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대륙의 정중앙에 자리한 캐나다의 사스카츄완 주는 그 위치 선정과 달리 여행자의 시야에서 조금 비껴 서 있다. 생경하지만 깊이 알아갈수록 그저 평평하다는 편견은 깨진다. 대초원이 반듯한 면을 형성하고 지평선을 그리는 이곳에서 독특한 야생과 다정한 사람들이 점점이 어우러져 입체적 여정을 맺는다.

♭
나는 캐나다를 횡단하는 1번 고속도로인 트랜스캐나다를 달리는 중이다. 1번 고속도로를 타는 건 이번이 두 번째인데, 풍경은 사뭇 다르다. 지난겨울에는 알버타 주에 솟아 있는 드높은 로키산맥이었지만, 올가을에는 사스카츄완 주에 펼쳐진 드넓은 대평원이다. 주도 리자이나Regina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이동하는 내내 도로는 곧게 뻗어 있고 지평선이 끝없이 이어진다. 도중에 펄럭이는 높은 깃발이 눈에 띌 수밖에.
“사스카츄완 주를 상징하는 기예요. 가로선을 중심으로 위는 북부의 숲을 뜻하는 초록색, 아래는 남부의 밀밭을 의미하는 노란색이죠.” 사스카츄완 주 관광청의 맷 두귀드Matt Duguid가 차를 운전하며 이야기한다. 우리가 한참 달리고 있는 남부의 대지는 방금 본 깃발의 하단처럼 노랗다. 막 수확을 끝낸 시기라서 밀이 여문 황금빛 들판은 아니다. 잘린 밑동만이 남은 빛바랜 황톳빛 벌판이다. 이곳은 곡창지대답게 밀, 귀리, 보리, 렌틸콩, 병아리콩, 캐놀라 등 다양한 작물이 재배된다. 렌틸콩은 원산지인 인도보다 더 많이 생산해 인도뿐 아니라 전 세계로 수출한다. 가지각색의 작물이 알록달록한 색조로 물드는 여름의 대지는 아주 다채롭다는 말을 상기하며 평원을 관망한다.
“트랜스캐나다를 이용하는 이들은 종종 사스카츄완의 풍경이 지나치게 평평해서 지루하다고 말하곤 해요. 어때요?” 맷의 질 문에 나는 솔직하게 답한다. “그렇게 단조롭지 않아요!” 단순히 편평하진 않기 때문이다. 마치 다큐멘터리 속 장면처럼 흙먼지를 일으키며 대지를 누비는 영양 무리, 무스조Moose Jaw 마을을 지나며 스친 세계에서 가장 큰 말코손바닥사슴 조각상. 그레인 엘리베이터grain elevator(수확한 곡식을 비축하는 시설)는 때로는 공장, 때로는 집처럼 생겼다. 바다와 맞닿지 않은 데다 줄곧 평평한 지형이라 기차로 물자 이동이 쉬워서인지 화물칸이 무수히 연결된 열차도 종종 지나간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봤을 때 마치 설원 같았던 새하얀 지형은 알고 보니 소금 광산이다. 사스카츄완에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칼륨 광석이 매장되어 있고, 칼륨 산업의 부산물인 소금 역시 생산된다. 일렬로 드문드문 서있는 기계는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석유를 채굴한다. 사스카츄완 주에서 나고 자란 맷은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풍경에 섬세한 부연을 덧붙인다. 덕분에 지금 내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새로운 탐험의 대상이다.
“사스카츄완~♪ 사스카츄완~♪” 우리가 달리는 주의 이름을 반복해서 애절하게 외치는 중독성 강한 노래가 울려 퍼진다. 자신이 사는 지역과 긴밀히 연관된 음악을 선곡한 맷의 플레이리스트를 살펴보니 레 트호아 아코흐Les Trois Accords의 ‘Saskatchewan’이다. 다음 곡인 캡틴 트랙터Captain Tractor의 ‘The Last Saskatchewan Pirate’은 리자이나를 연고로 하는 축구팀의 응원가라고 한다. 점심식사를 위해 스위프트 커런트Swift Current마을로 향하는 두 시간 반 동안 차 안에서 처음 감각한 사스카츄완의 풍경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우리나라보다 약 6.5배나 큰 면적을 지닌 사스카츄완 주는 북미 대륙의 대평원에 위치해 대개 ‘flat’이란 단어로 묘사되는데, 내게는 ‘평평하다’보다 음의 높이를 변주하는 ‘♭’으로 다가온다.
