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구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다
맛본 온갖 달콤한 것들에 대하여.”
고상한 초콜릿
초등학교 여름방학 숙제로 읽었던 <초콜릿 전쟁>이라는 책은 어린 시절 디저트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이야기는 일본의 어느 작은 도시 S시에 위치한 제과점에서 시작된다. 금천당의 각종 빵과 디저트류는 동네 아이들의 시험 성적을 향상시킬 정도로 환상적인 맛을 자랑한다. 특히 이곳에서 파는 에클레어를 맛본 아이는 모두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 그런 금천당의 진열장에는 과자로 만든 커다란 초콜릿 성이 들어서 있는데, 어느 날 주인공인 고이치와 친구 아키라가 그것을 구경하는 사이 갑자기 진열장의 유리가 깨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린 주인공은 금천당의 명성에 흠집을 내기 위해 그곳의 상징인 초콜릿 성을 훔치기로 계획한다. 이 흥미진진한 스토리 안에는 다양한 디저트의 모양과 맛과 특성에 관한 군침 도는 묘사가 곳곳에 숨어 있다. 당시 나에게 생소한 디저트였던 에클레어의 설명은 장장 두 페이지에 달했는데, 덕분에 ‘너무 맛있어서 번개처럼 순식간에 입속으로 사라지는 케이크’라는 문장이 에클레어를 먹을 때마다 떠오른다. 에클레어의 길쭉한 슈 안에 몽글몽글한 크림을 표현한 그림 역시 잊히지 않는다. 그때 생긴 환상으로 간식은 나의 일상에 필수 요소로 자리 잡았고 지난 8월 하나의 디저트 루트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예민한 캐러멜
망원역 1번 출구에서 곧은 방향으로 15분 정도 걸으면 프랑스의 어느 보석 가게를 연상시키는 수제 캐러멜 상점 ‘슈아브’를 마주하게 된다. 앤티크한 샹들리에가 손님을 반기고 널찍한 나무 테이블 위에는 촛대와 마카롱탑과 우아한 접시가 놓여 있다. 접시 안을 채운 것들은 모두 수제 캐러멜. 오리지널 소금, 라즈베리, 홍차, 코코넛 등 16가지 플레이버가 다채로운 색감을 뽐내고, 고급스러운 은색 집게를 들어 하나씩 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예전에는 쇼케이스에 캐러멜을 진열하고 손님이 선택하는 것을 꺼내 드리는 식이었어요.” 김용래 셰프의 이 같은 방식은 마치 보석 가게 점원이 하얀색 면장갑을 낀 채 반지를 꺼내 보여주는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상점 한편에 자리한 아틀리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매우 분주하다. “수제 캐러멜을 만들 때 제일 중요한 건 식감이에요. 맛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입에 넣는 순간 얼마나 말랑한지, 딱딱한지, 흐물거리는지, 그 부분을 결정짓는 게 온도인데 1℃ 차이에도 식감이 크게 달라져요.” 셰프의 설명을 들으며 캐러멜 고유의 맛을 가장 잘 낸다는 오리지널 소금 캐러멜을 입에 넣어봤다. 치아에 달라붙으며 한바탕 사투를 벌이게 될 것이라는 예측과 달리 적당히 말랑한 캐러멜이 매끈한 뒷맛을 남긴다. 이는 190℃, 120℃에 이르는 각각의 배합 시점에 생크림, 버터 등을 알맞게 넣었기 때문이다. 온도를 정확하게 맞추더라도 냄비의 종류나 재료를 젓는 속도에 따라 결과물은 다시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수제 캐러멜은 끊임없는 도전과 감각적인 장인 정신을 요구한다. 세공 중 미묘한 기술 차이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보석과 견줄 수 있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수제 캐러멜은 재단과 포장으로 완성된다. 김용래 셰프는 캐러멜을 가로세로 각 2.2cm 정사각형으로 자른 뒤 손수 포장지에 돌돌 싸매고 도장을 찍어 내놓으며, 구매 개수를 채우면 사각뿔 상자에 담아 주기도 한다. 덧붙여, 슈아브에서는 수제 캐러멜 외에 마카롱과 푸딩을 함께 선보인다. 총 10가지 맛의 수제 마카롱은 캐러멜을 베이스로 해 풍미가 깊다.
MAKE IT
집에서도 시도해볼 수 있는 오리지널 소금 캐러멜 레시피.
