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인 사고가 끊이지 않는 뉴욕에서 여정 내내 대체 불가한 경험을 하게 되는 여행자들. 할렘에서 갤러리를 둘러보다가 차이나타운에서 칵테일을 홀짝이고, 맨해튼이 내려다보이는 섬에서 캠핑을 즐겨본다.
도시에 스며든 음식
뉴욕의 푸드 신은 오랜 기간에 걸쳐 이주한 이민자들에 의해 형성되어왔다. 곳곳에서 풍기는 다채로운 음식의 냄새 속에서 도시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다.
글. 데이비드 팔리
뉴욕은 음식으로 역사를 이룬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시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꾸준하게 밀려든 이민자들이 그들의 고유한 음식을 새로운 터전에 맞게 변형해온 이야기가 들려온다.
영화에 등장하는 뉴욕은 언제나 길거리 노점에서 파는 핫도그로 상징화되곤 한다. 빵 사이에 따뜻한 물에 담가 놓았던 프랑크푸르트 소시지를 끼운 다음 머스터드소스를 다소 지저분하게 뿌려 주는 요리 과정에 현지인들은 핫도그를 ‘더티 워터 도그(더러운 물개)’라 부르기도 한다. 핫도그가 언제 탄생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아마도 1840년대에 이 땅에 도착한 독일인들이 튜브 모양의 소시지를 판매한 것이 시초가 아닐까 추측한다. 가장 유명한 노점상은 1916년부터 코니아일랜드Coney Island에서 소시지를 팔아온 네이선스 페이머스인데, 특히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7월 4일이면 핫도그 먹기 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인파로 인근이 붐빈다. 참고로 네이선스 페이머스는 센트럴파크 서쪽에서도 분점에 해당하는 노점상을 운영 중이다. nathansfamous.com
19세기 중반에는 폴란드계 유대인들이 뉴욕에 도착하면서 미국에 처음으로 베이글을 소개했다. 수십 년 동안 쫄깃한 고리 모양 빵은 유럽계 유대인들의 집단 거주 구역에서만 맛볼 수 있었다. 1909년, 상호에 선스(아들)가 아니라 도터스(딸)를 붙인 미국 최초의 상점인 러스 앤 도터스가 로어이스트사이드에서 베이글을 구우며 이 빵의 팬층은 한결 두터워졌다. 러스 가문은 지금도 같은 장소에서 베이글 반죽을 치대고 있으며 외벽에 걸린 네온사인과 폭이 좁은 내부, 나란히 선 유리 진열장 역시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시그너처 빵은 크림치즈와 록스lox(연어 절임)를 듬뿍 넣은 베이글이다. russanddaughters.com
베이글이 뉴욕에 등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리투아니아 출신의 도축업자 서스만 볼크Sussman Volk가 또 다른 음식의 돌풍을 일으켰다. 1888년, 볼크는 로어이스트사이드에 자리 잡은 그의 델리에서 루마니아 이민자에게 얻은 훈제 파스트라미 레시피를 접목한 풍미 깊은 고기를 판매했다. 이 고기는 입소문을 타고 퍼져 이듬해에 폴란드 출신의 모리스Morris와 하이만 아이슬란드Hyman Iceland 형제가 캇츠 델리카트슨을 오픈하도록 부추긴다. 형제가 볼크에게서 어떻게 레시피를 얻었고, 또 어떻게 몇 블록 떨어지지 않은 곳에 동종의 델리를 열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훈제 파스트라미는 출시 첫날부터 성공적이었고, 볼크의 델리는 오늘날에도 입을 한껏 벌려야 할 만큼 큰 파스트라미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다. 1989년에는 캇츠 델리카트슨이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촬영지로 주목을 받게 된다. 이곳에 가면 맥 라이언이 오르가슴 연기를 하는 포스터가 요란하게 붙어 있다. katzsdelicatessen.com