GRASSLANDS NATIONAL PARK
캐나다 프레리Canadian Prairies가 광활하게 펼쳐진 사스카츄완 주. 야생의 대초원은 개척 시대에 이르러 정착과 방목에 유용한 목축지로 대체되며 빠르게 사라져갔다. 오늘날 온전히 남아 있는 초원을 보존하는 동시에 인근 경작지를 사들여 다시 프레리로 복원 중이다. 이곳은 대초원으로 이루어진 캐나다 유일의 국립공원이다.

대초원과 바이슨
스위프트 커런트에서 약 한 시간 정도 달렸을까. 우리는 발 마리Val Marie 마을에 있는 그래스랜즈 국립공원 방문자 센터Grasslands National Park Visitor Centre에 도착한다. 이 곳에서 공원의 서부 구역West Block을 여행하는 에코투어 시닉 드라이브Ecotour Scenic Drive에 나선다. 차를 타고 약 20km 거리를 이동하면서 1번부터 7번까지 각 지점에 멈춰 안내판과 책자를 통해 스스로 탐험하는 것이다. 고맙게도 파크 캐나다의 레인저 조아니 타일러Joanie Tyler가 우리의 길라잡이가 되어주기로 한다.
그래스랜즈 국립공원은 나무 한 그루 없이 풀로 뒤덮인 대초원이다. 종종 언덕이 겹겹이 나타나는데, 햇빛이 비치면 굴곡마다 그림자가 부드럽게 늘어져 매우 아름답다고 한다. 늦가을인 지금은 풀의 색이 바랜 탓에 다소 황량한 풍경이다. 날이 흐려 쓸쓸한 기운마저 감돈다. 그러나 이곳에는 멸종위기에 처한 다수의 야생동물이 살아가고 있다.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들소의 일종인 바이슨의 대변이다. 에코투어 시닉 드라이브 1번 지점에서 저 멀리 보이는 생명체가 소인지 바이슨인지 궁금해하자 조아니가 이야기한다. “우리 앞에 있는 철조망이 바로 ‘바이슨 울타리’예요. 이 바깥에는 소가, 안쪽에는 바이슨이 살죠. 그러니까 저기 서 있는 무리는 바이슨이 맞아요.” 먼 거리에 있는 바이슨은 맨눈으로는 너무 작게 보여 마치 이모티콘 같다. 실제 바이슨은 북미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야생동물이다. 수컷 성체의 몸무게가 1톤에 육박할 정도로 육중하고 털도 북슬북슬해 우람하다. 그 런데 망원경을 통해 그 주변을 살피니 트레일을 걷는 두 사람이 개와 함께 한 마리의 바이슨에게 다가가고 있다. “그래스랜즈 국립공원에서 바이슨을 기르고 있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아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개체수와 건강 상태 또는 유전적 다양성 등을 살피긴 하지만, 엄연히 가축이 아니라 야생동물이에요. 반 야생semi-wild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수도 있겠네요. 안전을 위해 바이슨과 최소 100m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마세요.”(조아니) 좀더 가까이서 보고 싶은 건 인간의 욕심이겠지. 나는 코앞에서 바이슨의 대변을 본 것에 만족한다.
바이슨에게는 그들의 터전인 대초원이 중요하다. 초원이 건강한지 알 수 있는 방법 또한 바이슨의 존재 유무다. 바이슨의 뒹구는 습관으로 팬 땅에 물이 고이면 풀이 서식하는 데 도움이 된다. 풀을 먹은 바이슨이 이곳저곳 이동해 배설하면 씨앗이 퍼진다. 바이슨이 밟아 다진 토양은 씨앗이 발아하기 좋은 환경을 이룬다. 이처럼 대초원과 바이슨은 불가분의 관계다.
