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봄이다. 봄이 되어 꽃이 피는가,
꽃이 피어 봄이 되는가?
달력을 넘겨서가 아니라 꽃을 봐야 봄(seeing)이다.
그러니 꽃이 피어서 봄이 되는 것이 맞다.
지금의 이 꽃도 생애 단 한 번 보는 꽃이겠지.”
꽃구경
바람은 아직 차지만 볕이 따뜻해 꽃구경을 재촉한다. 모든 꽃이 화사하고 탐스럽지만, 조급한 상춘엔 매화가 제격이다. 오래전 어느 스님의 사진에서 봤던 매화를 요번에는 꼭 봐야겠다. 범어사 팔상전의 격자매화꽃살. 비바람에 퇴색해 거뭇해졌겠으나 여전히 단정하고 조신한 자태이리라.
부산 금정산에 자리한 범어사는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여러 차례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 조선시대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빛 물고기가 하늘에서 내려와 우물에서 놀았다고 하여 금정산(金井山)이 되었고, 그곳에 절을 지어 범어사(梵魚寺)를 건립했다”는 기록이 있다. 불법을 전하는 금빛 물고기의 서식지라니!
속세에서 정토(淨土)로 들어서려면 우선 첫 번째 문을 만나는데, 일렬로 선 기둥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어 이 문을 일주문(一柱門)이라고도 한다. 보통 일주문은 기둥 두 개가 양쪽에서 지지하는데 이곳의 문은 네 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다. 투박하지만 듬직한 돌덩이 위에 짧은 나무 기둥이 세워져 돌기둥이라 해야 할지 주춧돌이라 해야 할지 조금 애매하다. 우산처럼 펼쳐지는 지붕 날개와 굳건히 선 돌기둥에서 대위법적 긴장감이 느껴진다. 중앙에 조계문(曹溪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조계문을 지나 팔상전으로 간다. 20년도 더 전, 단청이 박락된 꽃살을 관조스님이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 속 매화꽃살을 찾고자 팔상전의 창호를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최근에 만든 듯한 격자살만 보인다. 알아보니 수리를 위해 기존의 문짝은 떼어 보관 중이라고 한다.
2006년에 입적한 관조스님은 범어사에서 수행하며 수십 년간 사람과 세상의 아름다운 결합을 렌즈에 담았다. 나와 세계, 번뇌와 희열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포착하려면 객관적인 시선이 필요하다. 그의 법명대로 관조(觀照)이다. 순간이 담긴 많은 사진들이 시선을 끌었지만,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던 것이 매화꽃살이다. 실제의 꽃보다 더 꽃 같았다. 스님은 “찰나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들이 아쉬워 부지런히 사진으로 담아두다 보니 스님사진가라는 허명을 얻게 되었다”고 하였지만, 찰나의 포착을 통해 수행하며 담담한 시선으로 불법을 전한다. 상좌스님의 회고다.
“사리는… 수행의 결정체라고 합니다. 저는 스님의 사진 작품 하나하나가 모두 수행의 결정체로서 스님의 사리라고 믿습니다. 스님의 수많은 사리들이 세상을 깨우치고 밝히는 지혜의 법문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오래된 꽃
사찰의 꽃살문은 법당을 상서로운 공간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꾸민 것이다. 불가에서는 이를 장엄(莊嚴)이라고 한다. 법당은 불국정토를 향한 상락아정(常樂我淨, 영원히 즐거우며 자유자재한 자아가 확립된 청정한 상태) - 열반에 이르는 곳이다. 이곳에 들어가려면 먼저 문을 열어야 한다. 그 문은 진리로 들어가는 통로이기에 아름답고 화려하게 장식된다.
사찰은 물론 전통 건축의 창이나 문은 안쪽에 창호지를 발라 마감한다. 창호지를 투과한 빛은 실내에 부드럽게 스며든다. 직사광선을 여과하여 성질이 순하게 바뀐 빛은 눈의 피로를 감소시키고 심리적인 안정감을 준다.
빛은 공간을 인식하고 규정하는 데 필수적인 것으로 건축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요소다. 종교 건축에서 진리나 신의 광휘를 은유하는 빛은 창이나 문을 통해 가시화된다.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성서의 시각적 표현이며, 사찰의 꽃살은 공양된 꽃인 동시에 화엄(華嚴)의 구현이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은 그리스도의 지혜·생명·구원을 상징하고, 꽃살 창호를 통해 여과된 빛은 만물의 현상이자 명상의 실체다. 때문에 창틀이나 창살에는 여러 상징적 장치가 부여된다.
