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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안개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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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7월호

 

“유벤투스, 페라리, 라바짜, 바롤로. 토리노의 안개가 만든 명품들.”

 

에스프레소, 우유, 시리얼로 구성된 이탈리아식 아침식사.

와인의 왕이라 불리는 바롤로 와인을 만드는 네비올로nebbiolo 포도는 안개nebbia라는 밑말을 가진다. 봄이 되면 지중해에서 불어온 습한 바람이 알프스의 산등을 넘지 못하고 진한 안개가 되어 피에몬테의 바롤로 평원에 오래 머문다. 이것을 푄 현상이라 하는데, 이슬점 감률을 만나 비를 뿌린 공기는 알프스를 넘으며 따뜻하고 건조한 높새바람이 되어 스위스의 계곡을 쓰다듬듯 내려간다. 알프스의 만년설이 녹아 흐른 차롬한 시내는 비가 된 지중해를 맞으며 이탈리아 북부를 관통해 아드리아해로 흘러든다. 그래서 포po강 주변의 퇴적한 땅에는 산과 바다의 미네랄이 공존한다. 특별한 물기를 머금은 이 피에몬테의 곡창에서는 명품 쌀 아퀴넬로가 자란다. 윤기 있는 밥알 위에 알프스의 남쪽 산기슭에서 자란 먹빛 송로버섯과 세피아 색 감자, 회녹색 세이지 허브가 은은하게 물든다. 구름이 내려앉아 하늘이 무거운 이곳의 밥은 뜸이 깊게 든다. 밥의 찰진 식감에 천착하는 한국인에게조차 메지지 않고 차지다. 피에몬테의 리소토는 시칠리의 파스타, 나폴리의 피자와 더불어 이탈리아 미식을 견고하게 지탱한다. 아퀴넬로acquerèllo는 이탈리아어로 수채화다. 

 

여물어가는 밀밭의 전경.

조식, 이불을 개지 않을 권리


피에몬테의 주도는 토리노다. 세계적인 축구클럽 유벤투스의 홈구장 알리안츠 스타디움이 위치하며, 빨간색 스포츠카 페라리부터 피아트, 알파로메오 같은 양산차 브랜드까지 유럽 자동차 산업의 메카다. 또한 알뜨레노띠 같은 명품 침구류와 수제화, 패션 브랜드들이 그해 세계의 유행을 선도한다. 월드컵과 동계 올림픽을 둘 다 개최한 토리노는 경제 규모로 유럽에서 10위권에 드는 부유한 소비도시이다. 역사적으로는 통일 이탈리아의 첫 수도였기에 토리노제들은 문화적 자긍심이 상당하다. 알프스의 남쪽 기슭에 펼쳐지는 분홍빛 낙조가 끝나면 젊은이들은 펍에 모여 맥주 한잔을 기울인다. 노블레스를 자처하는 토리노제들의 북부 사투리가 강렬하다. 이탈리아 밥 요리를 두고 로마의 남쪽에서는 리소토, 북쪽에서는 리조또로 발음한다. ‘쌀’과 ‘살’처럼 이탈리아 사람들의 출신 지역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피에몬테식으로 리소토를 주문하고 쌀로 만든 맥주birra al riso를 마신다. 특히 흑미로 만든 흑맥주nera birra al riso venere는 아이리시 기네스와 견줄 만하다. 쌀로 만들었지만 걸쭉한 막걸리와 달리 맑고 청량하다. 맥아의 효소를 이용해 전분을 모두 당으로 바꾸어 술을 담갔기 때문이다.

토리노의 맑고 촉촉한 공기에 산란하는 태양빛은 알프스의 산기슭을 도화지 삼아 시시각각 다른 색을 칠한다. 저녁의 산이 은은한 로코코 핑크였다면, 아침의 토리노는 영롱한 에메랄드다. 낯선 아침 햇살이 이방인의 단잠을 깨운다. 침대에서 몸만 빠져나와 마주한 조식은 끼니라기보다는 바뀐 환경을 확인하는 첫 의식이다. 공간은 선형적으로 펼쳐져 있어 여행한 거리만큼 떨어지지만 시간은 매일을 순환하기에 아침이면 그대로 제자리에 돌아와 있다. 멀리 떨어진 공간과 다시 돌아온 시간의 사이를 메워주는 것이 그곳 문화와의 첫 조우, 조식이다. 각색의 파스타와 초리조, 살라미 같은 샤퀴트리까지 이탈리아의 조식은 화려하다. 그러나 피에몬테의 아침이라면 시리얼을 챙겨 먹는 것이 맞다. 현미roso integrale, 흑미riso venre, 홍미riso rosso 같은 피에몬테 쌀과 대머리 보리orzo pelato, 이탈리아 밀farro 등 잡곡을 눌러 바삭하게 굽고 알프스 능선의 산개암 열매 헤이즐넛을 곁들인다. 우유 대신 두유latte di soia나 쌀로 만든 미유latte di riso를 부어 먹는다. 반건조한 모스카토 포도와 아란치아 오렌지를 올리면 산monte의 발목pied이란 이름의 피에몬테 들녘이 접시 위에 그대로 재현된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아침 루틴으로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내려 마신다.

