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년의 세월을 간직한 프랑스 샤토에 자신의 취향을 담뿍 담아 살아가는 여정.
“떠날 때도 기분이 좋지만 다시
돌아왔을 때 기분이 더욱 좋은 것이
집이 지닌 마법 같은 요소이다.”
-웬디 원더Wendy Wunder,
〈기적의 확률The Probability of Miracles〉
작은 마을의 발견
“프랑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마을은 어디세요? 혹시 다른 지역에서 살아볼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느 곳을 선택하실 거예요?”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다. 집을 구하기 위해 프랑스의 여러 지역을 돌아보았고, 그렇게 샤토(고성)에 살게 된 이후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여행을 다녔지만 아직도 가보지 못한 곳이 너무나 많으니까. 살아보고 싶은 마을의 목록은 매일 늘어난다. 그럴 때마다 ‘계절에 따라 집을 옮겨 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은 프랑스 하면 파리를 비롯해 보르도, 마르세유, 니스, 리옹처럼 잘 알려진 도시나 프로방스 같은 지역을 선호하고 여행책에도 소개되지 않은 작은 마을까지 찾아가는 경우는 드물다. 프랑스 현지에서 사귄 친구들도 내가 사는 곳을 이야기하면 처음에는 어디에 위치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이니 말이다.
나는 프랑스 서부 페이드라루아르Pays de la Loire 지방 마옌Mayenne 주의 아주 작은 마을에 살고 있다. 1857년에 지어진 샤토는 당시 유행했던 오스만 양식으로 건축된 지하 1층, 지상 3층짜리 집과 정원, 농지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 마주한 샤토는 오랫동안 방치되어 곰팡내가 풍기던 상태였지만, 낡은 집일수록 손수 꾸려가는 재미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이 집을 선택했다.
편의시설은 현대적으로 하되 마룻바닥과 타일 뿐 아니라 문고리까지 최대한 원래 모습을 되살리는 방식으로 5년 동안 틈틈이 샤토를 수리했다. 집 안은 프랑스 시골 마을의 벼룩시장과 골동품점을 돌아다니면서 장만한 가구와 소품으로 채웠다.
집을 찾아보기 위해 파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이 유럽에서 가장 큰 골동품 시장인 생투앙Saint Ouen이었을 정도로 나는 빈티지와 앤티크에 매료되었다. 가장 좋아하는 곳은 브로캉트brocante와 비드그르니에vide grenier다. 주말이나 공휴일에 마을 중심부에서 열리는 비드그르니에는 ‘다락을 비운다’라는 뜻이다. 필요 없는 물건을 정리한다는 차원에서 좋은 물품을 헐값에 팔아버리는 동네 사람들이 많을 뿐 아니라 근처 골동품상 등도 참여해 합리적인 가격에 좋은 물건을 구할 수 있다. 여행자 입장에서는 날짜를 맞추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비드그르니에에 간다면 정말 횡재한 기분이 들 수도 있다.
나는 여전히 집을 꾸미는 데 필요한 물건을 구하기 위해 꽤 먼 곳에 있는 벼룩시장과 골동품시장에 다니며 여행 아닌 여행을 한다. 주말마다 이 마을 저 마을에서 열리는 시장에 다니며 소소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도 프랑스 시골에 살며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우리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도 골동품시장과 벼룩시장, 여러 문화 행사 등이 열린다. 아침에 빵을 사러 가기도 하고 은행 업무를 보러 가기도 하는 라세레샤토Lassay-les-Châteaux는 프랑스인들이 가장 살고 싶은 마을 3위에 뽑힐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개성 있는 작은 마을petite cité de caractère’로 선정된 곳이자 프랑스 소설가 빅토르 위고가 잠시 머물다 간 민박집도 자리한다. 잘 보존된 15세기 고성이 여전히 남아 있는 중세 시대 마을이기도 하다.
이처럼 내가 좋아하는 모든 마을을 안내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그중 몇 군데만 골라 소개하고자 한다. 다음엔 어느 곳을 가볼까 하는 행복한 고민에 휩싸이는 동시에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이 품은 매력에 빠져드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으리라.
노르망디 숲속의 온천 마을, 바뇰드로른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노르망디의 작은 온천 마을, 바뇰드로른Bagnoles de l’Orne에서는 1년에 두 번, 5월과 9월에 노르망디에서 가장 큰 벼룩시장이 열린다. 경마장이 시작되는 바뇰드로른에서 옆 마을인 생미셸데안덴Saint-Michel-des-Andaines까지 연결되는 왕복 6km 길이의 도로를 막고 시장이 들어선다. 해마다 2000여 명의 인근 주민과 프랑스 전역에서 몰려드는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보통 일요일에 열리는 브로캉트와 달리 주말 이틀 동안 이어지며, 두 마을을 잇는 거리는 그야말로 축제의 장으로 변모한다. 처음 집을 구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운 좋게 알게 되어 이곳에서 많은 물건을 구매했을 뿐 아니라 인근 골동품상과도 여전히 교류하고 있다. 내가 찾는 물건이 나타나면 바로 연락을 주는 프랑스 친구들이 생기기도 했다.
