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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y Season in Jeju
오름아, 장마를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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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6월호

 

“제주에 상륙한 장마가 중산간 지대에 많은 비를 뿌리면
산정호수를 품은 오름은 제주의 숨은 보석이 된다.”

 

섬의 장마는 육지의 장마와 양상이 조금 다르다. 태평양의 습기를 집어삼킨 거대한 구름이 바람에 이끌려 제주에 상륙하지만, 한라산에 가로막혀 제 길을 가지 못하고 주저앉고 만다. 덕분에 제주는 장마철 내내 비와 안개의 세상이 된다.

많은 비가 짧은 시간에 내리는 장마철은 독특하고 몽환적인 제주의 풍경을 자아낸다. 천천히 잎을 키워내던 나무는 울울창창해지고, 1년 내내 말라 있던 건천은 시원한 물을 흘려보내며 자존감을 드러낸다. 어린 강아지처럼 귀엽기만 했던 중산간 오름에 푸른 살이 올라 생명 절정의 풍경을 선사한다. 그래서 장마철이면 꼭 가봐야 하는 오름이 몇 군데 있다. 1년 중 장마철에 가장 아름다워지는 곳이다. 한라산 성판악 코스에 있는 사라오름, 아름다운 숲과 습지 그리고 기괴암석을 품은 영아리오름, 비와 안개로 신령스러운 풍경을 자아내는 물영아리오름이 바로 그들이다.

 

사라오름.

하늘 아래 호수, 사라오름

제주의 오름 가운데 가장 높은 해발1 324m 지대에 자리한 사라오름은 둘레가 250m가 넘는 커다란 산정호수를 품고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탐방로가 물에 잠겨 신발을 벗어 들고 호수 안을 걸어야 한다. 아쉬운 건 비가 오지 않을 때는 물이 말라버려 사시사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장마철마다 한라산의 보옥이 된다.

장마가 시작되자마자 아침 일찍 사라오름을 찾았다. 조용한 산정호수와 물안개를 볼 요량이었다. 사라오름에 가려면 한라산 정상으로 향하는 성판악 코스를 이용해야 한다. 성판악 코스가 시작되는 성판악 휴게소부터 사라오름까지 왕복 4시간쯤 걸린다. 휴게소를 지나 숲으로 들어가자 안개 속에서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나를 맞이한다. 어제 내린 비 때문인지 바닥이 미끄럽다. 천천히 발길을 옮기며 산행을 시작한 지 1시간. 시원하게 뻗은 삼나무숲이 인상적인 솔밭대피소가 나타난다. 습도가 높아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땀이 흐르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1300m 사라오름 분기점을 지나 20분 정도 계단을 오르자 서서히 믿기지 않는 풍경이 보이기 시작한다. 물안개가 떠 있는 은쟁반처럼 빛나는 산정호수다. 고혹한 자태에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마치 하늘에 호수가 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많은 비로 탐방로는 이미 물에 잠겼다. 신발을 벗고 호수에 발을 담그자 얼음처럼 차가운 물결이 두 발을 휘감는다. 땀이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다시 힘을 내 정상으로 향한다. 조금 걸어가자 사라오름 전망대가 나온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비경이란! 한라산에서 시작한 제주의 대지가 바다를 향해 가슴이 저릴 만큼 장엄하게 펼쳐지고 백록담은 손에 닿을 것처럼 가깝다.

 

영아리오름.

 

외면보다 내면이 아름답다, 영아리오름(용와이오름)

영아리오름(표고 693m, 비고 93m)은 서귀포 안덕면 상창리 사람들에게 신령스러운 오름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영아리오름의 첫인상에 특별한 건 없었다. 나무가 우거져 산의 형태가 잘 보이지 않았다. 작은 오솔길을 10여 분 오르자 남봉과 북봉의 갈림길이 나온다. 습지로 가기 위해 남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10분 남짓 오르자 남봉 정상이 보이고, 조금 더 오르자 첫인상과 다른 매혹적인 풍광이 펼쳐진다. 너른 초원과 더불어 여기저기 거대한 기암괴석이 버섯처럼 솟아나 있다. 예술가가 빚어놓은 조각 작품 같다. 한라산과 옹기종기 오름 군락이 눈에 들어온다. 암석과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오름의 풍경이 더없이 극적이다.