3번 지점에서 조아니가 그래스랜즈 국립공원에서 생장하는 풀의 종류에 대해 이야기한다. “니들앤스레드Needle-and-thread는 어릴 때 장난 좀 쳤던 캐나다인이라면 잘 아는 풀이에요. 얘기를 꺼내면 보통 ‘그거 친구 찌를 때 쓰는 풀이잖아요!’라는 말이 반사적으로 나오거든요. 그런데 사스카츄완 주 대초원의 토종 풀이란 사실은 대부분 모르죠. 블루 그라마Blue Grama는 바이슨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로 마치 사탕 같아요.” 블루 그라마가 정말 사탕 맛이 나는지 궁금했지만, 바이슨에게 양보하기로 한다. 이곳에 뿌리내린 풀은 건조한 기후와 적은 강수량, 극심한 추위를 견디도록 진화해왔다. 그래스랜즈 국립공원에는 70종 이상의 풀이 자생한다. 다양성이 살아 숨 쉬는 캐나다 프레리는 탄소를 흡수해 기후변화를 해결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한다.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
“선주민의 거주지였던 티피Tipi(원뿔형 천막)가 바람에 날아가는 것을 막아주는 토대 같은 돌이 원형으로 배열되어 있어요. 이를 ‘티피 링’이라고 부르는데 한번 찾아보세요!” 조아니의 말 한마디에 우리는 일사불란하게 주변을 수색한다. 풀에 덮여 있어 긴가민가하지만, 둘레가 꽤 긴 티피 링을 발견한다. 그래스랜즈 국립공원 곳곳에는 이러한 선주민의 흔적이 산재되어 있다. 이 티피 링 은 무려 9000여 년 전 것으로 추정된다고. 이곳에 살았던 선주민에게 바이슨은 옷과 음식뿐 아니라 티피를 만드는 가죽 등 모든 것을 주는 존재였다. 물론 선주민들은 필요한 만큼만 바이슨을 사냥했고 때로는 영적으로 추앙했다. 그들에게 바이슨은 삶의 중심이었다. 5번 지점에서 구불구불 흐르며 그래스랜즈 국립공원을 지나는 프렌치맨강Frenchman River을 마주한다. 문득 사스카츄완이 크리Cree 선주민의 언어로 ‘빠르게 흐르는 강’을 의미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본명인 에르네스트 뒤폴Ernest Dufault은 모르지만, 미국에서 사용한 이름인 윌 제임스Will James를 아는 분들이 있죠.” 조아니가 본격적인 설명에 앞서 운을 띄운다. 맷은 그 카우보이에 대해 들어본 적 있다고 대답한다. 캐나다 동부 퀘벡 주에서 태어나 서부인 이곳에 정착한 윌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수의 소설을 썼다. 그의 작품이 <스모키>, <슛 아웃> 같은 할리우드 영화로 제작되면서 유명한 카우보이가 되었다. 그는 미국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지금 내가 서 있는 6번 지점에 살았다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집필한 마지막 작품의 마지막 문장은 “카우보이는 절대 죽지 않는다!”라고.

이 구역 귀요미
하얀꼬리프레리도그는 길에서도 종종 마주칠 수 있지 만, 검은꼬리프레리도그는 아주 희귀하다. 그래스랜즈 국립공원은 검은꼬리프레리도그가 서식하는 캐나다의 유일한 지역이다. 2번 지점에서는 그들의 서식지가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7번 지점에서는 육안으로도 비교적 잘 보인다. 설치된 망원경을 통해서 검은꼬리프레리도그를 더욱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 곳곳에 분화구 모양처럼 쌓여 있는 작은 흙더미는 바로 이들이 사는 땅굴 입구다.
