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톡홀름 그리고 강릉.
두 도시를 아우르는 미식의 본질은 자연의 흐름대로,
지역성을 존중하며 요리한다는 것.
그렇게 강릉의 셰프는 이곳에서
새로운 문화를 이루고 미래적 전통을 그려나간다.”
옛날에는 천연 염전이 있었다는 안목해변. 그래서 과거 이곳 사람들은 일이 잘될 때 “젠주 염전되듯”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낯선 옛 표현을 내가 곧 외치게 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해변 인근의 미트컬쳐에 방문하기 전까지는.
말린 대구 껍질을 전등갓으로 장식한 이곳에서 독특한 분위기를 감지한다. 불을 켠 조명은 반짝거리는 물고기가 실재하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한다. 우리는 여기서 어떠한 ‘고기’와 ‘문화’를 음미할 수 있을까. 이윽고 스웨덴식 애피타이저인 ‘헤링’을 맛보는 순간 바다에서 청어가 팔딱거리듯 입맛이 살아난다. 동해의 청어가 어선에서 항구로 그리고 생물에서 절임이 되어 ‘헤링’으로 완성되기까지, 최소 4일의 여정이 배 속으로 꿀꺽꿀꺽 들어가며 또 다른 여행이 된다. 스웨덴 전통 방식의 인라그드 실inlagd sill(청어 절임)은 딜과 레몬, 버터 그리고 많은 양의 소금을 넣어 삶은 알감자와 삶은 달걀, 바게트 슬라이스와 함께 먹는데 식감이 이채롭다. 디종머스터드와 마요네즈를 섞은 디조네즈 소스와도 완벽하게 어우러진다.
물고기 다음은 육고기다! 한 접시에 미트볼, 감자퓌레, 스웨덴식 오이피클, 크랜베리잼이 담겨 있는 ‘스웨디시 미트볼’. 미트컬쳐의 김지윤 매니저가 안내한 대로 네 가지를 조금씩 덜어 한입에 쏙 넣는다. 그리고 외친 말은 “젠주 염전되듯!” 넷의 조화가 환상적인데다 스웨덴으로 순간 이동한 것 같다. 동일한 양의 소고기와 돼지고기에 볶은 양파와 주니퍼베리 등을 넣고 잘 치대 빚은 큼직한 미트볼은 직접 만든 데미글라스소스에 크림과 버터 등을 넣고 졸인 그레이비소스가 뿌려져 나온다.
‘오늘의 생선 요리’는 당일 아침 매입하는 생선에 따라 달라지는 메뉴. 생선마다 조리 방식과 가니시, 소스를 전부 다르게 변주한다. 겨울철 별미인 곰치는 뜨끈한 스튜로, 대구는 부야베스(생선을 비롯해 해산물 등을 넣고 끓인 프랑스식 스튜로 특히 마르세유에서 유명하다)로, 농어는 구워서 시트로넷citronette 소스(레몬 껍질로 만든 콩피와 과육을 함께 재운 후 갈아서 올리브 오일과 섞는다)와 판차넬라(이탈리아 토스카나식 샐러드로 빵과 채소를 버무린다)를 곁들이고, 우럭은 소금구이로 홀랜다이스소스와 함께 내는 식이다. “이른 아침 주문진항에서 생선을 사다 이런저런 요리하는 게 즐거워서 시작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손님들 사이에서 피시컬쳐’라는 별명이 생겼을 정도로 인기예요. 그래서 요즘은 생선을 오션미트라고 열심히 우기고 있죠.” 최종원 오너셰프가 웃으며 이야기한다.
그로서리로 운영하는 찬장의 어느 칸에 말린 생선 꼬리가 전시되어 있다. 유독 눈에 띄는 거대한 꼬리. 무려 길이 3m, 무게 500kg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청새치의 일부였다. 이런 청새치가 동해에서도 잡힌다니! 그날의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동해안 최대 어항인 주문진항에 정박하는 어선 중 유난히 시선을 끄는 어장배. 해상에 정치망(일정 기간 특정 장소에 부설하는 어구)을 설치해 매일 건져 올리는 작업을 하는 어선을 일컫는다. 어장배는 주문진에서 계절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존재다. 철마다 이곳 바다를 누비는 생선을 가득 실어 오기 때문이다. 그날은 평소 가동하지 않던 배 안의 크레인이 움직이고 많은 사람이 몰려 있어서 종원 셰프와 지윤 매니저는 고래라도 잡은 줄 알고 구경에 나섰다.
