치제비갈매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지만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홍학이다. “홍학은 네 살이 되어야 분홍색으로 변해요.” 야니나가 속삭인다. “카로틴 색소를 다량 함유한 무척추동물을 먹어서 분홍색이 되는 거예요.” 홍학의 영어명인 ‘플라밍고’라는 단어의 어원은 사실 스페인어로 불타는 듯한 색깔을 의미하는 ‘플라멩고flamengo’에서 유래했다.
석호를 둘러싼 논은 1년 중 아홉 달 동안이나 물에
잠겨 있어 마치 꿈결처럼 느껴지는 풍경을 만들어낸다. 특히 해 질 녘에는 더욱 그렇다.
*** 더 많은 기사는 <내셔널지오그래픽 트래블러> 10월호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