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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PLORING SAPA
사파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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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01월호

간혹 안개가 걷히며 아름다운 민낯을 보여주는 산속 도시 사파부터 억겁의 시간 동안 흐르는 강물이 빚어낸 천혜의 풍경을 품은 닌빈 그리고 자연 위에 역사와 전통이 촘촘히 얽혀 있는 하노이를 관통하며 마주한 신비로운 이야기들.

인도차이나의 지붕으로 불리는 판시판의 풍경.

사파의 안개 속으로

구름을 헤치고 찾은 것들

해발고도 1650m에 위치한 산악 도시 사파는 언뜻 보면 판시판Fansipan을 오르기 위한 베이스캠프처럼 느껴진다. 이 도시에 머무는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판시판을 오를 사람과 이미 오른 사람. 전자인 나는 판시판에 오르기 위해 산악 기차를 타러 간다. 산 정상에 가려면 세 가지 관문을 지나야 한다. 먼저 산악 기차를 타기 위해 사파의 랜드마크인 선 플라자Sun Plaza로 간다. 프랑스 양식으로 건축된 건물에 영국의 빅벤에서 영감을 받은 시계가 걸려 있는 선 플라자 앞에는 인증 사진을 남기려는 여행객들로 가득하다. 건물 지하에 위치한 기차역에서 산악 열차를 타고 약 10분 정도 이동하자 케이블카 정류장인 므엉호야Muong Hoa 역에 도착한다. 그런 다음 두 번째 관문인 케이블카를 타러 가야 하지만, 정류장에 놓여 있는 기네스 인증서 앞에서 모두 발걸음을 멈춘다. ‘출발 지점과 도착 지점의 고도 차이가 가장 큰 케이블카’라는 세계 기록을 보유한 판시판 케이블카는 단 15분 만에 해발 3143m로 안내한다. 2006년 이 케이블카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산을 등반하는 데 꼬박 10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산등선을 따라 길게 뻗은 케이블카 줄만 봐도 아찔하지만, 나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안개가 자욱해 케이블카 창문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판시판을 향해 달리는 산악 열차.

하얀 안개 속에서 고산지대의 장엄한 풍경과 그곳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의 마을을 상상할 뿐이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마지막 관문인 모노레일을 타고 금세 정상에 도달했지만, 안개는 여전히 걷힐 기미조차 없다. “판시판의 맑은 날씨는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말이 있어요.” 가이드인 만Manh이 아쉬운 듯 말하며 이전에 찍은 판시판의 경관 사진을 보여준다. 산자락에 붉은 꽃들이 피어 있는 봄부터, 눈이 소복이 쌓인 겨울까지 모든 계절은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시내에 비해 낮은 기온 속에서 따뜻한 핫초코 한 잔을 마시며 구름 속을 누비며 바라본 판시판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정상에 위치한 불교 사찰인 바오 안 사찰과 빅반 사찰은 안개 속에 숨어 있어 더욱 성스러워 보인다. 건물 위에는 거대한 불상의 얼굴이 떠 있다. 아파트 7, 8층 높이에 맞먹는 21.5m의 거대한 불상은 불상의 재료인 구리 본연의 색을 남겨 다른 불상들과는 달리 검은색에 가까운 모습이다. 불상 내부는 반짝이는 대리석과 황금색 불상으로 꾸며져 있으며, 그 앞에서 사람들은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린다. 구름에 감싸인 판시판에서 사람들의 소망이 가득한 이곳만이 유난히 환하게 느껴진다.

판시판 종탑.

