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그림을 그리게 된 것도, 글을 쓰게 된 것도 모두 추억을 더 잘 기록하기 위한 과정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기록이 단순히 습관을 넘어 집착이 된 계기는 단연 여행, 그리고 만년필이었다.
잊어버리기 아까운 기억들
홀로 떠나는 것을 즐기는 나는 여행자의 신분이 되었을 때 종종 기록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이 여행을 기억해줄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인데 지금 이 감정을 다 잊어버리게 된다면 어쩌지? 길 위에서 느끼는 기쁨, 길을 헤매는 두려움, 크고 작은 발견과 깨달음 등 모든 것이 나의 몫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카메라에 손이 갔고 부지런히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하지만 여행 중 맞닥뜨리는 생생한 감정을 담아내기에 사진은 턱없이 부족했다. 흙먼지가 날리는 태국 빠이Pai 지역의 산길 사진을 들여다본다. 노을이 번질 무렵 찍힌 하늘의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 그러나 당시 내가 자전거로 산길을 달리며 마음이 얼마나 벅차올랐는지, 빠르게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며 마을에 도착하기까지 내심 얼마나 불안했는지, 인적 드문 그 산길이 얼마나 낯설었는지, 한편으로는 스스로가 얼마나 대견했는지 등 일련의 감정은 설명되지 않는다. 게다가 어떤 기억들은 시간이 지난 후 쉽게 변질되기 일쑤였다.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숙소의 열쇠 사용법을 몰라 문 앞에 쭈그린 채 호스트를 기다리며 찍은 사진은 그저 파리의 낭만적인 거리 이미지에 불과했고, 공항에서 짐을 잃어버려 불안한 마음으로 찍은 사진도 단지 비엔나의 매력적인 야경으로 남았다. 지나간 시간이라고 해서 예쁘게만 포장되는 건 싫었다. 여행지에서 경험한 짜증스러운 감정조차 특별한 에피소드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사진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준 건 글과 그림이었다. 글을 통해 훨씬 직설적이고 구체적으로 남은 순간들, 부족한 부분은 그림이 부연했다. 여행 끝에 글과 그림이 빼곡한 노트를 얻는 건 덤이었고, 덕분에 나의 오래된 기억은 탁월하게 보존되었다. 그즈음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카메라에서 해방된 나는 대신 새로운 도구에 대한 열망을 키우기 시작했다. 편의점에서 구입해 주머니에 대충 찔러 넣고 다니던 플라스틱 볼펜이 불만스럽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초심자의 호주 기록법
어느 여름, 8월의 더위를 뒤로하고 겨울을 맞이한 호주로 2주간의 여행을 계획했다. 출국 당일, 나는 가난한 대학생 배낭여행자였지만 면세점에서 첫 만년필을 한 자루 샀다. 모처럼 떠나는 긴 여행을 제대로 기록해보겠다는 각오가 덜컥 구매욕을 부추겼다. 평소였다면 무난한 검은색을 골랐을 텐데 들뜬 마음에 샛노란색을 집어 들었다. 3만원 남짓한 라미 만년필은 굉장히 저렴한 만큼 대중적이라는 장점이 있었다.
통통하면서 유난히 가벼운 플라스틱 펜대 덕분에 초보자인 나도 금세 손에 익힐 수 있었다. 병에 담근 펜촉을 안정적으로 받쳐주는 지지대와 충전 중 흘리기 쉬운 잉크를 닦는 패드가 달린 잉크병에서 신출내기를 향한 배려심도 느껴졌다. 이 만년필과 함께 호주를 여행하는 동안 나는 카트리지를 어떻게 교체하는지, 컨버터에 잉크를 어떻게 채워 넣는지, 펜촉을 어떻게 분리해서 세척하는지 등을 익혀나갔다.
