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제20구는 현대적인 파리의 한 장면을 찰칵하고 찍은 사진 같다. 역사적인 거리 주변으로 이어진 도보를 탐험해보자.
다소 구식이지만 여전히 멋진 프랑스 특유의 매력을 한껏 누리며 전 세계 미식의 향연을 다채롭게 즐길 수 있다.”
파리 근교에 자리한 벨빌Belleville에서는 오전부터 거대한 음식 레슬링 경기가 한판 펼쳐지는 모양새다. 대로에 인접한 인도는 상인들로 북적인다. 아프리카 말리 출신의 식료품 상인이 참마와 질경이가 담긴 포대를 늘어놓고 장사를 한다. 근육질의 중국 일꾼은 청경채와 가지가 담긴 상자를 나르고 있다. 튀니지 출신 상인은 지금 당장 당뇨를 유발한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다량의 설탕을 넣은 튀니지식 뱀발로니bambaloni 도넛 반죽을 튀기는 중이다.
모두 정신없이 움직이는 가운데 달콤한 냄새가 번지고 다양한 색들이 뒤섞이며 경계가 흐릿해진다. 이 거리의 음식들은 전형적인 프랑스 요리와는 전혀 다른, 현대적인 파리가 끓고 있는 가마솥 같다. 여기서는 브르타뉴식 갈레트(일종의 크레이프)와 중국 전병, 프로방스풍 스튜와 모로코식 스튜 타진, 프랑스 전통 바게트와 베트남 반미가 섞여 있다.
파리 현지인이 인정하는 맛집 중 하나인 오폴리즈Aux Folies에 가면 단골손님들이 테라스에서 크루아상과 함께 카페오레를 홀짝이며 이 광경을 느긋하게 지켜본다. “우리는 서로 이웃이에요. 일종의 아름다운 혼합물인 셈이죠.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어요.” 1990년대부터 벨빌에서 일해온 알제리 출신 왈리센하지Wally Senhaji가 이야기한다.
벨빌은 인구밀도가 높고 어디에나 맛있는 음식이 넘쳐나 한가로이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음식을 맛보기에 딱이다. 피레네Pyrénées 지하철역을 향해 이어진 가파른 뤼드벨빌Rue de Belleville 길을 따라 올라가면 깃털처럼 가벼운 시리아식 팔라펠(일종의 크로켓)과 끈적끈적하고 달콤한 광둥식 차슈바오(돼지고기 바비큐 만두), 짭조름한 콜롬비아식 검은콩 엠파나다(튀김만두), 지방이 많은 라오스식 사이우아 소시지, 마늘 향을 입힌 튀르키예식 라마쿤(납작한 빵)을 먹을 수 있다. 또 이곳에는 파리에서 가장 작은 식당도 몇 집 있다. 헤밍웨이가 파리를 움직이는 축제라고 말했는데, 벨빌은 걸어갈 수 있는 축제와 같다.
“이 지역은 매우 강력하고 독립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왈리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띤 채 배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우연히 작은 명소들을 발견하다 보면 열량도 소모돼요.” 총면적이 6km2 정도 되는 파리 제20구는 북쪽의 벨빌에서 시작해 남쪽의 포르트드뱅센Porte de Vincennes까지 뻗어있으며 오랫동안 불경스러운 궤적을 남겨왔다.
1871년 5월 28일에는 파리 코뮌 혁명 정부가 페르라셰즈 공동묘지에서 마지막 저항을 했고, 이때 파리를 장악하는 급진적 봉기를 일으킨 페데레 병사 147명이 처형되었다. 1915년에는 프랑스 음악의 한 시대를 정의한 노동계급이자 극장식당 출신 가수 에디트 피아프가 이곳 벨빌에서 태어났다.
이후 수십 년 동안 20구(르벵티엠le vingtième)는 프랑스 수도의 변두리에 있는 미식의 황무지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 황무지에서도 필립 피노토Philippe Pinoteau가 아내 라켈 카레나Raquel Carena와 함께 르바라탱Le Baratin을 30년 동안 가꿔왔다. “단언컨대 르바라탱은 가장 오래된 비스트로입니다.” 필립이 말한다. “우리가 처음 벨빌에 왔을 때만 해도 이곳은 버려진 땅이었어요. 가난한 사람과 이민자들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결국 이곳을 사랑하게 되었죠. 세속적인 동시에 활기찬 이곳을 말이에요.”