재료 (100개 기준)
물엿 320g, 설탕 540g, 물 적당량, 생크림 600g,
소금 3꼬집, 버터 40g, 천일염 적당량.만드는 방법
1. 동냄비에 물엿, 설탕, 물을 순서대로 넣고 설탕의 색이 변할 때까지 가열한다.
2. 편수냄비에 생크림, 소금을 넣고 가열하다가 50℃가 되면 불을 끈다.
3. ①이 190℃가 되면 ②를 천천히 넣으며 거품기로 섞는다.
4. 계속 가열하다가 120℃가 되면 버터를 넣고 다시 섞는다.
5. 계속 가열하다가 123℃가 되면 불을 끄고 30초~1분 동안 젓는다.
6. 미리 준비한 틀에 ⑤를 붓고 주걱으로 평평하게 만든다.
7. 캐러멜이 굳기 전 천일염을 뿌리고 냉각한다.
8. 캐러멜이 냉각되면 틀에서 분리하고 실리콘 패드나 테플론 시트 위에서 일정한 크기로 자른다.
뒤끝 없는 젤라토
망원로8길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망원시장은 보슬비가 내리는 날에도 활기를 띤다. 시장 중앙으로 들어서자 가판대에 자두, 황도 복숭아, 체리, 토마토 등을 잔뜩 쌓아 올린 농산물 직판장이 눈에 들어온다. 그 뒤로 고소한 부침개 냄새가 새어 나오고 두부, 어묵, 족발, 홍어무침 등 맛깔난 음식들이 발걸음을 멈춰 세운다. 망원시장은 주로 망원동 주민들의 식탁을 책임지고 있지만, 식당이나 카페를 운영하는 상인들의 주방에서도 큰 역할을 도맡는 중이다. 망원시장에서 불과 1분 거리에 자리한 젤라토 가게 ‘당도’ 역시 마찬가지다. “망원시장에서는 각종 식재료를 통해 계절의 변화를 보다 가까이 느낄 수 있어요. 그래서 이곳을 돌아다니며 영감을 얻곤하죠.” 부부인 김보슬·김정훈 대표는 ‘젤라토와 이 계절에 집중해보세요’라는 문구를 토대로 여름에는 아오리 사과, 겨울에는 군고구마 등을 시장에서 구입해 젤라토의 기본 재료로 사용한다.
이탈리아의 작은 젤라테리아를 본뜬 가게는 부부가 본토에서 생활하며 체득한 감성이 곳곳에 묻어난다. “시댁이 이탈리아에 있어 남편은 아주 어릴 적부터 젤라토를 접해왔어요. 이탈리아에서 젤라테리아는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해요. 어린아이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매일 들르는 그런 곳이죠.” 이때의 기억을 살려 김정훈 대표는 첫 젤라토를 접한 가게였던 밀라노 외곽의 한 젤라테리아를 찾아가 무급으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약 2년 동안 젤라토의 제조, 세팅, 서빙 등을 익히고 한국에 들어왔다. 지금도 매주 일요일에는 당도의 SNS에 이탈리아 사진들이 업로드되는데, 당시 부부가 여행을 하며 찍었거나 최근 가족과 친구들이 보내준 것들이다. 차곡차곡 쌓은 이탈리아에서의 경험은 당도의 메뉴에서 발현된다. 이태리와인 젤라토는 이탈리아산 와인을 넣어 달큰한 향이 그윽하게 풍긴다. “곧 다가오는 가을에는 커스터드크림 베이스에 와인에 절인 건포도를 넣은 말라가 젤라토가 어울릴 거예요” 이밖에도 당도의 메뉴는 소금, 피스타치오, 개암나무 열매, 쌀, 당근, 무화과 등 변화무쌍하다.
“젤라토는 아무래도 더운 날 많이 찾게 되는 디저트예요. 그래서 저희는 무엇보다 끝맛을 중요시하죠. 재료의 균형을 유지해서 먹고 난 후에도 텁텁하지 않도록.” 조금 전 주문한 바질토마토 젤라토를 맛보면서 김보슬 대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묘사처럼 젤라토를 막 떠서 먹을 때는 바질과 토마토의 존재감이 확실하게 느껴졌는데, 입안에서 포슬포슬 녹은 후엔 그 흔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정한 컵케이크
사거리가 연이어 등장하는 골목 모퉁이에서 누군가 길고양이에게 사료를 주고 있다. 쪼그려 앉은 자세로길 고양이와 눈을 맞추는 모습이 꽤 자연스럽다. 길고양이가 천천히 걸음을 옮긴 곳은 ‘참 좋은 하루’라는 간판을 내건 디저트 가게. 이곳은 지난 5월, 르와지르 제과학교를 졸업한 남하린 대표의 손을 거쳐 문을 열었다. 이 학교는 일본 제과의 명문인 나카무라 아카데미를 수석 수료한 김수경 셰프가 운영하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가게 이름은 ‘안녕하세요’라는 상투적인 말보다 ‘참 좋은 하루예요’라는 따스한 인사말을 건네고 싶은 대표의 마음에서 비롯됐다. 내부를 가득 채운 그림들에서도 그 온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예전에는 문 너머로 보이는 행인들의 발밖에 그리지 않았는데, 지금은 종종 손님들에게 펜과 종이를 나눠드리며 자유로운 그림을 그립니다. 이 공간을 누군가와 함께 채워나간다는 사실이 뿌듯해요.”