캇츠 델리카트슨에서 북쪽으로 몇 블록 떨어진 거리에는 런던의 찹하우스(구운 고기를 파는 레스토랑)를 차용한 킨스 스테이크하우스가 개업을 했다. 이 스테이크하우스의 단골손님들은 마블링이 훌륭한 양갈비를 주로 미디엄-레어 스테이크로 구워 달라 요청한다. 17세기부터 이어져온 영국의 전통에 따라 레스토랑 내부에는 파이프 담배가 보관되어 있으며 손님들은 자유롭게 이 파이프를 피울 수 있다. 천장에 대략 5만 개의 파이프가 걸려 있다고 한다. keens.com
19세기 후반에 무려 400만 명의 남부 이탈리아인들이 엘리스섬Ellis Island의 이민국을 통과했고 이때 피자도 함께 입국했다. 1905년, 제나로 롬바르디Gennaro Lombardi가 리틀이탈리아Little Italy에 미국 최초의 피자 전문점을 열었다. 그의 피자는 숯으로 불을 땐 오븐에 구운 덕분에 도우가 유독 바삭했는데 이런 특징이 이후에 뉴욕식 피자의 초안이 되었다. 또한 체크무늬 식탁과 벽면마다 가득한 가족사진 등 롬바르디 피자 전문점은 정통 피제리아의 면모를 두루 갖추고 있다. firstpizza.com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 뉴욕은 계속해서 요리의 경계선을 넓혀가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저명한 레스토랑 중 하나인 일레븐 매디슨 파크의 스위스 출신 오너 셰프인 대니얼 험Daniel Humm이 “레스토랑의 메뉴를 완전히 채식으로 바꾸겠다” 발표했던 2021년 무렵 현지인들의 눈초리는 따가웠다. 하지만 그의 레스토랑은 채소로 만든 걸작에 가까운 요리를 코스로 선보이며 당당하게 미쉐린 스타를 세 개나 획득했다. 뉴욕이 혁신의 도시임이 다시 한번 증명된 셈이다. elevenmadisonpark.com
도시의 아찔한 각도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부터 브루클린 다리까지 뉴욕에는 화려한 전망대가 즐비하다. 그중 북적임이 덜한 도시의 색다른 각도를 조명한다.
글. 어맨다 캐닝
허드슨 야드의 에지
허드슨 야드Hudson Yards의 에지Edge가 여행자들에게 스릴 넘치는 감각을 선사한다. 30번지 건물의 100층에서 허공으로 뻗어나간 야외 스카이 데크가 이미 여타 초고층 건물과는 다른 전망으로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그러나 335m 높이의 에지는 상대적으로 관심도가 낮아 줄을 서지 않아도 된다. 남쪽으로는 맨해튼의 초고층 건물들과 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두드러지고 서쪽으로는 뉴저지가 펼쳐진다. 발아래 유리 바닥을 통해 뉴욕의 거리를 수직으로 내려다볼 수도 있다.
보다 짜릿한 경험을 원한다면 시티 클라임City Climb을 예약해보자. 안전 사항을 숙지한 뒤 보호 장비를 착용하고 건물을 둘러싼 레일에 몸을 맡긴다. 개방된 플랫폼에 발을 내딛는 순간 뉴욕 상공의 바람에 압도되는데 점차 소인국처럼 보이는 도시의 풍경에 적응이 된다. 레일을 따라 위로 이어진 철제 계단을 오르고 나면 꼭대기에 마지막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지상 365m 높이의 작은 테라스에 서서 동료 클라이머들의 응원을 받으며 난간 밖으로 몸을 기울이는 것! 입장료는 약 5만원이며, 시티 클라임은 약 25만원이다.
edgenyc.co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정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찾는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훌륭한 상시 컬렉션 혹은 반 고흐나 칼 라거펠트 특별전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이와 비례하게 흡인력 있는 관람 포인트가 1층 엘리베이터를 타고 들어갈 수 있는 루프톱인 칸토르 정원Cantor Garden에 존재한다. 관람객이 드문 이곳은 마치 프라이빗한 전시관처럼 느껴진다. 정갈하게 가꿔진 덤불을 지나쳐 설치미술 작품과 야외 바 너머로 센트럴파크와 로어웨스트사이드의 건물들이 예술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입장료는 약 4만원.
