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오고 있다.’ 샤워를 마치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는 사이 부쩍 차가워진 방 안의 공기 속에서 나는 몸을 움츠리며 겨울이 오고 있음을 체감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어진 다짐. ‘어서 밖으로 나가야지.’ 2019년을 한 달 남긴 11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이번 해가 가기 전에 나는 하고 싶은 걸 한 번쯤 실컷 해보기로 했다. 지금 가장 간절한 것,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 언제나 그립고 아쉬운 것.
나의 가슴 속에는 언제나 ‘산에 가고 싶다’는 열망이 심장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그리고 ‘원 없이 달려보고 싶다’는 소원도. 마침 진행하던 잡지의 프로젝트를 마무리 짓고 보름 정도의 시간을 낼 수 있었다. 나는 일상의 정해진 루틴에서 벗어나 좀 멀리, 좀 길게, 좀 많이 달리고 싶었다.
가까우면서 따뜻하고 산이 많은 나라
나는 달리기를 좋아하지만 달리는 데까지 언제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와 결심이 필요하다. ‘인간은 달리기 위해 태어났다’는 어느 책의 명언도 내 경우엔 적어도 1시간쯤은 생각 없이 달려야 어렴풋이 이해되는 것 같다. 이유는 단순하다. 달리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번번이 숨이 차고 다리는 무겁다. 더욱이 추운 겨울에는 더더욱 그렇다. 가뜩이나 힘든데 춥기까지 하니 몸은 움츠러들고 달리기는 점점 삶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다가 떠오른 곳이 ‘홍콩’이었다. 12월의 홍콩은 덥지도 습하지도 않으니까. 더욱이 비행기로 3시간 반, 깜빡 졸다가 깨면 도착해 있을 만큼 우리나라와 가깝기까지 하니 피로도 덜하다. 홍콩이야말로 달리기에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성지인 셈이다.
무엇보다 홍콩에는 산이 많다. 란타우 피크와 선셋 피크는 해발 0m의 해안에서 치솟아 천고지에 육박할 만큼 높고 장쾌한 규모를 자랑하며, 해발 957m의 홍콩 최고봉 타이모산은 겨울이 없는 이 나라에서 1월이면 눈을 볼 수도 있는 유일한 곳이다. 이 타이모산을 거쳐 신계지를 횡단하는 100km의 맥클로즈 트레일, 신계지와 주룽반도를 남북으로 잇는 85km의 윌슨 트레일 등 산이 없이는 홍콩도 없다.
이번 여정에서 내가 원하는 건 처음부터 분명했다. 홍콩의 거의 모든 산을 만나보고 돌아오는 것, 그리고 그 산을 최대한 달려보는 것. 완차이역의 다운타운에 위치한 호텔을 베이스캠프로 삼고 홍콩의 여러 산과 트레일과 섬을 두루 둘러볼 수 있는 코스로 일정을 짰다. 매일 바삐 움직여야 하는 강행군이었지만 팍팍하다고 여겨지지는 않았다. 온전히 자연을 느끼고 그 속의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으니까.
여기선 모두가 달리는 것 같아
도착 첫째 날부터 나는 이 도시에 놀랐다. 길을 가다 보면 항상 어딘가에 달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출근 시간인 9시에도, 점심 시간인 12시에도, 해가 중천에 떠서 뙤약볕이 지글대는 한낮에도. 어둠이 깔리면 달리는 사람들은 더 많이 늘어났다. 그날의 업무를 마치고 가벼운 러닝셔츠와 팬츠로 갈아입은 뒤 저녁 운동을 하려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타나 빠른 속도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람들은 거리를, 학교 운동장을, 경마장 트랙을, 공원을, 숲을, 선착장을 달렸다.
달리는 사람들은 산에 더 많았다. 홍콩 본섬의 선착장에서 페리를 타고 짧게는 20분, 길게는 1시간이면 이 나라의 어느 섬이든 넉넉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섬은 곧 산이었고 산은 곧 길이었다. 경사가 가파르고 노면이 거친 우리나라의 등산로와 달리 홍콩의 트레일은 남녀노소 누구든지 쉽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비교적 매끈하게 정비된 편이다. 보고 있으면 달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 수밖에 없는 그런 길.
몸에 밀착되는 5L 남짓한 작은 트레일 배낭을 메고 등산화보다 가볍고 날렵한 트레일 러닝화를 신고 사람들은 산등성이를 달렸다. 혼자 달리는 사람, 무리 지어 달리는 사람, 산보하듯이 여유롭게 달리는 사람, 뒤도 안 보고 달리는 사람. 이곳 사람들에게 달리는 일은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인 듯했다. “이곳은 모두가 달리는 것 같아.” 그들의 모습이 너무 즐거워 보여서 나도 덩달아 달리고 싶어졌다.
그렇게 그들과 함께인 듯 홀로 남중국해의 크고 작은 섬들을 유영했다. 용의 등처럼 구불구불한 산길의 모양이 인상적인 드래곤스백 트레일, 수목이 낮은 산 위로 뱀처럼 마르고 긴 황톳빛 트레일이 하늘까지 닿을 듯 이어지는 란타우 트레일, 푸른 숲과 해변에 잇닿는 길을 걸으며 섬의 끝에서 끝을 종단하는 라마섬 트레일 등 다정하면서도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홍콩의 섬과 산과 길에서 나는 세상 다른 무엇도 필요 없는 기분을 가질 수 있었다.