사파를 이루는 모든 것

사파는 원래 수십 개의 소수민족이 흩어져 살고 있던 곳으로, 19세기 후반 프랑스가 베트남을 통치하던 시기에 개발되기 시작했다. 각 민족은 12개의 산이 이어지는 호앙리엔산맥에 흩어져 있지만, 시내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반메이Ban May 마을에서 그들의 문화를 한 번에 경험할 수 있다. 반메이 마을은 사파 지역에 살고 있는 11개 소수민족 전통의 주거지를 복원하여, 실제로 주민들이 거주하는 마을이다. 독특한 빨간색 의복을 입은 레드다오족Red Dzao은 특유의 옷감에 수를 놓고, 그 옆에 있는 다른 민족의 집에서는 이국적인 멜로디의 피리 소리가 흘러나온다.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각 민족의 삶의 방식이 여전히 평화롭게 이어지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몽족Hmong의 집에 방문한 나는 이 지역에서 수확한 쌀과 사과로 만든 전통주 르어우타오메이RƯỢU TÁO MÈO를 한 잔 마셨다. 한국의 전통 소주처럼 쿰쿰한 누룩 냄새 속에서 사과의 달콤함이 피어 나왔다. 이 외에도 각 민족의 집에서 베트남 고산지대에서 주로 먹는 찰밥 만들기나 바구니 짜기 등의 체험이 진행된다. 반메이 마을의 레스토랑에서는 몽족의 전통적인 음식을 제공한다. 민물에서 잡히는 철갑상어 샤브샤브, 죽순 볶음, 호박 속에 넣고 찐 오골계 등 산에서 채집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든 요리를 선보인다. 한편, 사파 시내에 있는 레드다오족의 전통적인 수상 가옥을 재현한 레드다오 하우스Red Dzao House는 지역 특산품을 가지고 요리한다. 무지개송어구이를 한 입 먹은 뒤 이 지역에서 생산한 에일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니 판시판을 오르내리며 쌓인 피로가 한순간에 풀리는 기분이었다.

레드다오족의 전통 요리를 제공하는 레드다오 하우스.

사파에서는 소수민족들의 전통 가옥과 함께 프랑스식으로 지어진 건축물도 쉽게 보인다. “이 도시는 프랑스 사람들에 의해 여름철 휴양지로 개발되었어요. 베트남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유독 프랑스식 건축물이 많은 이유죠.” 만의 말대로, 1900년대 초반에 지어진 사파 노트르담 성당을 비롯해 프랑스풍 건축물이 즐비하다. 내가 머물 호텔 드 라 쿠폴-엠 갤러리 사파Hotel de la Coupole-M Gallery Sapa 또한 마찬가지다. 판시판행 산악 열차가 탑승하는 선플라자와 연결된 이 호텔 내부는 프랑스의 최고급 맞춤복 스타일인 오트 쿠튀르에 레드다오족의 전통문화가 더해져 완성됐다. 코듀로이, 모헤어, 레이온 등 옷감의 이름을 붙인 객실은 프랑스의 르네상스 시대를 연상시키는 인테리어로 꾸몄으며, 레드다오족의 모자에서 영감을 받은 조명과 수공예품들로 장식되었다.

반메이 마을에 거주하는 소수민족들은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유지한다.

 


사파에서 보내는 12시간


오꾸이호 고개 정상에 있는 천국의 문.
판시판 속 깟깟 마을의 풍경.

9 AM 아침 공기 즐기기
날씨가 좋은 아침이면 사파 시내 중심에 있는 호수 주변은 러닝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고산지대에 위치한 사파에서 뛰는 것이 어렵다면, 펼쳐진 산과 봉우리 위로 걸쳐진 구름, 다채로운 프랑스식 건물이 호수에 비쳐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걷는 것도 좋다. 호수 주변으로 카페들이 줄지어 있어 산책을 마친 뒤 코코넛이 들어간 커피 한 잔을 마시기에 완벽하다.