바뇰드로른 마을 중앙에는 아름다운 풍경의 작은 호수가 하나 있고, 호수 주변으로는 크고 작은 집들과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이곳의 온천물이 각종 부인병과 관절염, 혈액순환계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마을에는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시설을 갖춘 호텔이 많은 데다 골프 코스는 물론, 경마장, 영화관, 카지노까지 갖추어 프랑스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은 휴양지로 꼽힌다. 숲속에 위치한 미쉐린 레스토랑을 비롯해 호숫가에 꽤 훌륭한 프렌치 식당도 즐비하다. 레스토랑에서 바라보는 호수 정면으로는 마치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나오는 호텔 처럼 생긴 근사한 건축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1898년 최첨단 시설로 문을 열었던 이 그랜드 호텔Le grand hotel은 벨에포크 시대를 상징한다. 당시 노르망디 시골 마을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엘리베이터 설치는 물론, 200 개나 되는 객실과 루이 16세 스타일로 꾸민 화려한 다이닝룸과 티룸 등 그야말로 초호화 호텔이었다고 한다. 당대의 유명 인사와 정치인은 물론 루마니아 왕과 벨기에 왕까지 이곳을 찾아 온천을 즐겼다고 하니 그 위세를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이곳은 1차 세계대전 때 병원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독일군의 사령부로 쓰이며 연합군에 의해 폭격을 맞는 등 그 화려한 모습을 잃어갔다. 지금은 아파트로 개조되어 주거지로 사용되고 있다고.
프랑스 부르주아들에게 인기 있는 휴양지였던 바뇰 마을에는 그랜드 호텔 외에도 화려했던 벨에포크 시대를 상징하는 교회와 주택이 다수 남아 있다. 갑옷을 두른 듯한 기둥 모양의 지붕과 붉은 벽돌,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한 아름다운 창문과 철제 발코니를 가진 저택은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지금은 마을의 시청으로 사용되고 있는 샤토도 있는데 이곳의 넓은 정원은 누구든 이용할 수 있다. 날씨 좋은 날 가벼운 소풍 장소로 즐겨찾는 곳이기도 하다. 관광안내소 뒤쪽에 위치한
광장 플라스 두 마르셰place du marché는 토요일 아침이면 시끌벅적한 주말 시장이 된다. 농장에서 갓 수확한 각종 과일과 채소를 비롯해 신선한 생선과 치즈, 인근 마을에서 손수 만든 노르망디 사과주인 시드르cidre 등을 살 수 있다. 특히 정육점 트럭의 주인장 아저씨가 직접 만든 소시지에는 특별한 풍미가 담겨 있다. 이 광장은 1년에 두 번씩 열리는 골동품 시장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벼룩시장에서 구해온 식기들과 애닉의 골동품점에서 발견한
포크와 나이프, 은촛대에 꽃을 더해 식탁을 장식한다.’
파스칼의 골동품점
주비니수안덴Juvigny-sous-Andaine 마을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오고 조금 지나지 않아 ‘앤티크’라고 쓰인노란 간판이 나타난다. 화살표를 따라가면 ‘태양왕’이라는 골동품점에 도착한다. 커다란 가구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곳인데 파스칼Pascal이 30년째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 집의 침대와 옷장 같은 가구를 구해주고, 서재의 한 벽면을 멋지게 장식한 책장을 제작해준 주인공이기도 하다. 프랑스 사람들도 잘 모르는 아주 작은 시골 마을에서 나 같은 한국인을 만나는 일은 그의 인생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라며 신기해한다. 내가 얼마나 작은 프랑스 마을에 살고 있는지 실감하게 된다.