법당 입구를 장엄하는 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많은 공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전국의 많은 사찰에는 제가끔 특색있는 꽃살문들이 있다. 최고의 꽃살로 누구는 내소사의 대웅보전, 누구는 용문사의 윤장대, 누구는 성혈사의 나한전을 꼽는다. 모두 빼어나고 아름답지만 나는 범어사의 매화꽃살이다.
어느 봄, 금정산 기슭의 매화나무가 꽃을 피웠는데, 꽃잎이 바람을 타고 부처님의 성전에까지 날아들었다. 든든한 격자살이 교차하는 부분에 가지런히 조각된 매화는 단청이 퇴화되어 녹색의 흔적만 간신히 남았지만 여전히 앙증맞았다. 관조스님은 “꽃살문에는 가장 행복한 삶의 환경인 극락세계의 아름다움이 표현돼 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생경하게도 단청이 되어 있다. 관조스님 사진 속의 그 매화가 아니다.
범어사의 팔상전과 나한전은 별도 건물이었으나 1906년경 중창하면서 두 불전 사이에 독성전을 꾸며 세 불전이 한 건물(팔상·독성·나한전)로 통합되었다. 그즈음 만든 팔상전의 매화꽃살에 정성껏 단청을 입혔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퇴화되어 거뭇하게 나뭇결이 드러날 무렵 관조스님이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고, 얼마 후 다시 단청 작업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건물 보호를 위해 단청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고고하게 풍화되어가는 매화꽃살을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아쉽지만 양산 통도사의 적멸보궁(대웅전)에서 그 비슷한 느낌을 맛볼 수 있다. 그곳은 아직 재단청 작업이 되지 않은 상태로, 비바람에 시달리며 세월을 담아가는 나무 꽃살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창호지를 투과한 고요한 빛, 천천히 스며드는 아름다움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내 안의 꽃
우리는 대부분의 정보를 눈으로 받아들인다. 감각 능력이 시각을 중심으로 발전한 것은 전기의 발명과 조명의 혁신 때문이기도 하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눈을 통한 정보 수용 능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둠보다 밝음, 흐릿함보다 선명함을 선호한다. 의학의 발전에 따라 위생에 예민해진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욱 청결에 집착하게 되었다. 얼룩덜룩한 것보다 말끔한 것이, 거친 것보다 매끈한 것이 건강에 유리하고 안전하다고 믿었다. 밝고, 선명하며, 깨끗하고, 매끈한 것에 대한 지향은 모더니즘의 이상이었지만 마침내 아름다움의 조건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얼룩이나 지저분한 것은 현대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다는 관념이 생겼다.
프랑스의 사상가인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는 “에로틱한 것의 본질은 더러움에 있다”고 했다. 현대적 청결은 에로틱함을 상실하게 한다. 에로틱이란 본래 성애sexual love를 뜻하지만, 호기심이나 신비로움 따위의 정서적인 영역까지 함축한다. 우리는 얼룩이나 그을음, 자연현상에 따른 오염, 그것을 연상시키는 색조나 질감에서 정서적 편안함을 느낀다. 말끔하지 않은, 매끈하지 않은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심미안도 존재한다.
초목이 가장 초목답고 아름다운 때는 언제일까? 싹이 틀 때, 꽃이 필 때, 열매를 맺을 때, 낙엽이 지고 줄기가 말라 갈 때? 자신의 가장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는, 가장 아름다운 때는 언제인가?
종교 건축은 화려하다. 기독교의 교회가, 불교의 사찰이, 이슬람교의 모스크가 그렇다. 일본의 신사나 민간의 신당(성황당 등) 역시 화려하다. 천국의 모습과 교리를 내포한 각종 상징으로 장식되기 때문이다. 신자가 아닌 이들은 갖가지 조미료와 향신료가 듬뿍 들어간 이국의 음식을 접할 때처럼 이질감과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매화꽃살은 단청의 퇴색 때문인지 그저 쓸쓸하고 소박하다. 스스로 꽃이라고 나서지 않고 보는 이와 공감하듯 세월 속의 낡음과 담담함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찰나의 꽃
모든 것은 없어진다. 희미한 흔적이라도 남나 싶지만 끝내 사라진다. 아름다움은 그때, 그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시가 탄생하는 순간과도 같다. 찰나의 섬광처럼! 그때 이후에는 다시 그렇게 빛날 수 없는 날카로운 한순간을 완성한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지지만, 그 봄에 그 꽃을 보지 못했으면 그뿐. 그 시절, 그 꽃살 또한 다시 볼 수 없으니 찰나의 이미지를 마음으로만 되새길 뿐이다.
※ 박현택은 홍익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국립중앙박물관에 근무했으며, 현재 연필뮤지엄 관장이다. 쓴 책으로 <오래된 디자인>, <보이지 않는 디자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