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겨울엔 눈이 내리지 않는다.
설경이 소거된 곳에서
첫눈보다 설레는 연말연시 여행의 순간을 채운다.”
무언가 거창한 일을 벌여야만 직성이 풀렸다. 한 해의 끝자락에 걸친 추억을 억지로라도 만들어내고 싶었다. 공허하게 흐르는 1분 조차 아까워 시간을 가학적으로 쓰곤 했다. 그게 젊음인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사회로 떠밀려 나와 직장인이 되고 나선 서서히 자신을 사리는 방법을 배워나갔다. 오늘 최선을 다하기보단 내일을 위한 힘을 아껴두려는 얄팍한 심보까지도. 연말을 대하는 태도 역시 달라졌다. 새로운 에피소드를 만들어내는 대신 새롭게 다가올 1년을 위해 잠시나마 전원을 꺼두고 싶었다. 그동안 뒤엉켰던 사람들로부터 나를 격리하고, 일이라는 영역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되는 시간을 고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는 젊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후 떠난 연말 여행 역시 그 연장선에 있었다. 육지와 동떨어져 남방의 바다 한편 어딘가에 고립된 섬, 아무 계획 없이 한달음에 날아갈 수 있는 곳이면 충분했다. 나는 매해 12월이면 어느새 대만에 당도해 있었다.
2018년 끝에는 무구한 소망이
대만의 첫인상은 축축했다. 수도 타이페이의 하늘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아 이슬비와 가랑비를 번갈아가며 떨궜다.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빗방울 때문에 도색을 포기했는지, 페인트가 벗겨진 채로 오랫동안 시간을 보낸 듯한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기후에 순응한 건축물은 섬 생활에 적응해온 이곳 사람들의 역사와 닮은 듯했다. 대만은 오랜 시간 동안 사실상 부족 단위의 원주민만 거주하는 동아시아의 변방이었다. 국제 정치상 그다지 지리적인 이점도 없던 곳이었다. 청나라 시대에 이르러서야 한족들이 대거 이주하며 중화 문명권으로 편입된다. 현재의 대만으로 자리 잡은 시기는 20세기 중반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배한 국민당 세력이 대만으로 정부를 옮긴 ‘국부천대’가 그 기준점이다. 각기 다른 배경을 지닌 이들이 시차를 두고 모여들어 외딴섬에서의 삶에 투신했다. 그들의 만남은 충돌과 비극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대 대만의 입체적인 사회를 형성하는 근원이 되기도 했다.
다양한 문화적 층위를 가장 선명하게 실감할 수 있는 것은 식생활이다. 중국 각지에서 유래한 음식과 소수 민족의 전통 요리가 경상도보다 조금 큰 땅덩이에 집약되어 있다. 이미 한국에도 분점을 낸 ‘딘타이펑’, 3대에 걸쳐 50년 넘게 운영 중인 ‘골든 포르모사’ 등 저명한 레스토랑이 타이페이에만 수십 곳이 있다. 하지만 유명하다는 맛은 어쩐지 끌리지 않았다. 계획과 절차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지고 싶어 이곳에 왔는데, 예약이라는 수고를 감내하고 싶지도 않았다. 정돈되지 않은 도시와 치장되지 않은 음식을 마주하고 싶었다. 식당을 검색하는 대신 지도에서 무작정 야시장이라고 표기된 곳을 찾았다. 마침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화시제 야시장’이 있었다.
시장은 야식을 찾아 나온 시민들로 북적였다. 나는 전 부치는 노점에서 먹은 굴전을 시작으로 이곳저곳을 표류했다. 시장 구조가 미로 같아서 좀처럼 방향을 읽기 어려웠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어느 구간에 이르자 종류를 알 수 없는 향신료 냄새가 눅눅한 습기에 비벼져 코를 때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음식의 장르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배를 내놓고 드러누운 개구리가 수북이 쌓여 있었고, 말린 뱀 껍질이 널려 있었다. 우연은 이래서 재미있다. 차마 손바닥만 한 개구리까진 엄두가 나지 않았으나 취두부와 선지를 섞어 만든 떡을 오물거리며 타이페이의 눅눅한 밤에 잔뜩 취해가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화시제 야시장은 중장년층이 몸보신을 위해 주로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찾아간 덕에 대만 식문화의 가장 깊숙한 지점까지 우연찮게 도달해 본 셈이었다.
