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여행은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기도 하고,
어제처럼 평범한 날로 은근하게 스며들어 먼 훗날 떠올렸을 때 큰 울림을 주기도 한다.
또 누군가에게는 오로지 하나의 주제만이 여행을 떠나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 모든 여행에 찬사를 보내며, 영감을 준 여정에 관한 여행자 3인의 이야기를 마주해본다.
BERLIN
여행은 환풍기다. 일상을 환기하고 순환하는 시간. - 박규리 작가
KYOTO
여행이란 ‘나’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여정, 그렇게 확장되는 세계. - 송은정 작가
LONDON
그곳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 나에겐 그것이 여행.- 이민희 작가
낯설게
살아가기
일상을 소재로 다양한 아트워크를 이어가고 있는 박규리 작가. 켈리박Kelly Park이라는닉네임으로 활동하며 동명의 스튜디오를 운영한다. 여행과 음악을 그림 작업에 있어 영감의 원천으로 삼고 낯선 분위기 속에서 기꺼이 유영한다. 베를린에서 머물렀던 한 달은 그녀의 삶을 얼마나 깊고 넓게 변화시켰을지, <마인 베를린>이라는 책에 담아내기도.
당신에게 깊게 각인된 첫 여행에 대한 기억이 궁금해요.
첫 여행은 제 삶을 송두리째 바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스물한 살, 학부 1학년을 마치고 런던으로 어학연수를 떠난 것이 생애 첫 해외여행이었는데 호기심이 왕성했을 때라 처음 비행기를 타면서 직항이 아닌 일본 경유 항공권을 선택했죠. 부모님의 걱정을 뒤로하고, 일본에서 라멘을 먹고 가겠다는 계획이었어요. 무사히 런던에 도착했고, 단순한 영어 공부가 아니라 전혀 다른 문화에 눈을 뜨고 영감을 받게 되었죠. 어렸을 적부터 아기자기한 것들을 좋아했는데, 막연히 3층짜리 건물을 그려놓고 1층에는 카페, 2층에는 갤러리를 만들고, 3층엔 내가 살아야지 하고 상상을 했어요. 지금으로부터 딱 20년 전이네요. 그런데 도착한 런던에는 제가 상상하던 공간이 ‘편집숍’이라는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어요. 1년 동안 그런 곳들을 찾아보는 것이 일과가 되었고, 귀국한 후에 복학 대신 ‘해피플레이즈’라는 작은 편집숍을 차리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이 경험은 이후에도 제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죠.
여행지에서 한 달 살기 프로젝트를 시작했죠.
지금에야 디지털 노마드라는 단어가 흔해졌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어요. 그때 저는 ‘떠돌이가 꿈이에요’라고 말하곤 했어요. 생각해보면 태어나 죽을 때까지 태어난 나라에서만 사는 경우가 많죠. 문득 내가 선택해서 여기에 태어난 게 아닌데 지구본을 돌려 보면서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직업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다양한 나라를 경험해보면서 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어요. 마음 같아선 어느 나라에서든 1년씩 살아보면 참 좋겠지만, 제 여건상 그럴 수는 없고 한 달 정도는 가능하겠더라고요. 그래서 겨울엔 따뜻한 나라로, 여름엔 시원한 나라로 떠나 사는 것이 제 삶의 목표가 되었죠.
베를린을 어떻게 선택하게 되었나요. 처음 베를린에 잠깐 머물렀을 때와 다시 베를린에서의 한 달 살기를 시작했을 때, 어떤 점이 다르게 다가오던가요.
몇 년 전 파리에 가기 전 베를린에 며칠 스치듯 머물렀던 적이 있어요. 바르셀로나에서 베를린으로, 베를린에서 파리로. 바르셀로나는 계절도 정취도 아름다운 곳이었는데, 물가도 아직은 괜찮은 편이라 여행하기에 꽤 즐거운 곳이에요. 그에 비해 파리는 멋지고 예쁜 것들이 발에 치이는 곳이랄까. 아마 영원히 여자들에게 사랑하는 도시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베를린은 좀 특이한 인상을 남겼어요. 무척 담담하다고 할까요. 달리 말하면 조금 심심해 보이는 도시일 수 있는데, 그 점이 매력적이었어요. 여기서 지내보자 불쑥 생각이 들었고, 한달 동안 일상을 살아보자 마음먹었죠.
그곳엔 당신만의 아지트가 생겼나요.