건너편 책장에는 <오이디푸스 왕>, <체호프 희곡 전집 >, <비행운> 등 소설, 연극 대본, 시집과 장르를 망라한 다양한 책이 꽂혀 있다. 그녀의 이런 문학 사랑은 베이킹에도 그대로 반영이 되었다. 가게의 심벌이기도 한 시그너처 컵케이크는 동화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집을 모티브로 삼았다. 바닐라 시트 위에 민트색 버터크림과 다홍색 사블레 쿠키를 얹은 모양새가 과자집 위로 두둥실 떠오르는 구름과 태양을 상상하게 한다. 게다가 바닐라 시트를 반으로 갈라야만 보이는 라즈베리 콩포트와 색색의 초콜릿도 판타지적 감성을 부추긴다.
메뉴를 주문하자 남하린 대표가 슬며시 종이 한 장을 함께 건넨다. 작은 메모지에 책에서 발췌한 문장이 손글씨로 적혀 있는데, 내가 받은 글귀는 안희연 시인의 <나는 평생 이런 노래 밖에는 부르지 못할 거야> 일부. 이 ‘참 좋은 문장’은 일종의 쿠폰으로 사용되어 7장을 모으면 아메리카노를 무료로 제공 받는다. 자리에 앉아 컵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물다가 다소 엉뚱한 느낌을 주는 초록색 우체통을 발견했다. 테이블마다 놓인 편지지에 닉네임, 날짜, 기분을 적고 그 안에 사연, 이야기, 아무 말, 고민 등을 담은 뒤 우체통에 넣으면 다음 방문 시에 답장을 받을 수 있단다. 호기심 많은 주인장은 대부분 당일에 답신을 쓰곤 한다고. 그녀는 사회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카운터 아래 ‘Welcome Kids Zone’을 운영한다. 큼지막한 라탄 바구니 안에 장난감을 넣으면 이후 보육시설에 수제 쿠키를 후 원할 때 함께 전달해준다. 이번 디저트 여정은 쏘 스윗! 스위트의 또 다른 정의를 생각나게 한다.
INSIDER
아직 끝나지 않은 촘촘한 디저트 여정.
로컬 피플도 단골이 되어 드나든다는 디저트 숍 3곳.
캔디
세상에서 가장 큰 새였으나 지금은 멸종한 날개 없는 새를 모티브로 삼은 ‘모아새’는 1인 수제 사탕 가게다. 주인장이 호빵맨, 스누피, 가오나시, 엘모 등의 캐릭터를 사탕에 정교하게 디자인한다. 캔디 파우치나 캔디 볼에 원하는 사탕을 담아 무게를 잰 뒤 구매하면 된다. 운이 좋으면 사탕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볼 수도 있다.
서울 마포구 포은로 71
젤리
다소 익숙하지 않은 수제 젤리를 경험할 수 있는 ‘고체’. 매실, 레몬, 자두, 청포도, 블루베리 등 상큼한 과일을 넣어 쫀득한 젤리를 만들어낸다. 최근 MBC에서 방영 중인 <심야괴담회>에 지렁이 젤리를 등장시켜 주목을 받기도 했다. 평일에는 종종 성인과 어린이를 대상으로 젤리 만들기 클래스를 진행한다.
서울 마포구 희우정로 94
에클레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LP판들이 감성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삼공’에서 정제된 디저트를 맛보자. 샤인머스캣 에클레어, 복숭아 쇼트케이크, 레몬 블루베리 타르트, 포레누아 타르트 등 미적 감각을 한껏 발휘한 메뉴들이 진열장을 차지하고 있다. 금・토・일요일에만 문을 열며, 매장 이용 시간이 1시간 30분으로 제한되어 있으니 방문시 참고하자.
서울 마포구 망원로1길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