“처음에는 얼핏 크기만 보고 돌고래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말로만 듣고 책에서만 보던 청새치였죠.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와 강릉이 맞닿은 찰나였습니다. 고래 같은 거대한 생명체를 동경해온 저에게는 온몸에 전율이 흐를 만큼 진귀한 순간이었어요.”(최종원 오너셰프) 이곳에서는 이렇게 거대한 청새치가 여름철에 한두 마리씩 그물에 걸려 올라온다고 한다. 특이한 생선을 보면 무조건 구매하는 그는 그렇게 ‘잇템’을 손에 넣었다. “처음에는 황새치와 맛이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외국에서 일할 때 먹었던 황새치구이가 정말 맛있었거든요. 그런데 이 녀석은 손질해서 구웠더니 말도 못 하게 질겼습니다.” ‘숙성이 되지 않아서 퍽퍽하구나’라고 생각해 다음 날 그리고 그다음 날까지 실험을 거듭했으나 결과는 “으악, 맛이 하나도 없어!”였다고. ‘아, 앞으로 한 달 치 직원 식사감이다’라며 좌절하기도 했다. 500kg나 되는 청새치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골몰하며 계속 도전한 끝에 문득 세비체가 떠올랐다. 살이 탄력이 좋은데다 비린내도 전혀 없어 요리를 완성하고 나니 마치 세비체를 위해 태어난 생선처럼 아주 잘 어울렸다고 한다. 그래서 작년부터 여름마다 청새치로 세비체를 만든다.
종원 셰프는 청새치를 처음 본 날의 감동을 기억하고자 꼬리를 박제했다. “고래 꼬리는 좋은 의미를 여럿 갖고 있다고 들었어요. 예전에 아이슬란드를 여행하면서 산 고래 꼬리 모양의 작은 돌이 있었거든요. 바닥에 떨어져 깨져버린 것이 못내 아쉬웠는데, 청새치의 꼬리는 이를 대체할 훨씬 크고 더 멋진 녀석이었죠.” 그는 그 이후로 다른 생선의 꼬리도 기념하기 시작했다. 30kg짜리 다랑어, 5kg 미만의 다랑어 그리고 고등어 꼬리까지. 서늘하고 해풍이 잘 통하는 곳에 매달아 말린다. 고래 꼬리의 의미처럼 가족의 건강과 행운 그리고 미트컬쳐의 번영을 기원하면서.
강릉 토박이인 종원 셰프는 요리를 시작하면서 커리어를 쌓기 위해 서울과 미국 코네티컷,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등지에서 오랫동안 타지 생활을 했다. 언젠가는 강릉으로 돌아와 자신의 꿈을 펼쳐보고 싶다는 생각은 늘 품고 있었다. 그러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결심을 굳히기에 이른다. “스톡홀름은 자연환경이나 지역사회의 분위기, 심지어 청어나 대구 같은 로컬 식재료까지, 강릉과 비슷한 부분이 굉장히 많아요. 그렇다면 내 고향에서 지금 하는 요리를 못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스톡홀름에서 가족이 있는 강릉으로 돌아와 2019년 미트컬쳐를 열었다.
종원 셰프가 본 스웨덴 사람들은 대부분 가족적이고 고향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많은 이들이 나고 자란 곳에서 쭉 살거나 다시 돌아와 삶을 꾸리고 있었다고. 수많은 전통이 선대에서 후대로 이어진다. 특히 미드솜마르(1년 중 낮이 가장 긴 하지에 열리는 축제)에는 남녀노소 모두 메이폴maypole(꽃과 풀로 장식한 기둥)을 둘러싸고 개구리춤을 추며, 절인 청어와 삶은 감자, 갓 수확한 딸기 그리고 전통주 슈납스schnapps를 먹는다. 기술 분야의 최첨단을 달리는 스웨덴이지만, 구성원 모두가 전통을 지켜가려 노력하고 또 즐기는 모습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레스토랑 신에서는 멧돼지나 사슴, 청둥오리 등을 사냥해서 요리하는 문화가 여전히 남아 있다. 비록 스웨덴의 겨울은 길지만 우리나라처럼 사계절과 바다가 존재한다. “제철에 걸맞은 요리를 하는 전통을 이어온 레스토랑에서는 자연스럽게 활력과 생기가 넘쳐나요. 스톡홀름에서 수셰프sous chef로 근무한 스막Smak 역시 마찬가지였죠.”(최종원 오너셰프) 그도 제철 식재료로 요리하는 전통 있는 식당을 만들고자 다짐했고, 강릉의 미식 신에서 특유의 문화를 이루고 있다.