12 PM 역사를 맛보다
호수 근처에 있는 르 게코Le Gecko 레스토랑은 프랑스와 베트남의 문화가 어우러진 사파의 매력을 반영한 음식을 제공한다. 수프와 파스타 같은 프랑스 음식부터 쌀국수와 찰밥 같은 베트남 음식까지, 동서양을 넘나드는 다양한 요리를 즐길 수 있다. 음식에 곁들이는 음료도 다양해서 프랑스산 와인과 몽족이 생산한 이 지역의 사과 와인을 갖추고 있다.
legeckosapa.com

2 PM 깊은 전설 속으로
마을에서 오토바이를 빌려 호앙리엔산맥으로 달려보자. 오꾸이호O Quy Ho 고개는 해발 2000m 고도 위에 펼쳐진 50km 길이의 도로로, 고개를 넘으며 무성한 숲과 폭포 등 장엄한 자연을 감상할 수 있다. 이곳에 얽힌 전설은 고개를 더욱 흥미롭게 만든다. 전설에 따르면, 이 고개에 살던 오꾸이호가 사랑폭포에서 목욕하던 선녀를 보고 사랑에 빠졌고, 이를 알게 된 옥황상제가 오꾸이호를 거북이로 변하게 했으며, 선녀는 봉황이 되어 고개 꼭대기에 머물렀다고 한다.

4 PM 마을의 주민이 되다
19세기 중반부터 몽족이 거주한 깟깟 마을은 계단식 논과 웅장한 산, 전통 방식으로 지은 독특한 목조 건축물들이 여행자의 발길을 이끈다. 이곳에서 전통 의상을 빌려 입고, 주민들이 만든 떡과 술을 마시며 전통 춤을 추다 보면 이국적인 마을에 동화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일몰 무렵엔 깟깟폭포와 계단식 논이 주황 빛으로 물드는 장관이 펼쳐진다.

6 PM 입과 눈을 모두 만족시키는 식당
사파 스카이 뷰 레스토랑&바에서 베트남의 스위스라고 불리는 멋진 전망을 바라보며 식사를 즐겨보자. 민물 생선이나 오골계로 만든 전골에 칵테일을 곁들여 해가 저물어가는 사파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레스토랑은 차우 롱 사파Chau Long Sapa 호텔과 건물을 공유하고 있어 밤늦게까지 시시각각 변하는 사파의 풍경을 보면서 하룻밤을 보내기에도 좋다.
facebook.com/skyviewrestaurantsapa

9 PM 해가 져도 빛나는 사파
매일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한낮의 햇빛으로 가득했던 사파는 화려한 네온사인 불빛으로 물든다. 사파 호수 옆에 있는 사파 야시장은 현지에서 제작한 수공예품과 직물들을 구경하며 스카프, 모자, 퀼트 가방 같은 기념품을 구매하기 좋은 곳이다. 구경하다 지칠 때면 옥수수와 고구마, 말고기 같은 고산지대에서 얻을 수 있는 식재료로 만든 꼬치구이를 먹어보자.

판시판 속 깟깟 마을의 풍경.

 

필수 여행 정보

하노이에서 사파까지는 어떻게 이동하나?
하노이 노이바이공항에서 사파까지는 기차나 버스를 이용해 이동한다. 기차를 탈 경우 하노이역에서 라오까이역Ga Lao Cai까지 약 7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이후 사파 시내까지는 버스나 택시를 이용한다. 버스를 탈 경우 하노이에서 사파 시내까지 단번에 이동할 수 있으며, 약 6시간 소요된다. 기차와 버스 중엔 침대를 갖춘 것도 있어 새벽에 이동하면 숙박비를 절약할 수 있다.

어디에서 머무는 것이 좋은가?
사파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개발된 휴양지로, 시내에는 유럽식 호텔들이 많다. 하지만 사파에서만의 독특한 경험을 원한다면, 현지 주민들이 실제로 거주하는 집에 머무는 홈스테이를 고려해보는 것도 좋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지만 현지인과 함께 생활하며 현지식을 맛보고, 테라스에서 대자연을 만끽하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다.