작은 잔 속의 삼단 논법, 비체린


로마에는 타짜도르, 베네치아에는 일리, 나폴리에는 캄보가 있다. 그리고 토리노에는 세계적 커피 브랜드 라바짜lavazza가 있다. 문화적으로 가진 것이 많은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에스프레소 커피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자산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지키는 루틴의 경험은 귀납적 삼단 논법을 통해 명제로 굳어지는데, 이탈리아 사람들은 기상청의 일기예보보다 데미타스demitasse잔의 날씨점을 더 믿는다. 에스프레소 위의 갈색 거품인 크레마가 잔의 가장자리부터 없어지면 고기압의 맑은 하루가 되고, 가운데부터 사그라지면 이내 비가 내린다. 그래서 아침에 에스프레소를 마신 이탈리아 사람은 우산 없이 비를 맞는 일이 없다. 토리노에서 커피만큼 많이 마시는 음료가 핫초코다. 헤이즐넛과 카카오로 만든 핫초코 잔두야gianduja는 카카오가 유럽으로 들어온 직후 토리노에서 만들어졌다. 잔두야는 아직까지도 스위스의 밀크 초콜릿과 더불어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초콜릿이다. 페레로의 누텔라라는 상표로 유명한 헤이즐넛 초콜릿 페이스트가 바로 잔두야다. 스프레드 형태의 누텔라와 단단한 로쉐 모두 토리노의 헤이즐럿을 넣어 만든 잔두야 초콜릿이다. 로쉐는 바위라는 뜻이고, 누텔라는 달콤한 땅콩이란 의미다.

비체린bicerin은 초콜릿과 에스프레소로 만드는 토리노만의 뜨거운 음료다. 잔두야를 작은 잔에 두르고 그 위에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커피를 내린다. 그리고 우유 거품을 얹어 세 가지 색의 층을 만든다. 1, 1, 2, 3, 5, 8, 13… 토리노제들은 비체린의 세 가지 색과 맛의 비율을 피보나치 수의 황금비에 비유한다. 그들은 의미가 없어 보이는 모든 것에는 사실 뭔가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에스프레소의 쓴맛과 잔두야의 단맛은 정확한 비율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토리노의 비체린은 주방에서 완벽하게 제조된 후 손님 테이블로 나온다. 다른 커피처럼 기호에 맞게 시럽을 첨가하거나 크림을 더할 수 없다. 토리노 카페의 바리스타는 “비체린의 비율은 하나가 행복하려면 다른 하나가 눈물을 흘려야 하는 감정의 방정식과 같다”고 말한다. 

 

안개 낀 바롤로 평원.

토리노의 말


1889년 1월 3일 알베르토 광장. 토리노 하숙집에 앉아 도스토옙스키를 읽던 니체는 근처 카페 바라띠baratti에서 비체린 한 잔을 마시기 위해 거리로 나선다. 스물다섯의 니체는 핫초코를 좋아했다. 니체는 문 앞에서 마부에게 채찍질당하는 말을 보게 된다. 그는 갑자기 말을 끌어안고 오열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이성적인 철학자였던 니체는 이 사건 이후 사유의 끈을 놓고 단순한 감정만을 가지고 살아간다. 신이 죽었다고 한 니체의 말도 사라지고 일이 싫어 멈춰 선 말도 사라진 토리노에는 말 모양의 엠블럼을 단 빨간 스포츠카가 달린다. 신이 죽은 세상에도, 노동이 죽은 세상에도 또 새로운 조화가 깃든다. 진정한 아름다움이 미가 아닌 선인 것처럼, 잘 배합된 비체린의 맛도 달콤함이 아닌 쓴맛에 방점이 찍힌다. 고통의 역치를 즐기는 비체린의 잔은 작아야만 한다. 토리노제들이 사랑하는 작고 쓰고 짠 에스프레소 한 잔. 풍요로운 삶은 흠집 없는 인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불행을 직면하는 방식에 있다. 고통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사랑하지 말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운명을 사랑하라고 니체는 말했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정상원은 프렌치 파인 다이닝 ‘르꼬숑’의 문화 총괄 셰프다.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부에서 유전공학과 식품공학을 전공한 특이한 이력이 눈에 띈다. 미식 탐험을 위한 안내서 <탐식수필>을 통해 요리에 문화, 예술, 철학 등 서사를 덧입히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글. 정상원SANG-WON JUNG
사진.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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