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베개 삼고 골짜기에 깃들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 평창은 전체 면적의 84%가 숲이다. 그 속에서 청량한 공기와 투박한 땅이 길러낸 작물을 수확해 건강한 빵을 굽는 빵집이 있다.
검은 빵을 굽는 곳
“어디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가서 살고 싶어.” 몇 년 전만 해도 은퇴를 앞둔 부모님의 대사였는데 지금은 내가 종종 마음속으로 하는 말이다. 산골에서 휴가를 보낸 적도 없으면서 막연히 그곳을 선망하는 이유는 어릴 적 본 만화의 영향이 크다. 스위스 작가 요한나 슈피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알프스 소녀 하이디>는 본격적으로 귀촌을 장려한다. 초록빛 들판, 향긋한 야생화, 귀여운 아기 염소, 별이 박힌 하늘 등. 특히 하이디가 검은 빵에 치즈를 잔뜩 발라 크게 베어 물고 염소 우유를 꿀꺽꿀꺽 들이켜는 모습이 부러웠다. 막상 소녀는 검은 빵보다 도시에서 구운 흰 빵에 집착했지만. 당시 유럽 산골에서 자주 먹던 검은 빵은 춥고 척박한 환경에서 잘 자라는 곡물로 만들어 질감이 거칠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하이디와 반대로 자연이 빚어낸 산골 검은 빵맛이 훨씬 궁금했다.
서울에서 차를 타고 동쪽으로 2시간 30분 정도 달리면 한국의 알프스라 불리는 평창이 나온다. 차창 너머로 광활한 밭이 펼쳐지고 굴곡진 산이 연이어 등장한다. 간간이 보이는 푯말마다 ‘여기는 해발 600m입니다’ ‘여기는 평창 정상입니다. 800m 지점’ 등 고도에 대한 안내 문구가 적혀 있다. 평창에서 고개를 젖히면 하늘이 고작 석 자 거리에 있다던 옛말이 떠오른다. 게다가 어제 한바탕 비가 온 후 날이 개어 구름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고도가 높은 평창은 보통의 강원도 지역보다 기온이 3℃ 정도 낮아 고랭지농업과 목초지가 발달했다. 도로 양옆으로 농장과 목장이 즐비하다. 여름부터 가을 사이에는 성질이 찬 메밀이 잘 자란다. 이곳 메밀은 평창 특유의 저온을 견디기 위해 양분을 꽉 끌어안는다. 덕분에 속이 알차고 맛이 달짝지근해 다양한 음식에 활용된다. 그리고 나는 이 메밀을 넣어 구웠다는 검은 빵을 찾기 위해 언덕길을 넘고 있다.
나물 캐는 블랑제리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빵집이 아니라 농장이다. “제가 나물을 캐고 있어서요.” 수화기 너머로 간혹 제빵사가 전하던 말이었다. 그녀는 이따금 빵에 나물을 넣기도 하는데 대부분 가까운 농장에서 직접 채취한다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도착한 농장 입구에 하얀 꽃이 만발해 있다. “감자꽃은 흰색이나 자주색으로 피어요. 흰색 꽃이 열린 것들은 두백 감자인데 전분 함량이 높아 포슬포슬하게 쪄 먹기 좋죠. 감자꽃이 지면 여기에 바로 메밀을 심어요.” 삼부자평창산양삼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농부 조성근 씨가 목에 수건을 두른 채 인사를 건넨다. 나는 그가 타고 온 트럭에 합류해 각종 작물이 자라는 산속으로 향했다.
눈을 제대로 뜨기 어려울 정도로 해가 쨍쨍했으나 숲에 들어서자 키 큰 나무들이 고개 숙여 그늘을 만들어준다. 닦아놓은 흙길을 제외하고 주변이 온통 초록색이다. “유기농 위에 자연농이죠. 산마늘, 곰취, 취나물, 산양삼 등 다양한 작물이 온갖 낙엽과 함께 자라요. 천연 그늘과 물길이 있어 햇볕에서 키우는 것보다 창윤하고 잔향이 강해요.” 조성근 씨를 따라 더 깊숙이 들어가니 흐드러지게 꽃이 핀 아카시아나무 아래 곰취가 가득하다. 평소 반찬 가게에서 보던 것보다 5배 정도 크지 싶다. 꼬물거리는 움직임이 얼핏 보여 자세히 살피니 작은 달팽이가 기어간다. 젊은 농부가 곰취 줄기를 똑 잘라 내민다. 흙을 털어내고 잘근잘근 씹어보니 민트처럼 알싸한 향이 입안에 감돈다. 곰취는 대개 3년 차부터 수확한다. 눈앞의 어마어마한 크기의 곰취는 약 6~10년 차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곰취를 넣어 빵을 만들거나 장아찌로 담가 빵과 곁들여도 맛있어요.” 새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누군가 작업복을 입고 나물을 한 움큼 집어 들고 있다.