해발 0m에서 천고지의 란타우 피크를 향해
여행의 화룡점정을 위해 나는 현지에서 열리는 트레일러닝 대회에 출전했다. 대회는 홍콩 최대 섬인 란타우섬의 란타우 피크와 선셋 피크를 달리는 ‘란타우 50K’라는 이름의 레이스로, 누적 상승 고도가 무려 3000m를 웃돌 만큼 난이도 높은 코스로 유명하다. 누적 상승 고도 3000m면 설악산 오색에서 대청봉까지 2번을 왕복해야 겨우 채워지는 고도다. 그럼에도 홍콩 현지인들에게 인기가 좋아 50km 단일 종목 참가자만 500여 명이 훌쩍 넘었다.
몸에 밀착되는 5L 남짓한 트레일 배낭을 등에 메고 등산화보다 가볍고 날렵한 트레일 러닝화를 신고 몸을 가열하며 달려나갈 준비를 하는 사람들 틈에서 나 또한 내 이름이 적힌 배번을 달고 수통에 물을 채웠다. 차가운 밤공기 틈으로 비장함이 흘렀다. 오랜만의 대회 출전에 긴장됐지만 동시에 기대감이 고조되었다. 분명 모든 걸 다 놓아버리고 싶을 만큼 멋진 풍경이 눈앞에 펼쳐질 테니까.
이윽고 시작된 카운트다운. 새벽녘 홍콩의 어둠을 밟고 앞으로 나아갔다. 초반 3km 구간은 퉁청東通 시내의 도로를 달렸다. 헤드램프 빛에 반사되는 이정표를 따라 속도를 올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남자 선두권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오버페이스를 했구나’ 싶어질 무렵 나타난 우아우牛凹 마을의 등산로 입구. 란타우 국립공원의 일부 구간이다. 본격적인 레이스는 이곳부터다. 색색거리는 호흡을 가다듬고 빠른 걸음으로 경사진 계단을 치고 올랐다.
그리고 이어지는 산의 능선. 다시 속도를 내야 하는데 오르막을 오르는 동안 힘을 많이 썼는지 숨이 가쁘다. 그럼에도 다시 달린다. 정신없이. 여기서부터는 이제 어디를 어떻게 달렸는지 희미하다. 뭔가를 기억할 여유조차 없이 달려야 하므로. 깊고 어두운 숲 사이를,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가파른 내리막을, 다시 이어지는 이름 모를 낮은 산들의 정상을.
언제나 그럴 수밖에 없다. 원하는 기록을 향해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레이스의 순간에 충실하다 보면 많은 것을 놓칠 수밖에. 그저 달리다 흘깃 바라본 하늘이 있을 뿐이고 또 달리다 흘깃 굽어본 바다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앞에서 뒤에서 끝없이 달리고 달리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고 그 사이에서 멈추지도 걷지도 달리지도 못하는 애매한 내가 있을 뿐이다. 이 번잡한 마음을 아는지 저 멀리 포린사원寶蓮禪寺의 거대 청동 좌불상이 그림처럼 웃고 있다.
환희와 체념과 후회와 다시 열망과
홍콩의 산에서, 길에서, 섬에서 나는 생각했다. 무엇이 우리를 달리게 하는가. 홍콩에 머무는 동안 나는 달리는 사람들의 달리는 이유에 대해 조금, 그리고 내가 달리는 이유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언제나 그랬듯 몇 마디 말로 금세 답할 수는 없었다. 분명한 것은 멈추지도 걷지도 달리지도 못해서 애매해지더라도 다음 날, 또 다음 날이면 모든 것을 잊고 다시 산을 생각하는 내가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언제나 몸이 먼저 반응하는 산 앞에서 나는 종종 ‘내 본연의 모습과 마주한다’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그리고 그 착각을 진실이라고 믿으며 그 믿음을 이 세상으로부터 지켜내려 노력하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혹은 너무 많은 생각 속에서 걷고 달리다 보면 내 전 생애의 어느 맥락에서 까닭 없이 마주치곤 한다. 그건 나의 과거이기도, 현재이기도, 미래이기도 하다. 동시에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기도 하고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10km, 20km, 30km… GPS 시계 속 고도와 거리가 서서히 채워지고 경사에 따라 나를 둘러싼 풍경이 시시각각 달라지고 환희, 희열, 무념, 체념, 감탄, 원망의 감정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앞에서 뒤에서 누군가가 달리고 달리는, 이 세상 모두가 달리는 것 같은 순간을 지났다. 이렇게 또 한 번 신나게 달리고 나면 나는 또 이전과 조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겠지. 그게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도 최소한 ‘달리는 사람’은 될 수 있겠지.
다만 내가 바라는 대로 달릴 수 없고 원하는 곳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또 홍콩의 산에서 배웠다. 목표를 이루겠다는 야심이 나를 지치게 했고 40km 지점인 팍쿵아우伯公坳에서는 모든 체력이 고갈됐다. 문득 이게 다 뭔가 싶어졌고 그만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DNF(Do Not Finish)를 했다. 결승선을 고작 10km 앞두고.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처음부터 잘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장보영(@purnare)은 마운틴러너Mountain Runner다. 스물다섯 살에 처음 오른 지리산에서 산이 좋아졌고 그 순간 앞으로 이 세상의 모든 산에 오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오르고 오르다가 산도 달리기 시작했고 등산 잡지도 만들었다. 월간 <사람과 산>, 계간 등에서 에디터로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