metmuseum.org
스태튼아일랜드 페리호
미처 자유의 여신상 투어를 예약하지 못했다면 스태튼아일랜드 페리Staten Island Ferry가 또 하나의 방법이 되어줄 것이다. 심지어 탑승료가 무료이니 꽤 매력적인 차선책이다. 맨해튼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배터리 파크Battery Park에서 출발하는 이 주황색 배는 25분 동안 항만을 건너 엘리스섬 앞을 유유히 지나간다. 나른한 통근자들은 페리 내부의 나무 벤치에 앉는 반면, 여행자들은 갑판을 신나게 오가며 조망 지점을 찾는다. 덩달아 신나게 날아다니는 갈매기들 틈으로 파이낸셜디스트릭트Financial District의 초고층 건물들, 뉴저지와 브루클린의 스카이라인, 그리고 자유의 여신상을 근거리에서 목도할 수 있다.
siferry.com
57번 부두의 시장
첼시Chelsea와 그리니치Greenwich가 있는 목가적인 맨해 튼 서쪽 지역과 달리 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단절된 허드슨 강변의 부두는 여행지로 흥미로운 곳은 아닐 지도 모른다. 그러나 57번 부두 1층에 들어선 푸드 마켓이 여행자에게 신선한 시각을 부여한다. 먼저 할렘양조장에서 만든 맥주와 엠파나다empanada를 먹은 다음 푸드 마켓 위로 올라가 8093m² 면적의 루프톱 공원을 향유해본다. 수많은 벤치 중 하나에 편히 앉아 토마스 헤더윅Thomas Heatherwick이 설계한 인공 섬 공원인 리틀 아일랜드Little Island나 허드슨 야드에 빠른 속도로 지어지고 있는 초고층 건물들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pier57nyc.com
레드훅 와이너리
대부분의 각도에서 뉴욕을 봤다 자부하더라도 레드훅의 각도는 익숙하지 않을 테다. 어퍼 뉴욕 베이Upper New York Bay와 맞닿은 브루클린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레드훅은 수십 년간 방치되었다가 최근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옛 창고와 공업 건물들이 갤러리와 바비큐 레스토랑 그리고 위스키 양조장으로 탈바꿈했다. 항만을 따라 걷다 보면 자유의 여신상이 슬쩍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스트롱 로프Strong Rope 브루어리에 놓인 피크닉 테이블에서 IPA를 한 잔 주문하거나 레드훅 와이너리의 바깥 부두에서 리슬링 와인을 즐겨보자.
strongropebrewery.com, redhookwinery.com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섬으로
로어 맨해튼에서 페리를 타고 금세 다다른 섬에서는 자동차를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시골의 고즈넉한 풍광만이 반복될 뿐이다.
글. 어맨다 캐닝
거버너스 아일랜드Governors Island 페리 터미널에 도착한 배에서 쏟아져 내린 승객들의 만면에 기대감에 찬 미소가 번져 있다. 이들은 맨해튼에서 출발하여 물을 건너는 8분 동안 앞으로의 여정을 방해할 만한 잡념들을 제거해왔을 것이다. 선글라스를 끼고 가방을 어깨 뒤로 넘긴 승객들은 안내판에 있는 지도를 확인하고 저마다의 길을 나선다.
오로지 햇살 아래에서 양손에 차가운 맥주와 타코를 든 채 느긋한 여유를 즐길 요량으로 15m 거리의 멕시칸 레스토랑으로 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부지런히 피크닉 바구니와 빨간색 자전거를 빌려서 차 없는 섬 곳곳을 유유히 누비는 이들도 있다. 혹은 곧장 QC NY 스파로 가서 흰색 가운을 입고 스파 내의 휴식처와 사우나와 수영장을 순회하기도 한다.