본토박이의 레시피를 따라서
빵집이 자리한 평창올림픽시장에서 고소한 부침 냄새가 풍긴다. 한 어르신이 반대편이 비칠 정도로 반투명한 얇은 전을 퍽 쉽게 뒤집는다. 메밀비지전, 메밀국수, 메밀묵사발, 메밀닭강정 등 메밀로 만든 음식을 내놓는 식당이 밀집해 메밀 골목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모퉁이를 돌아 걷다가 ‘브레드 메밀 팩토리’라 적힌 간판 앞에서 멈췄다. 이곳은 브레드 메밀의 대표인 제빵사 최효주 씨가 아침마다 반죽을 치대는 공간이다. 안쪽 문을 통해 빵을 판매하는 매장인 ‘브레드 메밀’을 비밀스레 오간다. 2016년 4월, 어느 따뜻한 봄날에 문을 연 이곳은 평창이 만드는 빵이라는 과제를 성실히 수행해 왔다. 라탄 바구니에 놓인 빵마다 로컬 감성이 짙게 묻어난다. 삼색치즈빵은 평창보배목장의 가우다치즈를 활용해 구웠고, 곤드레감자치아바타는 삼부자평창산양삼농장에서 캔 나물을 넣었다.
“저는 평창 토박이에요. 그렇다고 처음부터 메밀빵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어요.” 그녀는 캐나다인 친구에게 고향을 소개하면서 외국인의 시선으로 평창을 다시 보게 됐다. 그때 메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선물하다가 아이디어를 얻었다. 메밀은 한방과에 속해 전통성이 잘 드러나며 밀가루와 달리 당뇨나 고혈압 등 성인병을 예방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실제로 메밀빵을 식사나 약 대용으로 잡숫는 어르신들도 왕왕 있다고 한다. 빵을 준비하는 데 드는 시간과 정성 또한 약을 달이는 것에 버금간다. “순메밀식빵은 전날부터 만들어요.” 메밀에는 찰기가 없어 하루 전에 90도가 넘지 않는 물로 익반죽을 해두어야 한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6시부터 반죽을 치고 성형을 한다. 여름에는 반죽이 퍼지기 쉬워 차가운 얼음물로 온도를 조절한다고. 이후 비정제설탕, 메밀탕종, 발효종 등을 추가하는데 발효종은 사과나 오렌지 등의 과일즙과 꿀을 넣어 일주일간 배양한 것을 사용한다. 오전 9시 반, 비로소 그녀는 정성스레 빚은 반죽을 오븐에 넣고 정오의 오픈을 준비한다.
숲속에서 만찬을
여름이 가까워질수록 브레드 메밀에 조식용 빵을 사러 오는 캠핑족의 방문이 잦아진다. 아침에 김치찌개를 자글자글 끓여 메밀빵에 얹어 먹으면 스페인 요리인 감바스 알 아히요가 부럽지 않다고 한다. 차로 30분을 이동해 최근 ‘차박지’로 주목받는 산너미목장에 도착했다. 청옥산 자락에 있는 20만 평 초지에서 염소 700여 마리가 자유롭게 뛰어다닌다. 과거 스무 가구가 살던 작은 마을은 한집 두집 도시로 떠나는 이웃이 늘었고, 마을을 지키던 임성남 씨 가족이 지금의 목장을 일궈냈다. “저희가 캠핑족을 받기 시작한 지는 한 달 반 정도밖에 안됐어요.” 그럼에도 이미 차박을 즐기는 사람들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목장에는 총 9군데의 캠핑 스폿이 있는데 돌탑으로 둘러싸인 평평한 땅이 차박에 적절하다. 가장 높은 지점에서는 미탄면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목장 가운데에는 산너미주막이라 부르는 식당 아래 큰 원두막이 하나 있다. 그곳에 뜬금없이 고장 난 캐리어가 일렬로 줄지어 있어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작은 도서관이란다. 목장지기인 임성남 씨와 가족들이 기부받은 책들을 각 캐리어 안에 차곡차곡 꽂았다. 한 권을 꺼내는 순간 시원한 초여름 바람이 불어 종이가 휘리릭 넘어간다. 뜨거운 열기를 식혀주니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원두막 둘레는 잠재적 문화 공간이다. “작년 10월에 여기서 평창 청년들과 함께 ‘산너미 미식여행’을 진행했어요.” 