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일본 대재해 이후 단절됐던 도호쿠의 시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오모리, 이와테, 미야기, 후쿠시마의 해안길을 걸으며 다시 한 번 찬란한 봄을 꿈꾼다.
AOMORI: 끝없는 해안, 아오모리
12년 만에 도호쿠로 향한다. 아침 9시 8분, 도쿄역에서 아오모리행 하야부사はやぶさ 열차에 몸을 실었다. 약 3시간이 걸려 도착한 곳은 아오모리青森현의 하치노헤역八戸駅. 밖을 나서니 갑자기 비가 내린다. 분명 일기예보를 확인했을 때에는 내내 맑다고 했건만, 예상치도 못했던 비다. 다행스럽게도 점심식사를 위해 이동하는 도중 날은 개었고 차창 밖으로 해사한 무지개가 나타났다. “우와!” 나와 일행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도호쿠 여행의 첫 식사로는 해산물 요리가 먹고 싶었다. 암석 해안에 홀로 자리하고 있던 식당 코후나토小舟渡는 삼면의 큰 유리창으로 아오모리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음식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오징어, 새우, 가리비, 연어알 등을 가득 올린 카이센동海鮮丼(해산물덮밥)은 담음새가 아름답고 재료가 신선해 먹는 내내 즐거웠다. 주변 바다의 해산물로 맛을 낸 이소라멘은 개운하면서 깔끔한 맛이 ‘어서 와, 여기가 도호쿠야!’라고 말하며 나를 따뜻하게 맞이해주는 것 같았다.
식사 후 소화도 시킬 겸 산책이 필요했다. 지브리 만화영화에 나올 것 같은 나무숲 터널을 지나 도착한 곳은 사메카도 등대鮫角灯台다. 1938년에 건축한 사메카도 등대는 ‘일본 등대 50선’에도 선정되었다. 목장의 녹음,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기찻길, 갈대의 흔들림을 감상하며 가을의 청량한 공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해안선을 따라 산책을 하기 위해 먼저 아시게자키 전망대葦毛崎展望台를 찾아갔다. 전망대에 서 있자니 성 꼭대기에서 주변 경관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서쪽에는 사메카도 등대, 동쪽에는 끝없는 수평선이, 남쪽으로는 암석 해안인 나카스카 해안中須賀海岸과 모래 해안인 오스카 해안大須賀海岸이 차례대로 보였다. 바람을 따라 해안가 산책로로 향했다. 전망대 주변과 해안가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다양한 꽃들이 장관을 이루는데, 나를 맞이한 것은 갈대밭과 노을빛에 물들어가는 풀들뿐이었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해본다.
IWATE: 희망의 발견, 이와테
기차를 타러 이와테岩手현의 쿠지역久慈駅으로 이동했다. 쿠지久慈는 2013년에 방영된 NHK 아침 드라마 <아마짱あまちゃん>의 촬영 로케지로 마을 전체가 인기 관광 명소가 되었다. 이와테현 산리쿠 해안 마을을 무대로 한 이 드라마는 해녀였던 응석꾸러기 주인공 아마노 아키가 지역 아이돌이 되어 동일본 대지진 이후 마을을 되살리는 모습을 그렸다. 쿠지역에서 출발하는 산리쿠 철도三陸鉄道 리아스선リアス線 한 량짜리 열차는 금세 귀가하는 학생들로 붐볐다. 열차 안에도 드라마의 모습이 가득하다. 귀여운 주인공의 사진 속 모습과 재잘재잘 떠들기 바쁜 학생들의 얼굴이 한데 겹쳐 보인다. 해안가를 달리고 싶어 산리쿠 철도를 탔으나 늦은 저녁에 탑승한 까닭에 고요한 밤의 정적을 느끼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후다이역普代駅에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하차한 후에는 열차의 기적 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타노하타역田野畑駅을 막 출발할 때 내 앞에 앉아 졸고 있던 여학생이 벌떡 일어나서 운전사에게 달려갔다. “방금 타노하타역이었나요?” “하하하, 이런, 졸았구나. 잠시만. 후진해서 내릴 수 있게 해줄게”. 나는 미야코역宮古駅에서 상냥한 운전사에게 존경의 마음을 담아 인사를 하고 내렸다. 숙소에서 15가지가 넘는 가이세키 요리로 포식을 하고 온천욕을 즐기고 나니 금세 단잠에 빠져들었다.
방의 커다란 유리창으로 비쳐드는 햇살과 함께 이와테의 아침이 밝아왔다. 든든히 아침을 챙겨 먹고 서둘러 미야코역 근처에 위치한 조도가하마浄土ヶ浜 해변으로 향했다. 조도가하마는 아름다운 경치로 1954년 이와테현 명승지로 지정되었는데, 제각기 다양한 키를 뽐내며 뾰족하게 솟은 새하얀 유문암 위에 푸른 소나무가 군생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바닥의 성게가 그대로 보일 정도로 바닷물이 맑고 투명하다. 해안의 갈매기들은 먹이를 가지고 온 손님들을 맞이하며 아침의 고요함을 깨우고 있었다. 울퉁불퉁한 바위 사이의 좁은 입구로 들어가면 바닷물이 마린 블루로 빛나는 푸른 동굴青の洞窟이 있다. 때에 따라 에메랄드 그린, 코발트 블루로 변화하는 동굴은 시기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덕에 여러 번 봐도 싫증나지 않는다.