루이 15세 스타일 침대, 복도의 샹들리에, 거울, 의자 같은 우리 집의 대부분 덩치가 큰 가구들은 모두 파스칼이 구해준 것들이다. 2차 세계대전 때 어느 미군 병사가 가져온 듯한 커다란 트렁크는 커피테이블로 사용하고,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는 노르망디의 전통 장Normandy Armoire은 100년이 훨씬 넘는 세월 동안 누군가의 혼례장이었던 옷장에서 지금은 프린터와 여러 가지 사무용품을 넣어두는 작은 사무실 역할을 한다. 낡은 물건에 새로운 삶과 역할을 만들어줄 수 있어 보람차다. 벽난로 앞에 놓인 루이 16세 스타일의 소파베드는 어떤 유명한 작가가 잠깐 낮잠을 잤을지도, 아니면 어떤 귀부인의 살롱에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우리 집 거실에 자리 잡고 있다. 루이 15세 스타일의 블루 소파는 벨기에 친구가 프랑스까지 가져다준 것이다. 아주 값비싼 골동품은 아니지만 100년 이상 된 이런 가구들은 가족과 손님들이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데다 내가 원하던 스타일의 리빙룸을 완성하는 데 알맞았다.
애닉의 골동품점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신비한 성처럼 보이는 수도원인 몽생미셸Mont-Saint-Michel은 중세 시대부터 유럽에서 가장 주요한 순례지였다. 전설에 따르면 몽생미셸의 역사는 708년 대천사 미카엘Michael이 오베르Aubert 주교의 꿈에 세 번이나 나타난 후 시작되었다고 한다. 성 미카엘이 몽톰브Mont-Tombe(몽생미셸의 옛날 이름)라는 섬에 자신을 기리는 성소를 지어달라고 부탁했기에 지금의 몽생미셸이 있게 되었다. 노르망디를 여행하는 프랑스 현지인뿐 아니라 프랑스를 방문하는 여행자가 파리 다음으로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이다. 운이 좋게도 우리 집은 몽생미셸에서 1시간 30여 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기에 언제든지 가고 싶을 때 방문한다. 몽생미셸을 눈앞에 두고 점심식사를 하거나 여유 있게 커피 한잔을 할 수 있는 그런 곳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 몽생미셸로 가는 길에 크고 작은 프랑스 마을을 지나면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골동품점과 브로캉트 숍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몽생미셸이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올 때쯤이면 멋들어지게 만든 커다란 ‘브로캉트’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대저택을 연상케 하는 몇 채의 건물과 웅장한 철 대문을 지나면 도대체 어디에 쓰였던 물건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물품과 낡은 가구들로 뒤죽박죽한 노천 창고를 만나게 된다. 쓰레기 적재장을 연상하게 하는 곳을 지나면 200년은 족히 되었을 듯한 고풍스러운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곳에서 4대째 내려오는 가업이라고 자랑하며 40년째 온갖 골동품을 팔고 있는 주인아주머니 애닉Annick이 상냥하게 맞아준다. 그야말로 타임머신을 타고 프랑스의 모든 시대를 왔다 갔다 하며 과거의 물건들을 구경할 수 있는 뒤죽박죽한 박물관 같은 곳이다. 여기서 저렴하면서도 멋진 은 제품과 오래되었지만 특이하면서도 상태가 좋은 그릇을 구할 수 있다. 내가 자주 사용하는 포크와 나이프, 그릇들도 이곳에서 찾아온 보물이다.
프랑스 시골의 샤토를 구매했을 때도 ‘내가 집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집이 나를 선택해준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집을 꾸미기 위해 벼룩시장과 골동품점을 돌아다니며 인연을 맺은 물건들도 ‘물건들이 나를 선택해준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스친다. 누가 언제, 어떻게 썼는지 모르는 물건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 묘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낡은 물건들이 주는 감성은 현대의 기성품에서는 찾을 수 없는 특별함이 있다. 1850년대에 지어진 집을 고치는 동안 그 시대에 어울리는 가구와 소품으로 집을 장식해보겠다는 고집스러운 마음으로 복도를 미술관처럼 꾸미는 데 필요한 대형 액자를 찾기 위해 파리의 골동품 경매장을 왔다 갔다 하기도 했고, 다이닝룸의 벽을 장식한 앤티크 접시들과 샹들리에를 구매하고자 멀리는 벨기에까지 다니며 우연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나만의 골동품을 찾는 여정은 낭만적이다. 새로운 가구와 장식품을 만나기 위해 앞으로도 나의 골동품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또 어떤 인연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한껏 기대를 품으며.
허은정은 패션, 텍스타일, 인테리어 스타일링을 하는 라이프스타일 디자이너다.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협업해 프랑스 문화 및 여행 콘텐츠를 만드는 동시에 한국 문화와 음식을 프랑스에 소개하고 있다. ‘죽기 전에 오래된 낡은 집을 고쳐 살아보기’라는 꿈을 실현하며, 그 과정을 담은 〈나는 프랑스 샤토에 산다〉라는 책을 펴냈다. 거주 중인 샤토를 전시 공간 또는 워크숍 장소로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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