르바라탱은 파리에서 가장 음식을 잘한다는 평판을 받고 있다. 현대적이지는 않지만, 특유의 절제되고 특별한 방식으로 전통 프랑스 요리를 내놓는다. 블랑케트 드 보(송아지 스튜)는 버터처럼 입안에서 살살 녹는 맛이 환상적이면서도 집밥처럼 편안하다. 뵈프 파르망티에(소고기와 감자를 넣은 찜)에서는 농부의 포옹이 느껴지고, 향신료를 섬세하게 배합한 양고기카레 덕택에 인근의 다문화를 수긍하게 된다. 비록 가벼운 요깃거리를 내놓는 와인바로 시작했지만 라켈이 솜씨를 갈고닦으면서 르바라탱은 음식이 더 주목을 받는 곳으로 자리 잡았다.
사실 이 장소를 쉽게 규정하기는 어렵다. 베이지색 벽면 가득 유화가 걸려 있고, 바닥에는 다양한 무늬의 낡은 타일이 깔려 있다. 필립과 라켈은 프랑스산 플뢰르드셀 바닷소금보다 영국산 말돈 바닷소금을 선호한다. 힙스터 소믈리에도 부러워할 만한 다양한 내추럴 와인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두 사람이 미래를 생각하면서 머지않아 근위병 교체가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곳에 아주 오랫동안 머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엔 끝이 있기 마련이죠.” 필립의 말이 다소 슬프게 들린다.
한편 르바라탱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서는 이미 승계가 진행 중이다. 프랑스계 알제리인 셰프 소피아네 사디 아다드Sofiane Sadi Haddad는 몇 년 전 일주일에 두세 번 르바라탱을 찾아가 라켈에게 요리를 배웠다. 당시 그녀는 다른 곳에서 웨이터로 일하고 있었다. “저는 라켈에게 궁금한 모든 걸 묻고 싶었어요.” 소피아네는 비공식적으로 진행된 지난 1년 동안의 교육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소금이 그렇게 많이 들어가나요?’, ‘고기는 왜 그렇게 자르죠?’ 등등 모든 것을 물었고 라켈은 오직 너그러움으로 제게 그 모든 것을 가르쳐주었어요.”
현재 소피아네는 2021년 10월에 문을 연 바벨 호텔의 수석 셰프로 일하고 있다. 그녀는 파리 난민 푸드 페스티벌에서 만난 프랑스계 아프가니스탄인 셰프 클레어 페랄 아크람Claire Féral Akram과 시리아인 하이탐 카라자이Haitham Karajay와 함께 프랑스 음식의 실체를 탐구하는 중이다. 주방에 있는 송아지 골은 빵가루를 입혀 튀긴 다음 요구르트에 다진 고수를 넣어 만든 라이타raita와 함께 내놓는다. 로제르산 양고기로 속을 채운 육즙 가득한 만두는 현지 중국인 공동체에 대한 경의를 표한다. 바삭하고 부드러운 슈 반죽에 프랄린 맛 크림을 더한 고전적인 파리-브레스트Paris-Brest 디저트에 피스타치오와 장미꽃 주름을 장식한 ‘파리-다마스쿠스Paris-Damascus’는 중동의 달콤한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소피아네는 이처럼 외부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babel-hotels.com
풍부한 식재료 또한 르벵티엠에 영감을 준다. 벨빌에 있는 여섯 곳의 시장은 프랑스 농장 공급망을 통해 주민들에게 매주 여러 차례 신선한 농산물을 공급한다. 20구 남쪽 끝에 위치한 마르쉐 레위니옹Marché Réunion은 주목받는 곳은 아니지만 탁월한 미식 시장이다. 고르곤졸라 치즈를 국자에 가득 퍼서 내주는 가판대가 있는가 하면, 칸칼레산 굴이 수북한 가판도 눈에 띈다. 거대한 포도송이가 정글에서 자라는 덩굴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가판대도 보인다. 2009년부터 이곳에서 노점을 운영해온 마흐무드 엘 세아디Mahmoud El Seady는 “이보다 더 맛있는 포도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거예요.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서 먹는 100만 원짜리 요리도 이만큼은 안 됩니다”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원형 분수를 중심으로 50여 개의 노점이 모여 있는 마르쉐 레위니옹에서는 오랜 단골들이 이 시장의 풍미를 즐기고 있다. 껍질이 바삭바삭한 가금류, 잘게 썰어 곱게 다진 뒤 차갑게 식혀 얇게 썬 토끼고기 테린, 초콜릿을 흩뿌린 브리오슈 등이 있다. “이게 진짜 파리지앵의 방식이죠.” 마흐무드가 말한다. “에펠탑 옆이 아니라 사람들이 잘 모를 뿐이에요.”