존재만으로도 귀여운데, 두 마리가 서로 마주 본 채 볼을 쓰다듬는다. 혹시나 뽀뽀할까 싶어 눈을 떼지 못한다. 뽀뽀를 하는 것은 유대감을 강화하는 행동이라고 한다. 위험이 닥치면 개처럼 짖는데, 우리가 곁에 있을 때는 그런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행복한 공존이다!

별별 우주
그래스랜즈 국립공원은 경작 등으로 야생성을 잃은 영역이 1% 미만이다. 즉 캐나다 프레리에서도 굉장히 드문 원시적인 땅. 이러한 대자연을 보전하기 위해 그 1% 미만의 구역에 여행자를 위한 시설을 마련해 두었다. 과거 한 가족의 농장이자 목초지였던 부지를 캠핑장으로 사용하는 식이다. 프렌치맨 밸리 캠프그라운드Frenchman Valley Campground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며 사스카츄완 주 관광청의 제넬 야콥슨Jenelle Jakobsen이 이야기 한다. “동네에서 오로라를 볼 수 있다는 건 엄청난 행운 이지요!”
사스카츄완 주 북쪽에 맞닿은 노스웨스트 준주에는 오로라 성지로 알려진 옐로나이프가 자리한다. 그런데 사스카츄완 주 역시 그곳과 마찬가지로 오로라 오발(지구의 두 극 주위에서 발견되는 후광 같은 고리로 오로라가 나타나는 지대)에 속해 있다. 캐나다 왕립천문학회가 그래스랜즈 국립공원 전역을 밤하늘보호구역으로 지정해 별을 관측하기도 좋다. 사스카츄완은 우주를 품고 있다. 그러나 하필 몰려온 구름이 별을 가리고 조금씩 흩날리는 비가 우리에게 얼른 이곳을 떠나라고 재촉한다. “이렇게 비가 오고 구름이 끼는 날씨는 드물어요.” 제넬이 속상한 듯 강조한다. 아쉽지만 날이 갤 기미가 보이지 않아 밤이 더욱 깊어지기 전에 차에 오른다.
천천히 도로를 주행 중에 갑자기 바이슨 세 마리가 나타나 다급하게 길을 건넌다. 제넬도 이렇게 가까이서 지나가는 바이슨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며 놀란다. 나는 차창을 열고 바이슨을 바라본다. 가로등 불빛 한 점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들과 눈을 맞추고 있는 듯하다. 바이슨이 우리 차량 앞을 지나던 순간, 헤드라이트에 반사된 바이슨의 강렬한 눈빛이 내게는 마치 반짝이는 별처럼, 초록빛의 오로라처럼 기억된다.

CYPRESS HILLS INTERPROVINCIAL PARK
사스카츄완 주 남부 전역이 모두 평평한 것은 아니다. 해발 1392m 사이프러스 힐스가 이를 증명한다.

우뚝한 숲
캐나다 프레리가 펼쳐지는 사스카츄완 주 남부에서 이렇게 울창한 숲을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다. 사이프러스 힐스 공동주립공원 중부 구역Center Block에 있는 사스카츄완 방문자 센터에서 박물학자인 멜로디 나겔-히시Melody Nagel-Hisey를 만난다. “정작 이곳에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서식하지 않아요. 소나무와 가문비나무의 일종인 캐나다스프루스Canadian Spruce 등이 숲을 이루죠. 초기에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이들이 어떤 나무를 사이프러스로 착각했거든요. 그래서 사이프러스 힐스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죠.” 멜로디가 이름의 유래에 대해 설명한다.