마음에 쏙 드는 도구가 생겨서인지 여행 내내 유독 기록하고 싶은 순간이 수시로 찾아왔다. 시드니의 세찬 바람을 뚫고 본다이 비치Bondi Beach로 가는 버스를 탔다. 비수기인 겨울이었지만 한국의 가을 날씨 정도로 선선한 기온 때문인지 버스에는 젊은 여행자들이 가득했다. 대부분 서핑이나 해안 절벽을 따라 트레킹을 하려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시끌벅적한 버스의 창가 자리에 앉아 곧장 노트를 꺼내고 만년필을 손에 쥐었다. 해안을 둘러싼 높은 건물도, 저 너머의 육지도, 섬도,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가 창밖으로 펼쳐졌다. 바다라면 지금껏 질릴 만큼 봐왔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의 풍경은 유난히 거대하게 다가왔다. 서큘러 퀘이Circular Quay 항구로 가는 날도 마찬가지였다. 온종일 도시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 오후 늦게 항구에 다다랐다. 바다가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고 근처 레스토랑이 손님맞이로 한창 분주할 무렵, 컬러풀한 하늘에 정신이 팔린 채 걷다 보니 어느새 항구 끝자락에 와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커다란 말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정박한 배를 고정하기 위해 박아놓은 말뚝은 바다를 코앞에서 직관할 수 있는 숨은 명소였다. 그때 만년필을 부지런히 움직였던 나는 이런 말을 끄적였다. “항구 끄트머리의 말뚝 위에 앉아 맞은편에 있는 시드니 오페라하우스Sydney Opera House를 본다. 하얗던 오페라하우스가 저물어가는 햇빛에 반사되어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긴 건축물 혹은 관광객을 위한 랜드마크라고만 생각했는데, 일몰과 어우러진 모습은 충격적일 정도로 인상적이라 눈을 떼기 어렵다.”
대만에서 더 거침없이, 더 즐겁게
졸업 후 직장인이 되었고, 짧은 휴가를 얻어 타이베이로 가는 비행편을 예약했다. 이번 여행에서는 대만 골목 곳곳에 숨어 있는 작은 상점들을 모조리 탐방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나의 목적지 리스트에는 여러 문구점과 편집숍도 포함되었다.
그렇게 방문한 곳 중 하나가 바로 푸진 스트리트Fujin Street에 자리한 푸진 트리 355Fujin Tree 355다. 야트막한 계단을 올라 유리문을 여니 옷, 도자기, 화병 등 온갖 소품이 잔뜩 놓여 있었다. 그리고 상점 구석에는 긴 나무 테이블 위에 처음 보는 만년필과 알록달록한 잉크병이 즐비했다. 투명하고 도톰한 플라스틱 펜대에 더해진 금장클 립과 펜촉.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소재의 조화가 캐주얼과 클래식 사이의 경계를 묘하게 넘나들었다. 카키모리에서 만든 이 만년필은 몸통이 투명해서 채워 넣은 잉크의 색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잉크색에 따라 만년필이 풍기는 분위기가달 라진다. 진열대 앞을 서성이는 내 옆으로 점원이 조용히 다가와 직접 사용해보라며 펜을 건넸다. 못 이기는 척 받아 든 카키모리 만년필은 배가 불룩한 유선형 펜대가 내 손에 꼭 들어맞았다. 그리고 허공에 휘두르는 제스처를 취하며 무게감을 느끼다가 테스트 용지에 필기하는 순간, 마음을 정했다. 이보다 글쓰기에 더 완벽한 만년필은 없어! 이 만년필은 펜촉이 아주 얇아 적은 양의 잉크로도 글을 쓸 수 있었고 쉽게 번지지도 않았다. 또한 펜촉이 굵기에 비해 단단해 거침없이 사용하기 좋았다.