물론 르벵티엠에도 어깨에 마늘 줄기를 걸치고 손에 바게트를 든 전형적인 파리의 이미지를 고수하는 곳이 있다. 르비유벨빌Le Vieux Belleville 레스토랑 역시 이런 이미지에 자부심을 갖고 지켜온 곳 중 하나다. 풍부한 맛의 메를로Merlot 와인을 가득 채운 유리 항아리, 치즈 플레이트, 황금빛 튀김, 걸쭉한 브라운소스를 뿌린 안심스테이크 등 테이블마다 음식이 넘친다. 주말에는 여성 가수가 출연해 벨빌의 자랑인 피아프의 히트곡 전곡을 포함해 전후 프랑스의 고전을 노래하며 즐거움을 더한다. “자, 자, 자,” 말레느 라마르크Malène Lamarque가 과장된 몸짓으로 드레스를 들어 올리고 춤을 추며 노래한다. “나는 추억으로 불을 지피네….”
건너편에 위치한 벨빌 공원에서는 전구 드레스를 입고 매혹적으로 반짝이는 에펠탑이 보인다. 한편, 르비유벨빌 안에 있는 우리 테이블로 윤기 나는 카망베르 치즈와 메를로 와인이 도착한다. 이미 배는 포화 상태에 이르렀지만 다시 한번 분발해서 깨끗이 먹어 치운다. 너무 많이 먹었을까? 아니, 에디트 피아프가 노래했듯이, 난 후회하지 않아.
파리 제20구의 맛
르그랑뱅
LE GRAND BAIN
내추럴 와인과 스몰 플레이트로 설명되는 르그랑뱅은 파리의 식사 트렌드에 들어맞는 곳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한때 런던 세인트존에서 셰프로 일했던 에밀리 치아Emily Chia가 그때그때 다른 메뉴를 요리한다. 카레 섞은 마요네즈를 곁들인 마르세유 파니세(병아리콩 튀김)는 칩스와 카레소스를 재치있게 재해석한 메뉴로, 짭짤하고 지방이 많은 슈 페이스트리와 함께 르그랑뱅의 대표로 자리 잡았다. 와인 포함 1인당 약 4만원부터.
팔로마
PALOMA올리비아 브루네Olivia Brunet와 마리-안느 델가도Marie-Anne Delgado가 2021년 1월에 문을 열었다. 캐비닛을 만들던 올리비아가 빈티지 소품으로 공간을 장식했고, 르딘동 엥래세에서 수석 셰프로 일한 마리-안느가 우아하고 독창적인 제철 요리를 선보인다. 송어 요리, 속을 채운 양배추 요리, 족발요리가 유명하며, 파이나 오리 콩피 등은 포장 구입도 가능하다. 와인 포함 1인당 약 4만원부터.
샹테파블르
CHANTEFABLE거대한 거울, 아르데코 양식, 툴루즈 로트렉 복제품 등으로 꾸며진 샹테파블르는 전환기적 분위기를 풍긴다. 이 전형적인 파리풍의 브라세리는 스테이크 타르타르, 앙트레코트(등심), 앙두예트 소시지, 해산물 요리, 클래식 오리 콩피 등 넉넉하고 관대한 메뉴를 내놓는다. 단, 다크초콜릿에 풍덩 담근 작은 슈나 바닐라를 넣은 크렘브륄레 등 디저트를 맛볼 위 공간은 남겨두어야 한다. 와인 포함 1인당 약 6만5000원부터.
다섯 가지 음식의 발견
파리를 다양한 측면에서
이해해보고 싶다면.
1
브리드모
Brie de Meaux파리 북동쪽 브리에서 생산되는
치즈로, 달콤하고
버터처럼 부드럽고 두꺼운
흰색 껍질로 덮여 있다.
2
프로마주 드테테
Fromage de Tete송아지나 돼지의 머리 안쪽에 있는
젤리 같은 부분을 마블링해서
만들어 보통 차갑게 먹는다.
파리 노동계층 사람들이 원기를
충전하는 음식으로 즐겨 먹는다.
3
바오지
Baozi벨빌에 사는 중국인들이 자주
먹는 푹신푹신한 찐만두로,
끈기가 생길 정도로 치댄 바비큐
돼지고기나 갖은 채소로 속을
채운다.
4
바클라바
Baklava시럽을 넣고 반죽한
여러 겹의 도우에 견과류를 넣은
페이스트리로, 현지에 있는
대부분의 튀니지
제과점에서 만든다.
5
샹피뇽드파리
Champignons de Paris17세기 동안 도시의 지하 묘지에서
재배되었던 이 버섯은 이제
지하 도시 농장에서 재배한다.
TRAVEL WISE
가는 방법
런던에서 파리까지 유로스타가 하루에 여러 번 운행한다.
eurostar.com
머무를 곳
바벨 호텔 더블베드룸이 약 15만원부터.
babel-belleville.com더 많은 정보
프랑스 관광청
kr.france.fr
파리 종합관광안내소 공식 사이트
ko.parisinf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