각 관광지를 이동할 때는 어떻게 하나?
사파에는 관광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 있어 택시를 이용하기 쉽다. 시내에서 오토바이를 렌트해 산지를 탐험하며 고산지대의 맑은 공기를 온몸으로 느낄 수도 있다. 시내 곳곳에 오토바이 렌털숍이 있으며, 선글라스와 헬멧 등 필요한 장비도 함께 판매한다.

사파의 또 다른 즐길거리는 무엇인가?
계절마다 각 소수민족 마을에서 다채로운 축제가 열린다. 특히 따이Tay 민족이 음력 1월에 한 해의 풍작을 기원하는 쑹동Xuong Dong 축제에서는 전통 나팔 연주와 민속 공연이 펼쳐진다. 또한 사포족Xa Pho은 음력 2월 2일에 마을 전체의 나쁜 일을 쫓아내기 위해 마을 청소Quet Lang 축제를 여는데, 술과 농작물을 이용한 독특한 청소 의식을 볼 수 있다.

사파 야시장에는 산에서 재배한 구황작물과 베트남 전통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물에 떠오른 닌빈

흐르는 물 따라

사파에서 산악지대의 매력을 만끽한 뒤, 산에서 흘러가는 강물이 잠시 머무는 닌빈에서 물의 매력을 느껴보자. 사파에서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8시간을 달려 닌빈에 도착한다. 닌빈은 석회암 지대가 대부분이라 강물이 땅을 침식하면서 수직 절벽과 수많은 동굴을 이룬 카르스트 지형이 형성된 곳이다. 이곳에는 3만 년 전부터 인류가 거주했던 흔적이 발견된 짱안 경관 단지Tràng An Scenic Landscape Complex가 있는데, 수려한 자연과 유서 깊은 역사를 모두 인정받아 2014년에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짱안 경관 단지에 머무는 대부분의 사람은 짱안강 위에서 배를 타고 유유자적 흐르고 있었다. 나도 그 행렬에 동참하고자 나룻배에 올라탔다. 네 명이 탄 배의 선장은 베트남 전통 모자인 농Non을 쓴 여자 뱃사공이다. 앞으로 두 시간 동안 혼자 노를 저을 뱃사공에게 힘을 보태어보고자 배에 있던 여분의 노를 들고 저어봤지만 속도는 빨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팔만 저릴 뿐이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노 젓기를 멈추고 괜히 풍경을 바라보았다. 물살이 잔잔해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지만, 유심히 보면 물속에 헤엄치는 물고기와 절벽 위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가지, 그리고 강물 위를 지나가는 새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시간의 흐름이 모호하게 느껴져 더욱 신비로운 풍경이다. 머리가 닿을 듯이 낮은 수중 동굴을 몇 번 지나고, 거대한 절벽 사이를 통과하는 동안, 3만 년 전에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 또한 같은 풍경을 봤을지 생각해본다. 가늠되지 않는 시간에도 강물은 계속 흘렀고, 물의 흐름에 따라 이곳의 아름다움은 더욱 다듬어졌을 것이다.

짱안 경관 단지의 뱃사공과 나룻배.