“미트컬쳐는 이 지역에서 친숙하고 신선한 식재료를 활용해 다양하고 이국적인 맛을 내는 요리를 추구합니다. 제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고향의 재료와 제가 바깥세상에서 가지고 돌아온 경험을 만나게 하는 거죠. 고가의 고급 재료보다는 저평가된 식재료를 활용해 새롭고 다채로운 요리를 선보이려 합니다. 크게 관심받지 못하거나 버려지는 재료를 보면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해요.” 이러한 면모는 최근 미트컬쳐를 그로서란트로 확장한 면면에서도 드러난다. 미트컬쳐의 인하우스 그로서리인 컬쳐마트는 지역 재료로 만든 식료품뿐 아니라 식문화와 관련된 굿즈까지, 미식의 경험을 일상으로 넓혀준다. 현재 식료품은 동해에서 잡은 청어를 절인 ‘헤링’(유튜브 채널에 활용 레시피도 공개했다), 주문진읍 장덕리 복사꽃마을의 낙과를 화이트와인 시럽에 익힌 ‘민트복숭아.’ 이렇게 두 가지 병 제품이 출시되었다. 앞으로 앞치마와 키친크로스, 레시피 티셔츠 등 다양한 굿즈를 선보일 예정이다. 또한 세비체를 요리하며 생기는 아보카도 씨앗을 발아해 키우고 있는데, 강릉의 식물가게 ‘밀림’과 협업해 재활용 화분을 가져오는 손님에게 무료로 식재해주는 이벤트도 계획 중이다. “복숭아 낙과처럼 상품성이 없어 버려지는 대량의 제철 식재료를 가공할 방법을 찾기 위해 항상 노력하고 있어요. 지난여름 복숭아에 이어 가을에는 집 마당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열린 감과 모과가 숙제였죠.” 김지윤 매니저의 말처럼 이렇게 한 계절에 한 제품만 나와도 머지않아 풍부한 그로서리가 되지 않을까. 언제나 사람으로, 음식으로 풍성한 이곳은 지속 가능한 문화와 미래적 전통을 만들어나가며 강릉을 풍요롭게 한다.
또 다른 식재료
순두부청정한 강릉 앞바다의 바닷물을 간수로 넣어 만든 초당 순두부. 씹지 않아도 부드럽게 넘어가며 소화도 잘된다. 강릉에는 서로 원조라 주장하는 많은 순두부 식당들이 있고, 그 주장에 걸맞게 집집마다 고유한 레시피를 가지고 있다. 강릉에 왔다면 아침으로 순두부를 먹고 그날의 여정을 시작하자. 미트컬쳐는 점심과 저녁만 영업하니까.
감자‘감자국’이라 불릴 만큼 감자 생산량이 많은 강원도. 주산지인 평창이 강릉을 둘러싸고 있다. 강원도 내에서 상대적으로 대도시인 강릉은 주변 물류가 집결하기도, 소비되기도 하기에 원하는 품종의 감자를 가장 신선할 때 요리할 수 있다.
또 다른 맛감각
최종원 셰프 PICK
버드나무 브루어리 & 버드나무 크래프트 하우스수제 맥주를 양조하는 브루어리와 손수 만든 식료품을 판매하는 크래프트가 나란히 자리한다. 강릉 사천면 미노리에서 수확한 쌀을 40% 이상 사용하고 고두밥 짓는 전통 술 빚기를 응용해 양조한 맥주 ‘미노리 세션’을 비롯해 주문진산 물가자미로 만든 가자미식해, 강원도 인제에서 재배한 루바브를 졸인 잼 등 지역과 상생하는 풍미로 유명하다.
김지윤 매니저 PICK
사라미트컬쳐가 동해안의 자연산 해산물을 서양식으로 재해석한다면, 사라는 지역 해산물을 일식으로 풀어낸다. 고성산 단새우 사시미와 감태, 주문진산 오징어 가라아게 등 신선한 지역 재료에 탄탄한 일식 스킬을 입혀 캐주얼하지만 기본기가 날카롭게 살아있는 메뉴들이 일품인 이자카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