새로 산 카키모리 만년필의 용도를 글쓰기로 정하고 나니 작화에 알맞은 만년필에도 욕심이 생겼다. 다안구Da’an District에 위치한 툴즈 투 리브바이Tools to Liveby를 찾았을 때는 보다 분명해진 기준으로 만년필을 살폈다. 자체 제작한 문구 제품을 해외 곳곳으로 수출하는 이 문구점은 생각보다 작고 허름했다. 이 창고 같은 곳이 본점이라고? 의구심을 가지고 들어선 내부에서는 점원과 손님이 심도 깊은 토론을 이어가고 있었다. 여러 자루의 만년필을 늘어놓고 고심하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영화 <해리 포터> 속 올리밴더의 지팡이 가게가 떠올랐다. 마침내 먼저 온 손님이 떠나고 점원이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미리 봐둔 유리처럼 투명한 광택을 자랑하는 자주색 만년필을 가리켰다. 사용해본 적이 있냐는 그의 질문에 나름의 일대기를 풀어놓았고 지금은 여행 스케치용 만년필을 찾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자주색 만년필을 테스트해보는 사이 점원이 심플한 검은색 만년필을 내밀었다. 클래식한 장식조차 생략된 이 펜은 생각보다 꽤나 무거웠다. “금속으로 만들었어요. 꾸밈이 없고 단출해 여행 중에 가지고 다니기 좋을 거예요. 노트 사이에 끼우거나 작은 포켓에 넣을 수도 있죠!” 도톰한M 촉은 확실히 그림을 그리기에 적절해 보였다. 얇은 촉에 비해 잉크가 많이 나와 쉽게 번졌지만 되레 넉넉하게 나온 잉크를 활용해 넓은 면을 색칠하기 좋았다. 지금은 워낙 많은 여행 스케치에 활용한 탓에 몸체에 새겨져 있던 로고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변함없이 내 마음을 사로잡은 채 그림 전용 만년필로 남아있다.
여행 중에 마주치는 비는 반기지 않는 편이지만 타이베이에서는 예외였다. 비가 내리는 동안 운치가 더해졌고, 갑작스런 비를 피해 카페에 들어가면 물기를 털고 바로 만년필을 꺼내곤 했다. “시시때때로 내리는 대만의 겨울비는 ‘추적추적’이라는 소리가 딱 어울린다. 한 번에 많은 양이 내리지는 않지만 천천히, 묵묵히, 오랜 시간에 걸쳐 떨어진다. 그렇게 서서히 젖어든 도시는 더욱 짙고 채도 높은 색감을 뽐낸다. 도시에 가득한 나무들도 비에 생기를 얻어 활기찬 초록을 드러내고 후텁지근했던 공기는 더없이 청량해진다”는 글과 우산을 쓴 사람들이 타이베이 101 빌딩 앞을 지나는 그림은 여전히 나를 그곳의 낭만 속으로 이끈다.
만년필 길들이기
만년필에 대해 알아갈수록 그 방대한 세계에 놀라곤 한다. 마니아도 많은 분야인데다 매우 다양한 브랜드와 제품이 존재해 어떤 게 좋은 만년필이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다. 심지어 3만원, 5만원짜리 외에 고가의 만년필은 손에 쥐어본 적도 없는 내가 감히 ‘좋은 만년필’에 대해 논할 수 있을까. 하지만 ‘좋아하는 만년필’을 물어본다면 얼마든지 답할 수 있다. 펜대가 내 손 크기에 딱 맞는, 가느다란 펜촉 덕분에 글을 빠르게 쓸 수 있는, 묵직한 무게가 그림을 그릴 때 안정감을 주는, 오랜 시간을 함께한 만년필. 간혹 관리가 필요해 성가실 때도 있지만 결국 자주 쥘수록 나에게 맞춰 길들여지는 나만의 펜. 튜브에 든 잉크가 떨어지면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여타 펜들과 비교하기 어려운 농익은 매력이 있다. 만년필에 잉크가 다 닳으면 펜을 분리하고 물에 담가 펜촉과 컨버터 주변에 말라붙은 잉크를 녹여낸다. 구석구석 꼼꼼하게 물기를 닦고 재조립한 뒤 잉크병에 펜촉을 담근다. 빈 컨버터에 까만 잉크가 주욱 차오르는 것을 보며 새로운 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고조시킨다. 다시 부지런히 쓰고 그려야지, 끊임없이 기록해야지!
※손수민은 도시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다. 택시나 대중교통을 타기보다 운동화를 신고 골목 구석구석을 다니거나 영어 메뉴판이 없는 현지 식당에 들어가 일부러 낯선 메뉴에 도전하는 모험형 여행자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저는 아직 서울이 괜찮습니다>가 있다. @ugly.but.goo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