오래전 군대의 막사로 쓰였던 스파와 주변 땅의 형태를 통해 과거에 섬이 어떤 모습이었을 지 가늠해본다. 69만m² 규모의 섬은 200년 넘게 미 육군의 요새였으며 당대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군인들과 가족들이 머물렀던 밝은 노란색 오두막과 지휘관의 직위에 걸맞게 웅장한 장군의 저택, 그리고 나무판자로 만든 예배당과 빨간 벽돌로 지은 극장 등이 인상적이다.
2003년, 돌연 거버너스 아일랜드 내에서의 거주가 금지되면서 많은 건물들이 차츰 폐허가 되어갔다. 다행히 섬의 미래가 암울하지만은 않다. 공공미술 프로젝트, 지속 가능한 여행, 소박한 숙박 체험에 중점을 둔 재단이 섬의 운영을 맡으면서 최근 몇 년간 섬이 활기를 띠고 있다. 새로운 사업체 중 하나인 빌리언 오이스터 프로젝트Billion Oyster Project는 뉴욕항 일대의 굴밭을 회복시키는 활동을 하고 있고, 서큘러 이코노미 매뉴팩처링Circular Economy Manufacturing은 태양에너지로 도시의 플라스틱 쓰레기를 화분이나 조명 같은 제품으로 재활용하는 사업을 진행 중이다.
컬렉티브 리트리트Collective Retreat 또한 가장 먼저 입도한 사업체 가운데 하나이다. 섬의 서쪽 끝 주차장이었던 자리에 공용 화장실을 둔 사파리 텐트부터 벽난로와 샤워실을 갖춘 목재 빌라까지 다양한 글램핑 숙박 시설이 세워졌다. 어떤 숙소를 선택하든 투숙객들은 맨해튼의 스카이라인과 자유의 여신상이 전부 보이는 전망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대부분의 시간을 야외 데크에서 보내게 될 테다. 스태튼아일랜드 페리호의 고동 소리와 제비, 휘파람새, 재갈매기 등이 지저귀는 소리가 이곳의 유일한 배경음악이다. 부드러운 바람에서는 매연이 아닌 소금기가 느껴진다. 좀 더 역동적인 활동을 원한다면 토끼풀이 자란 잔디에서 하는 젠가 게임이나 야구 정도가 알맞겠다.
해가 지고 일부 승객들이 마지막 페리호를 타고 돌아가면 섬에는 컬렉티브 리트리트에 묵는 이들만 남게 된다. 낮보다 한층 깊어진 고요가 섬에 내려앉는다. 야구 모자를 착용한 총지배인 페이지 카터Paige Carter는 이곳에서 1년 넘게 일하고 있지만 날마다 섬 특유의 분위기에 감탄한다고. “도시에서 불과 몇 분 거리에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워요.” 하늘이 분홍색과 호박색으로 번져가는 석양과 섬 너머의 물을 응시하면서 그녀가 덧붙인다. “마치 금지된 섬에 자발적으로 갇힌 듯한 기분이 들어요.”
투숙객 중 70%는 도심에서 건너온 뉴요커들이고 이들은 자주 섬을 들락거린다고 한다. “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도시로 출근하기도 해요.” 투숙객들은 캠핑장의 투박한 멋에 이끌려 이곳에 오곤 하지만, 텐트와 빌라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는 전혀 투박하지 않다. 선셋 칵테일 아워가 되면 직원들은 투숙객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눌 만한 자리를 마련해두고, 저녁 만찬으로는 테라스에 준비된 오픈 키친에서 수박 샐러드와 구운 가시발새우 페투치니 파스타 등을 대접한다.
투숙객들은 식사 도중 잠시 눈을 들어 맨해튼의 야경과 짙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자유의 여신상의 횃불을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밤의 하이라이트는 모닥불에 구운 스모어와 풀밭에서 깜박거리는 반딧불 그리고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수많은 별처럼 소박한 행복이다. 사파리 텐트의 경우 1박에 약 28만원부터.
collectiveretreats.com, govisland.com
*** 더 많은 기사는 <내셔널지오그래픽 트래블러> 12월호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