설렘을 안고 리쿠젠타카타시陸前高田市로에 있는 기념 조형물 키세키노 잇폰마츠奇跡の一本松(기적의 소나무)를 보러 떠난다.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의 쓰나미로 주변 건물들과 소나무 7만여 그루가 소실된 상황에서도 혼자 살아남았다. 바닷물에 노출돼 고목이 되었지만 대재앙에도 꺾이지 않는 불굴의 생명력을 보인 나무를 복원 작업해 희생자를 위한 추모비로 재탄생시켰다. 예전 스호스텔이었던 옆 건물의 처참함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적의 소나무 주변에는 타카타마츠바라 츠나미 부흥 기념 공원高田松原津波復興祈念公園이 조성되었고, 재건 작업은 계속되고 있다. 바다를 마주한 제단에서 그날의 희생자들을 기리며 잠시 묵념을 하고 돌아섰다. “사람은 자신의 삶의 터전을 쉽게 버릴 수 없어요. 크나큰 시련에도 희망을 안고 꿋꿋하게 살아갈 뿐입니다.” 기적의 소나무 주변에서 나에게 설명하던 자원봉사자 노인의 목소리가 아련한 잔향으로 남는다.
MIYAGI: 일본의 절경, 미야기
이와테의 조도가하마에 뒤지지 않는 미야기宮城의 명승지를 보러 갔다. 미야기현은 2018년 해안길과 숲길, 마을길을 복합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미야기 올레宮城オルレ를 조성했다. 총 4개의 코스 중 게센누마ㆍ카라쿠와 코스気仙沼ㆍ 唐桑コース에 속한 카라쿠와 반도唐桑半島의 오가마한조巨釜半造는 리아스식 해안을 따라 형성된 기암괴석이 색다른 장관을 선사한다. 우뚝 솟은 약 16m 높이의 바위 오레이시折石를 감싸며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은 오가마巨釜(큰 솥)라는 큰 가마 안의 끓는 물처럼 보여 넋을 잃고 쳐다보게 만들었다.
게센누마시에 방문한다면 꼭 먹고 싶은 음식이 있었는데, 바로 후카히레ふかひれ(상어 지느러미)이다. 게센누마의 후카히레 생산량은 일본 내 1위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가장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지역이지만, 좋은 품질의 후카히레로 미식가들을 다시 불러모으고 있다. 나는 밥 위에 큼직한 후카히레를 올려주는 후카히레동ふかひれ丼(상어지느러미덮밥)을 마주하고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그저 이 호사스러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저녁때 료칸에서 먹은 가이세키 요리도 맛있었지만, 그날 밤 꿈에 다시 그 후카히레동을떠올릴 정도로 나를 사로잡았다. 분명 나는 자는 동안에도 미소 짓고 있었을 것이다.
다음 날에는 일본 3경 중 하나인 마쓰시마松島를 둘러보기로 했다. 아침 일찍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사이교모도시노마츠공원西行戻しの松公園에 올랐다. ‘사이교 법사西行法師가 큰 소나무松 아래에서 만난 동자와의 선문답에서 패해 마쓰시마행을 포기하고 돌아갔다戻し’는 이야기에서 이름이 지어졌다. 사이교 법사가 생전에 봄날 벚꽃 아래에서 죽고 싶다고 읊조린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봄날이면 주변 260여 그루의 벚꽃나무가 만개해 산 아래 마쓰시마의 경치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이번 여행의 곳곳에서 만났던 가을의 단풍도 좋았지만 내년 봄 도호쿠에 다시 와야겠다.