야시장을 빠져나오자 도로변에 들어선 화려한 사찰이 보였다. 요깃거리를 사 가던 사람들도, 밤마실을 나온 사람들도 잠시나마 들르곤 했다. 현판엔 ‘龍山寺’라고 적혀 있었다. 대만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 ‘룽산스’였다. 이곳은 타이페이 시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전설이 기원한 장소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 의한 식민 지배를 받던 대만은 연합군의 공격 대상 중 하나였다. 룽산스는 폭격에 몸을 숨기는 대피소로 활용되었다. 공습경보가 울리던 어느 날, 겨울인데도 모기떼가 갑자기 나타났고, 피난민들은 어쩔 수 없이 사찰에서 뛰쳐나와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불과 얼마 뒤, 정확히 룽산스 위로 포탄이 떨어졌다. 절은 폐허가 됐지만 시민들은 목숨을 건졌다. 더구나 관음보살상만은 신기하
게도 더미 사이에서도 형태를 고스란히 보존했다고 한다. 기적이 일어난 사원이라고 하지만 타이페이 사람들은 종교적인 관점으로만 룽산스를 대하는 것 같진 않았다. 대만인과 고난을 함께한 존재라는 사실만으로도 그곳은 종교시설 이상의 가치를 지닌 듯했다. 룽산스를 찾은 사람들은 모두 미소를 지으며 향에 불을 붙였고, 친구에게 속삭이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중국어를 알아듣진 못하지만, 구원을 바라는 장황한 기도보다는 오늘보다 행복한 내일을 바라는 소박한 소원 같았다.
2020년 시작은 무수한 꿈결에
이듬해 다시 찾은 대만에선 기차를 타고 각지를 떠돌았다. 그러던 중 화롄에서 돌연 장시간 머물기로 했다. 섬인 대만은 한반도처럼 남북으로 긴 산맥이 동과 서를 지형적으로 갈라놓는데, 동부에 위치한 화롄은 해발고도 2000m가 넘는 산에 둘러싸인 채 고아하게 태평양을 맞대고 있다. 고립된 섬 내에서도 외진 지역인 화롄에선 복작한 타이페이와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 흔한 캐럴도 들리지 않았고, 뻘겋게 칠한 문구 ‘HAPPY NEW YEAR’도 없었다. 건조하고 침착하게 한 해를 놓아주고 있는 도시에 나는 금방 매료됐다.
화롄에 도착한 다음 날, 나는 일찌감치 가방을 꾸려 타이루거 국립공원행 버스에 올랐다. 종점에서 시작해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는 여정은 하루 일정으론 어림도 없었지만, 발길이 닿는 데까지 걸어볼 심산이었다. 융기와 침식을 반복하고 이리저리 뒤틀리며 형성된 거대한 협곡은 몇만 년의 역사를 시각적으로 함축했다. 풍경과 규모에 압도당했는지, 트레킹을 끝내고 화롄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하루 내내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저녁밥을 찾아 거리를 배회하던 중 한눈에 읽을 수 있는 한자 공정포자점公正包子店을 이름으로 내건 식당이 보였다. 찜통 뚜껑을 열어젖힐 때마다 램프의 요정이라도 등장하듯 풍성한 김이 솟구쳤다. 슬그머니 가게로 들어가자 점원이 교복 입은 청소년들이 둘러앉은 협소한 원형 테이블에 나를 끼워 넣었다. 그들이 먹고 있던 음식을 물끄러미 쳐다보자 한 학생이 어떻게 알았는지 “한궈런?”이라며 말을 붙였다. 먹성 좋은 10대들의 만두 먹는 모습이 어찌나 복스럽던지 너희랑 같은 메뉴를 먹고 싶다고 의사를 전하자 이를 들은 점원이 주먹만 한 만두와 뜨끈한 면 요리를 들고 왔다. 내가 만두를 집는 모양새가 영 어설프고 재미있었을까. 식당 사람들이 모두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미 웃음이 터진 같은 테이블의 학생들은 육즙 손실 없이 양념까지 야무지게 올리는 법을 첨삭 지도했다. 배운 대로 만두에 간을 더하고 입안으로 힘차게 밀어 넣자 지켜보던 사람들이 손뼉을 쳤다. 퇴근길이나 하굣길에 들러 단출한 음식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던 화롄 사람들과 얼떨결에 어울린 저녁 밥상에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만두를 먹었다.
1월 1일 첫 동이 틀 무렵, 화롄에 있는 몽돌 해변 ‘치싱탄’ 한가운 데 섰다. 대만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이라는 수식이 머쓱할 정도로 조용하고 한산했다. 새해 카운트다운과 함께 터져 나오는 ‘타이페이 101’의 성대한 불꽃놀이를 보러 갈지 잠깐 고민했다. 그러나 망망한 바다 너머로 떠오르는 대만의 해가 어쩐지 더 궁금했다. 치싱탄에서 바라본 일출은 열흘간의 단잠에 빠졌던 나를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우는 것 같았다. 붉게 달아오르는 태양은 다시금 치열한 세계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다는 사실을 명시했지만, 나는 여전히 꾸고 싶은 꿈이 많았다. 겨울에만 꿀 수 있는 꿈, 대만에서만 꿀 수 있는 꿈.
※ 이재현은 칼럼과 인터뷰를 기고하는 프리랜스 에디터다. 미래에 대한 거창한 대비 대신 여행을 위한 적금이나 부어가며 알량한 삶을 살고 있다. 해외로 떠나면 최대한 주택가 깊숙한 곳에 자리한 숙소를 잡고 반드시 버스를 이용해본다. 방문한 나라의 로컬 매거진을 빼놓지 않고 모아왔지만 잡지쟁이를 그만둔 이후론 치약 몇 개를 기념품 삼아 손에 쥐고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