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정원 켄트,
그곳의 사과 와인
사이더 이야기.”
“바람은 극복하는 게 아니라 이용하는 것이다.” 결승전의 마지막 엔드, 마지막 화살. 반드시1 0점이 필요하다. 공기의 흐름을 헤아려 릴리즈할 타이밍을 판단한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활시위가 제자리로 돌아간다. 쏜 화살이순 식간에 날아가 꽂힌다. 양궁 과녁의 9점은 빨간색, 10점은 노란색이다. 사선에서 바라보면 파란색 배경에 사과 한 알이 놓인 모양새다. 만점을 받으려면 70m 밖에 있는 지름 12.2cm의 노란 중심을 관통해야 한다. 정확히 사과 한 알의 크기다. 4년마다 우리의 간담췌를 쫄깃하게 만드는 양궁 과녁의 사과는 스위스 북부가 원산지인 ‘우트빌러 스패트라우버Uttwilerspätlauber’ 품종이다. 이 사과는 껍질은 노랗고 속살은 빨간색인 반전 색감으로 유명하다.
이 노란 사과와 양궁의 인연은 13세기에 시작됐다. 빌헬름 텔의 아들은 당시 스위스를 지배하던 오스트리아의 영주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100보 밖에서 화살로 사과를 명중시킨다고 설레발을 쳤다가 결국 역사적 사달을 만들고 만다. 영주는 스위스의 기세를 꺾어버리고자 빌헬름에게 80보 밖에서 아들의 머리 위에 사과를 놓고 맞히도록 명령한다. 80보는 정확히 70m다. 이 스위스의 궁수는 사람의 눈이 555nm 황색 파장에서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표적으로 노란 사과를 선택한 빌헬름은 결국 스위스의 독립을 이끌어내고 유럽 역사의 흐름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왕의 편에 서서 마시는 켄트의 사이더
옥스퍼드대학교 구내의 맥주 펍 ‘킹스 암스King’s arms’에서는 학생들의 수다가 한창이다. 수업을 마친 그들의 대화는 생각보다 난해하다. 어쩌면 다음 시대의 진리가 대화에 담겨있을지도 모른다. 한국말로 들어도 이해하지 못할 내용이니 재바른 영국 억양에 차라리 맘이 편하다. 겨울방학 시즌이 되면 ‘왕의 편’이라는 이 호기로운 이름의 펍에서는 사과칩을 안주 삼아 멀드사이더mulled cider를 마실 수 있다. 겨울철 따뜻하게 마시는 멀드와인(프랑스어 뱅쇼vin chaud)은 들어봤어도 끓여 마시는 사이더라니, 공부할 것이 도처에 널려 있는 옥스퍼드다. 뜨거운 사이더 잔 위로 사과 특유의 들큼한 향이 퍼진다. 사과로 담은 술을 영국에서는 사이더cider, 프랑스에서는 시드르cidre라고 부른다.
유럽을 나누는 기준은 다양하다. 냉전을 맨몸으로 관통한 우리는 지정학적인 유사성에 따라 서유럽, 동유럽, 북유럽으로 유럽의 여러 국가를 나눈다. 유럽의 요리사들은 조리법이나 식재료를 중심으로 유럽을 나누는 경향이 있는데, 조리법에 따르면 프랑스 노르망디와 영국, 스칸디나비아 등지는 버터 유럽, 이탈리아와 스페인, 프랑스 프로방스 지중해 연안은 올리브 유럽에 해당한다. 북쪽을 감자 유럽, 남쪽은 토마토 유럽으로 나누기도 한다. 과일을 기준으로 하면 와인으로 유명한 남쪽은 포도 유럽, 북쪽은 사과 유럽이 된다. 도버해협을 사이에 둔 프랑스 브르타뉴와 영국 켄트 지역이 바로 사과 유럽에 해당한다. 우리나라의 청량음료 사이다는 사과 유럽의 사이더라는 사과술을 가져와 알코올과 사과를 빼고 탄산과 단맛에만 집중해 만든 것이다. 1905년 인천의 별표 사이다를 시작으로 평양의 금강 사이다, 부산의 동방 사이다, 대구의 삼성 사이다 등이 유행했다. 1950년에는 일곱 명의 창립자 성이 다르다는 데서 이름을 딴 칠성사이다가 업계를 평정한다.