마쓰시마에서 시오가마塩釜로 향하는 유람선 승선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선착장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 도보 5분 거리 내에 고다이도五大堂, 엔츠인円通院, 즈이간지瑞巌寺, 간란테이観瀾亭 등의 국보, 국가 중요 문화재가 즐비하다. 807년에 건립한 후 1604년 다테 마사무네가 재건한 고다이도는 사찰 즈이간지瑞巌寺의 수호를 위해 5대명왕상五大明王像을 모신 사당으로, 여행자라면 누구나방문하는 마쓰시마의 상징적 존재다. 고다이도에 들어가기위해서는 틈새가 있는 다리 스카시바시透橋를 건너야 하는데, 이는 참배객의 마음을 다잡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건널 때 조심해야 하는 다소 스릴 넘치는 다리다. 1700년대 이후 굳게 닫혀진 사당의 문은 33년마다 한 번씩 개방하여 5대명왕상을 공개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 공개한 때가 2006년이었으니 그다음은 2039년이 된다. 마쓰시마의 단풍 명소이자 유서 깊은 정원이 있는 엔츠인은 돌과 녹색 이끼로 조성된 정원과 이를 둘러싼 나무들의 단풍이 아름답다. 길을 걷다 보니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다. 잠시 벤치에 앉으니 때마침 잠자리 한 마리가 내 모자 위에 앉았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잠자리와 함께 정원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하늘 높이 우뚝 솟은 삼나무길을 지나 사찰 즈이간지로 향했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권력을 잡았던 아즈치 모모야마安土桃山 시대의 미술을 보여주는 귀중한 건축물로서 본당, 복도 등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내부는 사진 촬영 금지인데, 시원한 감촉의 나무 복도를 따라 걷다 보면 건물의 웅장함에 빠지게 된다. 다실 칸란테이에서 마쓰시마 앞바다를 바라보며 다도 체험을 마친 후 마쓰시마 유람선에 올랐다. 미야기현의 마쓰시마는 히로시마현의 ‘미야지마’, 교토부의 ‘아마노하시다테’와 함께 일본 3경에 속한다. 마쓰시마만松島湾에 떠 있는 260여 개의 섬이 우리나라의 다도해를 연상케 한다. 유람선이 만드는 물보라 뒤로 점점이 떠 있는 마쓰시마의 섬들을 보니 탄식이 절로 나왔다. 에도시대 유명 하이쿠俳句 작가 마쓰오 바쇼松尾芭蕉를 비롯해 문인, 시인, 풍류객이 일본 최고 절경이라 칭송하지 않았더라도 누구나 마쓰시마에 오면 그 아름다움에 말문을 잃을 것이다. 배를 타고 가까이에서 보는 광경은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그렇게 약 50여 분간 바다에서 멋진 풍경을 감상하고 시오가마塩釜에 도착했다. 밝다. 쾌활하다. ‘이랏샤이마세’를 외치는 시오가마 수산물도매시장 상인들의 활기찬 모습은 전혀 가식이 아니다. 50여 년 역사의 도매시장 내에는 140여 개 노점이 있는데, 모두 명랑한 모습으로 손님을 응대한다. 이곳에는 유명한 해산물이 있는데, 바로 9~12월에 잡히는 메바치 마구로メバチマグロ(눈다랑어)다. 붉은 색감과 광택이흐르는 자태는 때맞춰 일부러 찾아온 수고로움을 잊게 해준다. 시장에는 맛보고 싶은 해산물이 너무 많았다. 이럴 때는 시장 내 노점에서 원하는 해산물을 구입해 직접 만들어 먹는 마이 카이센동マイ海鮮丼을 즐겨자. 먹고 싶은 만큼 맘껏 욕심부려도 된다.
FUKUSHIMA: 바다의 신비, 후쿠시마
여행의 마지막 날 후쿠시마福島현 이와키시いわき市로 떠났다. 멀리서 물고기 모양의 건물 아쿠아마린 후쿠시마アクアマリン ふくしま가 보인다. 올해 개관 20주년을 맞이한 아쿠아마린 후쿠시마는 1년에 60만 명이 방문하는 도호쿠 지역 최대 규모의 수족관이다. 화석을 통해 바다 생명체가 어떻게 진화하고 멸종했는지 유구한 바다의 역사를 살펴보고, 열대지역에서 북극지역까지 바다 전체를 아우르는 다양한 생명체를 만날 수 있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오야시오親潮(쿠릴 해류)와 남쪽에서 올라오는 구로시오黒潮(일본 해류)가 만나는 곳이 바로후쿠시마 앞바다이다. 이 수족관에 있는 세모난 터널형 수조인 시오메노우미潮目の海는 이 두 해류가 만나는 경계점에 위치하는 후쿠시마현의 바다를 재현했다. 좌우를 나누어 오야시오의 어류와 구로시오의 어류를 사육하는데, 태양광이 내리쬐는 삼각형 공간 안에서 바다의 신비함을 한껏 느낄 수 있다.
수족관을 둘러보고 여행의 마지막 식사를 위해 건너편 건물인 이와키 라라뮤いわき ららミュウ로 이동했다. 이와키 라라뮤는 이와키시의 관광물산센터로, 바로 옆에 위치한 오나하마 어시장小名浜魚市場에서 해산물을 공급받아 여러 점포에서 판매하고 있는데, 구입한 해산물을 직접 구워 먹을 수 있는 바비큐 공간이 있다. 나와 일행은 기름기 좔좔 흐르는 눈볼대, 신선한 굴, 가리비, 새우, 오징어 등 먹고 싶은 해산물을 불판에 잔뜩 올리며 마지막 만찬을 시작했다. 타들어가는 해산물도 잠시 잊고 이야기는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거센 비바람도 언젠가 그칠 것을 안다. 도호쿠에 들이닥친 대재앙의 그림자는 사라지고 희망의 무지개가 드리워지고 있다. 단절되었던 나와 도호쿠의 시간은 다시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