이곳은 사스카츄완 주와 알버타 주에 걸쳐 있기 때문에 두 주에서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다. 우리가 차로 돌아 보는 중부 구역은 당연히 사스카츄완에 속한다. 그녀의 반려견인 보더콜리 브루어Brewer와 함께 잠시 트레일을 걷기도 한다. 꼬리를 경쾌하게 흔들며 앞서 길을 안내하는 브루어 덕분에 나의 하이킹 로망이 여기서 실현된다. 해발 1275m 룩아웃 포인트에 다다르자 북미사시나무의 노랑 단풍이 군데군데 장관을 이룬다. 완만한 경사면을 따라 곱게 물든 샛노란 숲 앞으로는 대초원과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진다. 날이 맑아 100km 떨어진 그레이트 샌드 힐스The Great sand Hills까지 보인다. “약 1만8000년 전에 거대한 빙하가 이 지형을 조각했어요.”(멜로디) 항상 느끼지만 자연은 위대한 예술가다.
HISTORIC REESOR RANCH
사이프러스 힐스 공동주립공원 서부 구역West Block 북쪽에 히스토릭 리저 랜치가 자리한다. 이곳에서 리저 가족은 1904년부터 대대로 캐나다 서부 카우보이의 문화를 이어오고 있다. 사스카츄완 주 정부 유산으로 지정된 최초의 목장이기도 하다.

진정한 카우걸
1906년 지어져 1916년 현재의 모습으로 개조된 저택인 랜치 하우스Ranch House에 이틀 동안 머물기로 한다. 나는 키스Keith와 헬렌Helen 부부가 신혼 시절부터 40년 넘게 사용한 2층의 침실을 선택한다. 1944년 결혼한 이들이 선물 받은 침대와 침구, 가구는 지금도 완벽한 상태다. 벽면에는 가족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고 곳곳에 카우보이 옷과 장비 등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내가 묵는 방의 원래 주인인 키스와 헬렌의 아들 스콧Scott이 그의 아내 테레사Theresa 그리고 아들 제이슨Jason과 함께 이 랜치를 운영 중이다. 리저 가족은 목장 경영과 토지 보존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해왔다. 소를 기르면서 순환 방목을 실천해 지속 가능한 미래를 그리는 것처럼.
랜치에서는 30여 마리의 말도 기른다. 우리는 계획을 변경해 일몰 승마에 나서기로 한다. 랭글러(전문적으로 말을 돌보는 사람) 에밀리Emily가 각자의 체격에 맞는 말을 배정해준다. 나는 스물여섯 살인 스킵Skip과 함께한다. 말의 생애를 고려하면 스킵은 한참 어르신이기에 모시는 자세로 임한다. 뻣뻣한 솔로 스킵의 갈기와 털을 정성스럽게 빗겨주고, 등에 안장을 얹혀 말의 몸에 맞도록 끈을 묶어 고정한다. 그러고 나서 스킵의 고삐를 잡고 함께 걸으며 호흡을 맞춘다. 이윽고 가죽 주머니 형태의 등 자에 발을 넣고 말에 올라 자세를 잡은 다음 길을 떠난다. 해가 지면서 초원 위로 나와 스킵의 긴 그림자가 드리운다. 도중에 모험심이 발동한 나의 실수로 스킵이 놀라는 순간, 나는 말에서 떨어지고 만다. 다행히 다친 데 없이 멀쩡했고 벌떡 일어나 다시 스킵에게 향한다. 그런데 말에서 떨어질 때 주머니에 있던 휴대전화가 어디론가 날아갔다. 진동으로 해놓은 데다 연동된 애플워치로도 위치가 잡히지 않는다. 에밀리가 찾아 헤매다 맷이 합류해 들판을 샅샅이 살핀 끝에 15분 만에 내 품으로 돌아온다.
약 두 시간의 승마를 마칠 무렵, 랜치 하우스 부근 연못에서 야생 사슴 한 마리가 우리를 지긋이 바라본다. 마침 스킵이 맛있는 풀을 발견했는지 땅에 고개를 박는 바람에 나도 사슴과 눈을 맞춘다. 과거 곡물창고였던 헛간에 도착해 말에서 내릴 때, 스킵이 이렇게 키가 컸나 싶다. 점프하면서 땅과 발이 닿아 생긴 진동과 파장이 묵직하게 느껴진다. 끈을 풀어 안장을 헛간에 두고 브러시로 스킵의 갈기와 털을 정돈한 다음 간식을 준다. 이번에는 고삐도 풀어주고 목장 안으로 들여보내는 일까지 맡는다. 이후 울타리를 열어주자 말이 무리를 이루며 자유롭게 달려 나가 초원을 노닌다. 에밀리가 내게 말을 건다. “정말 아픈 데 없이 괜찮아요? 진정한 카우걸이 되었네요!” 낙마도 하나의 과정이란다. 이게 바로 인생이다!