숲 한복판에 긴 테이블을 두고 로컬 푸드를 코스 요리처럼 대접했다. 참가자들은 공활한 가을 하늘 아래서 삼부자평창산양삼농장의 오미자 칵테일, 평창보배목장의 요거트와 다섯 가지 치즈, 전통주와 페어링한 브레드 메밀의 빵, 산너미목장의 흑염소 숯불구이 등 풍성한 만찬을 즐겼다. “올해 하반기에는 브레드 메밀과 원두막 앞 공터에서 작은 음악회를 열 계획이에요.” 어스레한 청옥산의 저녁 풍경에 더해질 바이올린과 피아노 선율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TRAVEL WISE
포레스트 투 테이블
삼부자평창산양삼농장
심마니가 돼 산속을 누벼보자. 픽업트럭을 타고 위쪽으로 달달 이동해 두발괭이를 챙긴다. 산양삼이 자라는 밭에서 조심스럽게 삼뿌리를 캔다. 즉시 술로 담가 6개월 후 개봉하면 맛과 향이 적절하게 우러난다. 가마솥에 불을 피우고 직접 캔 산양삼으로 백숙을 끓여 먹을 수도 있다. 6월에서 8월 사이가 체험 활동을 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경강로 1406
산너미목장
트레킹 루트가 다양하다. 정상까지 걸어서 30분 정도가 걸리는데 가는 길마다 염소, 나비, 야생화 등에 시선을 뺏겨 걸음이 느려진다. 은하수가 보이는 스폿으로 잘 알려진 육백마지기까지도 걸어서 갈 수 있다. 약 3시간이 걸리는 트레킹 루트이므로 선선한 시간대에 움직이는 것을 추천한다. 트레킹을 마친 후 산너미목장에 있는 식당에서 바비큐, 산채비빔밥, 칡즙 등을 맛보자.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회동리 803
메밀 골목
브레드 메밀
쑥 쉬폰, 토종 흰들깨 깜빠뉴, 평창단팥빵, 블루치즈 휘낭시에 등 어느 빵을 골라야 할지 고민이라면 다양한 빵을 한 상자에 담은 빵 꾸러미를 주문하자. 인스타그램에서 오늘의 빵 꾸러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브레드 메밀 건너편에는 빵을 사 들고 가기 좋은 카페가 있다. 음료를 담당하던 동생 최승수 씨가 독립해 오픈한 '평창다반사'에서 시원한 커피를 마시며 메밀빵을 음미하자.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평창시장2길 15 @bread_memil
메밀나라
평창올림픽시장 중심부에 위치한 이 식당에서는 메밀의 다채로운 모습을 볼 수 있다. 메밀부치기, 메밀전병, 메밀비지전, 수수부꾸미 등을 부지런히 지진다. 여럿이 갔을 경우 3대천왕세트를 시키면 5가지 부침이 푸짐하게 담겨 나온다. 여름에는 메밀묵사발로 더위를 식혀보자. 달지 않고 고소해 뒷맛이 깔끔하다.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평창시장1길 8-1
월이메밀닭강정
효석문화마을에서 동쪽으로 10분을 걸어가 메밀로 만든 닭강정을 맛보자. 호텔조리과 출신의 요리사가 익숙한 음식에 지역색을 덧입혔다. 봉평에서 기른 쓴메밀을 사용해 메밀닭강정과 메밀황태강정을 만든다. 바삭하게 튀긴 강정 위에 해바라기 씨를 뿌려 오독오독한 식감을 더했다.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기풍3길 33
샘터감자옹심이
옹심이는 새알을 뜻하는 강원도 방언이다. 감자를 갈아 물에 앉혀 앙금을 건져낸 뒤 반죽을 떼어 만든다. 샘터감자옹심이에서는 메밀과 감자 두 가지 로컬 식재료를 모두 맛볼 수 있다. 애피타이저로 소량의 보리밥을 무생채에 비벼 먹고 메밀국수옹심이를 후루룩 들이마신다. 만두옹심이, 김치만두, 고기만두 등도 판매한다.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백오1길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