세잔의 화폭에 담긴 빨강 사과
프랑스 오를레앙에 거주하는 마리 할머니가 오븐으로 프랑스식 애플파이인 타르트타탱Tarte Tatin을 굽고 있다. 그녀의 어린 손녀 가브리엘은 한창 시끄러울 나이다. 휴대폰에 저장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과 찍은 사진을 꺼내 굳이 자랑한다. 오븐에서는 사과가 익어간다. 타탱 부인의 1867년 레시피에 의하면, 밀가루 반죽 위에 사과를 올리지 않고 반죽 아래에 넣는다. 애플파이와는 달리 타르트 틀에 사과가 직접 닿는다. 서서히 구워지는 단단한 사과 과육 안에서 이탄당인 과당이 올리고당으로 동화되고 있다. 거실을 가득 메운 소녀의 낭낭한 수다와 파이의 달곰한 향기가 무척 닮았다. 타르트 타탱에 들어간 사과는 영롱한 초록 줄무늬가 있는 빨간 사과 ‘빅투아르산의 색동실scoubidou’이다. 산도와 당도가 조화를 이루고 과육이 탄탄해 굽는 요리에 알맞다.
홍옥과 유사한 이 사과는 세잔의 <사과가 있는 정물>의 모델로도 유명하다. 빅투아르산의 색동실은 세잔의 깐깐한 화폭에 담겨 파리 예술계를 점령한다. 오를레앙에서 프랑스의 북쪽 브르타뉴, 노르망디 지역으로 들어서면 본격적으로 사과 유럽의 영역이다. 북해 쪽으로 다가갈수록 날씨는 사나워지고 목조 골격이 콘크리트 사이로 드러난 콜롱바주masion à colonbage 양식의 건물들이 나타난다. 이 지역에서는 프랑스의 사과주 시드르와 함께 밀전병 요리인 갈레트galette, 크레프 살레crepe salee와 크레프 슈크레crepe sucree를 먹는다. 시드르는 북쪽으로 갈수록 탁도가 심해지고, 알코올 도수가 올라간다. 그러다 보니 브르타뉴에서는 유리잔verre이 아닌 불투명한 사기잔bolée à cidre에 시드르를 따라 마신다.
뉴턴의 머리 위로 떨어진 초록 사과
도버 항구를 벗어나면 영국 남단의 켄트 평원이 펼쳐진다. 켄트는 영국의 정원이라 불린다. 맑은 하늘 아래 드넓은 목초지에서 유유자적 노니는 양떼는 상상했던 영국의 풍경은 아니다. 낯선 토양의 색과 운전석 오른쪽으로 지나치는 중앙선 너머 차량들에 익숙해질 때쯤 샌드위치sandwich라는 마을의 이정표가 나온다. 조금 전 햄ham 마을을 지나쳤는데, 이번엔 멈추지 않을 재간이 없다. ‘A great sandwich in sandwich’ 식당에서 샌드위치를 시킨다. 영국 음식에 있어 ‘great’는 정량적 형용사이지 정성적 형용사가 아니다. 난해한 맛의 거대한 샌드위치보다 생맥주처럼 드래프트로 뽑아주는 생사이더가 인상적이다. 일반적으로 병에 담겨 세계적으로 유통되는 제품과는 확연히 다른 농익은 풍미를 자랑한다. 사이더를 만드는 초록색 사과의 품종은 ‘켄트의 꽃flower of kent’이다.
이 사과는 케임브리지에서 뉴턴의 머리 위로 낙하한 사건으로 유명하다. 당도는 뛰어나나 식감이 푸석하다. 텍스처가 무르다 보니 보통 깎아 먹지는 않는다. 낙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대로 갈아서 사이더를 만든다. 켄트의 꽃은 부사, 조금 삭은 부사의 맛이다. 생사이더를 마시는 순간 외가에서 처음 맛본 사과가 떠오른다. 오래된 양옥집의 삐걱이는 나무 계단 소리와 연와조가 군데군데 떨어져나간 옥상의 장독대. 할머니는 천방지축 아이를 아랫목에 잡아 앉히고서 숟가락을 아주 바투 잡고서 잘 익은 사과의 속살을 사각사각 긁어내 떠먹인다. 할머니의 곱은 손가락이 살짝 담긴 부드러운 부사 퓌레가 입속으로 들어오면 아무런 목적도 없는 어린아이의 고된 시름은 눈 녹듯 사라졌다. 영국 사과에서 분명 그때의 부사 맛이 난다. 맛의 직접성은 생각보다 기억을 오래 지탱한다.
아담의 사과로부터 시작된 사과의 세계 여행은 7500여 종의 사과 품종만큼이나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는 사과 한 알 대충 그려놓고 최고의 화가 반열에 오른다. 그림 속 사과는 먹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통해 사과에 담긴 모든 이야기를 해체한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과지만, 결국 이 그림에도 실존적 모델은 존재한다. 르네가 그린 사과는 벨기에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조나레드jonagored’다. 이 사과 그림의 제목은 <이것은 사과가 아니다>이다.
※ 정상원은 프렌치 파인 다이닝 ‘르꼬숑’의 문화 총괄 셰프다.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부에서 유전공학과 식품공학을 전공한 특이한 이력이 눈에 띈다. 미식 탐험을 위한 안내서 <탐식수필>을 통해 요리에 문화, 예술, 철학 등 서사를 덧입히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