이어지는 이 땅의 역사

3만 년 이상 이 땅에 거주해 온 사람들이 하나로 뭉친 것은 968년, 베트남 최초의 왕조인 딘왕조가 베트남을 통일하고, 닌빈에 있는 호아루Hoa Lu를 수도로 지정하면서부터다. 딘 왕조에 이어 레 왕조 역시 호아루를 수도로 유지했으며, 1010년 리 왕조에 이르러서야 현재의 하노이로 수도를 옮겼다. 첨성대와 불국사 등 수많은 역사 유적으로 가득한 경주를 떠올리며 호아루에 들어갔지만, 보이는 것은 널따란 공터뿐이었다. 수도가 하노이로 옮겨진 뒤로는 이곳이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한 요새로 사용되면서 대부분의 유적이 파괴되었다고. 지금 남아있는 것은 딘 왕조를 건립한 딘 띠엔 황Dinh Tien Hoang을 기리는 사원과 딘 왕조에 이어 레 왕조를 만든 레 다이 한Le Dai Hanh을 숭배하는 사원이 남아 있다. 딘 왕조 사원에 전시된 오래전 호
아루의 모습을 재현한 조형물을 보며 이곳이 번성하던 시기를 가늠해본다.
호아루의 번성했던 모습을 체험할 방법이있다. 2022년에 조성된 호아루 고대 거리Phố cổ Hoa Lư에 가는 것이다. 10세기의 건축과 문화, 역사를 복원하여 그 시절의 풍경을 재현한 거리로, 공예품과 전통 음식을 즐길 수 있다. 닌빈의 특산물은 이 지역의 수많은 석회암 산에서 풀을 뜯어 먹고 자란 염소고기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베트남 젊은이들이 이 거리에서 염소고기 전골을 즐기고 있었다. 오래된 역사가 깃든 휘황찬란한 거리에서 오늘날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미소는 더욱 빛을 발하는 듯했다.

조명으로 반짝이는 호아루 고대 거리의 밤.

“물살이 잔잔해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지만,
유심히 보면 물속에
헤엄치는 물고기와
절벽 위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가지,
그리고 강물 위를 지나가는
새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짱안 경관 단지에서는 배를 타고 카르스트 지형을 살펴볼 수 있다.

하노이를 누비며

행복을 남기는 기차

좁은 기찻길을 사이에 두고 펍과 카페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사람들은 가게 앞에 앉아 맥주나 커피를 즐기거나 기찻길 위에 올라가 순간을 사진으로 기록하기도 한다. 갑자기 커다란 종소리가 몇 번 울리자 기찻길 위를 가득 채운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양쪽 길로 피한다. 나도 사람들을 따라 한 카페로 자리를 피해본다. 카페 주인이 나에게 조금 더 들어가야 한다며 손짓한다. 나와 기찻길과의 거리는 불과 1.5m밖에 되지 않는다. 멀리서 달려오던 기차가 점점 커지더니 내 앞을 스치듯 지나간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 기차는 사파로 향하는 슬리핑 기차다. 하노이는 ‘강 안쪽’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강과 호수가 많아 지반이 약해 지하철을 만들 수 없어서 모든 기차가 지상으로 다닌다고 한다.
기차가 지나가고 나자 사람들이 기찻길로 나와 땅바닥을 뒤적이기 시작한다. 자세히 보니 병뚜껑을 찾는 중이었다. 기찻길에 병뚜껑을 올려놓고, 기차가 밟아 평평해진 병뚜껑을 행운의 부적으로 삼아 들고 다닌다고 한다. 기차가 지나간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다음 기차까지 2시간을 기다리는 대신 유명하다는 에그 커피를 주문해보았다. 에그 커피는 1946년 베트남 전쟁 중 귀해진 우유를 대신해 달걀노른자와 설탕을 섞어 만든 일종의 카페라테로, 내심 비릴까 걱정했지만 부드럽고 고소한 달걀과 씁쓸한 커피가 조화를 이뤘다.

철로 곁에서 기차가 오길 기다리는 사람들.