끈끈한 우리
랜치에서 활발히 뛰노는 검정 개 두 마리, 카우보이Cowboy와 찰리Charlee를 쫓아다니다 제이슨의 딸인 에이 버리Avery를 만나 “귀엽다!”를 연발한다. 이후 에이버리가 장난감을 보여주자 나는 또 “귀엽다!”를 남발한다. 그러자 에이버리가 묻는다. “얘랑 나랑 누가 더 귀여워요?” 지금 이 순간 어느 누구도 에이버리의 귀여움을 이기지 못한다. 이 귀여운 꼬마가 훗날 히스토릭 리저 랜치를 물려받을지도 모른다.
저녁식사로 랜치 홀 그릴 앤 바Ranch Hall Grill & Bar에서 스콧이 구워준 스테이크와 테레사가 요리한 구운 옥수수와 마늘빵, 사워크림과 치즈를 잔뜩 넣은 감자, 샐러드를 먹는다. 채소는 테레사가 직접 재배하거나 이 지역에서 나는 것이다. 식사를 하는 중에 스콧이 곁에서 카우보이 시를 낭독한다. 이 시간은 일과를 마친 카우보이가 모닥불 앞에서 그날의 일을 다같이 이야기하던 전통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시라고 하면 왠지 진지할 것 같지만, 우리 일상처럼 소소하고 재치가 배어 있어 종종 웃음 이 새어 나온다. 스콧은 로버트 서비스가 출간한 다수의 시집을 소장하고 있다. 방금도 로버트의 <발라드 오브 치차코Ballads of a cheechako>에 수록된 시구를 읊었다. 그에게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물으니 “사람들의 웃음이 터지는 문장이죠!”라고 말한다. 이후 넌지시 로버트가 머물렀던 오두막집이 유콘 준주의 도슨 시티Dawson City에 여전히 남아 있다며 나중에 한번 가보라고 이야기한다.
밤에는 스콧이 카우보이처럼 밧줄을 이용해 소 잡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손목을 이용해 밧줄을 돌리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휙휙 돌아 던지면 진짜 아플 것 같다. 맷이 기꺼이 소의 역할을 자처해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줄을 날려본다. 가만히 서 있는 맷조차 사냥하지 못하지 만 마냥 신이 난다. 다음 날 우리가 히스토릭 리저 랜치를 떠나기 직전, 스콧이 선물을 건넨다. 자신과 어머니 헬렌의 시를 엮은 시집 그리고 어제 연습한 것보다 더 품질 좋은 밧줄.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 침대맡에 밧줄을 동그랗게 말아 놓는다. 밧줄을 볼 때마다 물리적 거리를 초월해 우리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TRAVEL WISE
가는 방법
에어캐나다가 인천국제공항과 밴쿠버국제공항을 오가는 직항 노선을 매일 운항한다. 밴쿠버에서 리자이나 또는 사스카툰으로 향하는 국내선 연결편은 모두 2시간 정도 소요된다.
머물 곳
리자이나 중심에 위치한 호텔 사스카츄완The Hotel Saskatchewan은 단풍이 아름다운 빅토리아공원을 마주하며, 고풍스러운 건축물에 우아한 미감이 돋보인다. 수녀원을 개조한 칸벤트 인The Convent Inn은 그래스랜즈 국립공원을 탐험할 때 아늑한 선택지가 될 것이다.
더 많은 정보
캐나다 관광청 keepexploring.kr
사스카츄완 주 관광청 tourismsaskatchewan. 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