영아리의 백미인 습지로 발걸음을 옮긴다. 서쪽으로 가자 조금 가파른 길이 시작된다. 커다란 암석이 많아 이동이 결코 쉽지 않지만, 나무에 의지해가며 10여 분 천천히 내려가니 서서히 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삼나무숲 사이로 흐르는 잔잔한 물결이 내려오는 동안 긴장한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숲을 지나자 얕으면서 넓게 펼쳐진 습지가 나타난다. 숲으로 둘러싸인 습지는 묘하게 신비롭고 아름답다. 습지의 커다란 돌 위에 자리를 잡는다. 바람이 불어 구름을 재촉하고 나무 머리가 흔들리지만 나에게는 닿지 않는다. 세상 밖의 소리는 차단되고 풀벌레 소리만이 귓가에 맴돈다. 마음이 평온하고 모든 게 평화롭다. 왜 이곳 사람들에게 신령스러운 산이라 불리는지 비로소 수긍이 간다. 탐방로를 정비하지 않아 약간의 불편을 감수해야 하지만, 인위적인 개입 없이 자연 그대로의 습지를 보존한 이들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물영아리오름.

 

정상의 습지가 몽환적, 물영아리오름

이 오름에 가려면 푸른 초원을 지나야 한다. 초원에 바람이 불자 수풀이 흔들리는데, 마치 거대한 짐승의 부드러운 털처럼 느껴진다. 초원 끄트머리에 나무 옷을 입은 거대한 물영아리가 보인다. 이 때문일까. 초원 위에 앉아 있는 물영아리가 더욱 신비롭게 다가온다. 물영아리오름(표고 508m, 비고 128m) 입구에는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선 키 큰 삼나무가 안개를 머금고 있어 더욱 신비스러운 분위기다. 오르는 길은 데크 계단으로 잘 정비되어 있다. 880개의 계단을 따라 한 발 한 발 정상으로 나아간다. 안개가 자욱해 마치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몽환적이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을 때 위를 올려다보니 나무의 키가 작아지면서 하늘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습지. 둘레 300m, 깊이 40m인 원형 화구호 물영아리의 습지는 바람이 불자 물결이 춤을 추듯 흔들렸지만 이내 안정을 되찾는다. 나무와 습지식물이 둘러싸고 있는 데다가 안개까지 부옇게 흘러 다녀 바로 눈앞의 풍경이건만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안개가 걷히자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치 하늘 아래 숲에 혼자 남겨진 듯한 기분이다.

산꼭대기에 이런 습지가 생긴 까닭은 변화무쌍한 날씨 때문이다. 하천이나 지하수 등 외부에서 물이 들어와 생기는 습지와 달리, 물영아리 습지는 온전히 비와 안개가 전해준 물로 이루어진다. 물영아리가 자리한 남원읍의 중산간 날씨는 변덕스럽기로 손꼽힌다. 장마철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비가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한다. 덕분에 물영아리 습지에는 멸종위기종 2급인 물장군과 맹꽁이 등을 비롯해 양서류 8종, 습지식물 210종, 곤충 47종, 파충류 15종 등 다양한 생물군이 살아가고 있다.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람사르 습지로 지정되었다. 산 정상에 아마존 정글 같은 독특한 자연림과 환상적인 습지가 어우러진 풍경이라니.

산에서 물을 만난다는 건 경이로운 일이다. 오름의 산정호수는 힘들게 찾아온 이들을 보드랍게 안아준다. 장마철 산정호수는 시간마다 그 모습을 달리한다. 안개가 내리면 몽환적인 공간이 되고, 비가 그쳐 파란 하늘이 얼굴을 내밀면 호수에 비친 하늘은 호수가 되고 호수는 하늘이 된다.

 

 

 TRAVEL WISE 

가는 방법

사라오름
제주시 516로 1865 성판악 휴게소
등반 시간 편도 2시간.

영아리오름(용와이오름)
서귀포시 안덕면 상창리 산24
* 안덕면 위생매립장 앞 공터에 주차한 후 오른쪽 산불 초소가 있는 길을 따라 진입,
첫 번째 나오는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900m.
등반 시간 편도 20분.

물영아리오름
서귀포시 남원리 수망리 산188
등반시간 편도 30분

 


※ 제주에서 나고 자란 문신기는 달나라 여행이 꿈이었으나 NASA 입사가 불가능하다는 걸 일찌감치 인지하고, 달 대신 1년에 한 번 외국에서 살아보고 있다. 일러스트레이션을 기반으로 다양한 작업을 하며, 글을 쓰고 그림 그리는 일을 병행하면서 오늘도 달나라를 탐하는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제주 오름 여행>, <특별하게 제주> 등이 있다. 

글. 문신기SHIN-KI MOON
사진. 문신기SHIN-KI MOON(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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