역사가 얽혀 있는 거리

높은 빌딩과 화려한 네온사인 간판이 가득한 하노이는 ‘잠들지 않는 도시’라고 불릴 만큼 밤낮으로 화려하다. 그러나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이 도시의 한적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하노이 올드쿼터는 하노이가 수도로 지정된 1010년에 세운 황궁인 탕룽 황성Hoàng thành Thăng Long 근처에 있다. 오래전 이 거리는 36개의 상인 조직이 구역을 정해놓고 상품을 팔았다고 하며, 그 영향으로 지금도 이곳의 골목들은 수공예품, 골동품, 비단, 신발 등 다양한 물건을 판매하고 있다.
다채로운 상점들이 그물처럼 얽혀 있는 이거리는 정신을 놓으면 길을 잃기 쉽다. 나는 올드쿼터를 둘러보기 위해 시클로Xích lô라는 교통수단에 올랐다. 시클로는 우리나라의 인력거와 비슷하지만, 운전자가 뒤에서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이동하기 때문에 경치를 구경하기에 좋다. 처음 출발할 때는 오토바이와 자동차, 상가의 가판대,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것에 긴장했지만, 숙련된 운전 솜씨에 금세 적응할 수 있었다. 베트남 전통 모자, 각종 불교 조각상, 불 위에서 구워지는 꼬치구이 등 흥미롭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내 마음을 모르는 시클로 운전사의 멈춤 없는 페달질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다양한 종교와 베트남 전통문화가 어우러진 응옥선 사당.

전설과 종교가 담겨 있는 호수

시클로 정류장은 올드쿼터 근처의 호안끼엠Hồ Hoàn Kiếm 호숫가에 있다. 바쁘게 흐르는 구도심 속에서 여유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호안끼엠은 한자로 환검還劍이라 쓰며, 검과 관련된 전설을 담고 있다. 후 레 왕조의 태조인 레러이Le Loi는 명나라와의 전쟁을 앞두고 호수에서 용왕의 보검을 얻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뒤 다시 호수를 찾았을 때 호수 중앙에 금빛 자라가 나타나 용왕이 보내어 이곳에 왔다고 말하며 검을 회수해 갔다고 한다. 호안끼엠 호수 중앙에 자라를 기리는 탑이 세워진 이유도 이러한 전설 때문이다. 호수에는 지금도 자라가 살고 있는데 그 크기가 거대하다고 전해진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호수에는 길이가 210cm에 달하는 자라 박제가 전시되어 있다.
호숫가에서 붉은색 다리인 테훅교Thê Húc Bridge를 건너 호수에 떠 있는 옥산섬으로 가면 13세기에 유교와 도교의 학자들이 원나라를 물리친 국가 영웅 쩐흥다오Trần Hưng Đạo를 기리기 위해 지은 응옥선 사당Đền Ngọc Sơn이 있다. 조상을 숭배하는 재단과 산신을 기리는 산신묘가 각각 유교와 도교의 느낌을 내는 한편, 사당 입구에 쓰여 있는 복福과 연緣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지붕에 있는 금붕어 장식은 금붕어가 덕을 얻으면 용이 된다는 베트남 설화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유교, 도교, 불교, 베트남 전통문화의 다양한 흔적들을 살펴볼 수 있어 흥미롭다.

올드쿼터에서는 시클로를 타고 도심을 관광할 수 있다.

공항에서 내려 하노이를 처음 접했을 때는 그저 높은 빌딩과 도로를 가득 채운 오토바이들만 눈에 보였지만,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1000년 넘게 베트남의 수도로서의 역할을 해온 하노이의 땅과 역사 속에서 숨 쉬는 다채로운 문화를 목도할 수 있었다.

TRAVEL WISE
항공편
인천공항에서 하노이 노이바이공항까지 베트남항공이 매일 4편의 직항편을 운항하며 최소 4시간 30분 소요된다. 베트남항공을 통해 한국에서 베트남으로 가는 항공권 구매 시 베트남 국내선 1구간을 무료로 탑승하는 에드온 서비스를 제공하니 여행 시 참고할 것.
vietnamairlines.com
방문 최적기
베트남 북부 도시의 여름은 매우 덥고 습하기 때문에 선선하고 건조한 겨울철이 여행하기 좋다. 12월부터 2월까지는 하루 평균 최고 기온이 20℃ 전후이며, 강수량도 적어 쾌적하게 여행하기 좋다.
더 많은 정보
베트남관광청
vietnamtourism.or.kr

 

 

글. 차성민SEONG-MIN CHA
사진. 박은환EUN-HWAN PARK, 선 그룹,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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