한 달은 아주 얕게나마 일상을 살아볼 수 있는 시간이죠. 보통 첫 주에는 우왕좌왕해도 2주 차부터는 생활 루틴이 나오기 마련이니까요. 전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커피를 마시며 스케줄을 정리하거나 짧은 노트를 쓰곤 하는데, 숙소 근처에 단골 카페를 만들어서 아침마다 들르곤 합니다. 짧은 아침 산책과 커피, 노트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어요. 이번 베를린 여행에서 가장 자주 들른 곳 역시 숙소 근처 스틸 빈티지 바이크 카페였죠.
취향에 부합했던 예술적인 공간과 그곳에서 눈여겨보면 좋을 만한 부분을 공유해주세요.
제가 집필한 책 〈마인 베를린〉의 ‘Day 9 신국립미술관과 숨은 갤러리들’이라는 챕터에서 소개한 장소들을 얘기하고 싶어요. 신국립미술관은 너무 유명한 곳이라, 수많은 여행자가 방문하는 미술관 중 하나죠. 그런데 신국립미술관을 나오면 강변을 따라 갤러리들이 숨어있어요. 숨어있다는 표현이 맞는 것이 간판은 작고 벨을 눌러야 문을 열어주고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가서 중정을 거쳐 계단을 올라가야만 갤러리에 들어설 수 있거든요. ‘여기가 맞나?’ 싶은 지점에서 벨을 눌렀을 때 예상치 못한 수준 높은 현대미술 작품이 눈앞에 펼쳐지죠.
그렇게 우연히 만난 장소나 만남이 특별한 영감이 되어줄 것 같은데요.
여행지에서는 종종 저도 모르는 다른 자아가 불쑥 튀어나오곤 하는데, 그날은 타인에게 말을 잘 거는 자아가 튀어나왔어요. 플리마켓에서 마음에 드는 일러스트를 발견하고 한참 구경을 했는데 마침 작가 부부가 셀러로 나와 있더라고요. 반가운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작업실로 초대를 받았어요. 그들의 작업 공간에 들어가 아주 프라이빗하게 작품을 감상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있어요. 그러다 한국에서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었죠. 생각해보면 여러 우연이 모여 만들어진 만남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중에 한국에 와 그 작가의 개인전을 관람한 뒤 그들에게 인증 사진을 보냈던 일이 떠오르네요.
베를린에서 매일의 일상을 여행하듯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맞아요. 어느 순간 처음 도착했을 때의 설렘은 사그라지고 때때로 지루함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때가 바로 진짜 일상처럼 여행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해요. 한국에서의 생활 패턴이 반복되고, 베를린에서의 이야기를 담아낼 책의 집필을 위해 사진과 원고를 틈틈이 정리하면서. 그러다가 찌뿌둥한 날에는 맛집을 찾아 나서고, 어떤 날에는 호텔을 예약해서 호캉스를 다녀오기도 했어요. 하하. 그렇게 일과 생활이 자연스럽게 섞이는 생활형 여행이 시작된 거죠.
그 여행 이후 작가님의 그림에는 어떤 변화가 찾아왔나요.
그림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그동안은 텍스트를 소재로 작업을 해왔으나, 베를린 여행 이후에는 텍스트로 쓰이던 일상들이 사물과 정물로 등장하게 되었고 그 사물들 사이에 포스트잇이나 메모지, 와인의 라벨 같은 곳에 장난스러운 메시지처럼 전하고 싶은 내용들을 숨겨놓았죠. 요즘엔 ‘케이크’ 시리즈를 작업 중에 있어요. 테이블 위에 케이크와 함께 제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을 같이 배치함으로써 매일의 일상이 특별하기를, 축하할 일이 생기기를 바라며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박규리 작가는 켈리박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미술 작가로, 텍스트와 드로잉의 경계를 넘나들며 여행하듯 그녀만의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일단 멈춤
에세이스트 송은정을 설명하는 또 다른 단어들은 산보객, 아웃도어 내향인 그리고 식물성 홈베이커. 그녀가 그간 선보였던 책들을 보면 그 수식어가 단번에 이해가 된다. 여행을 통해 멈추고 나아가고, 떠나고 돌아오는 일을 반복하는 그녀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우리가 교토를 사랑하는 이유>라는 책의 속도에 맞춰 여행을 해보는 일도 좋겠다.
과거 당신이 운영했던 ‘일단멈춤’이라는 책방의 이야기를 참 좋아했어요. 골목길 작은 책방이 주는 위안이 참 따뜻하다고 느꼈어요. 당시 여행 책방을 시작하는데 계기가 된 것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합니다.
배낭여행을 다니며 책과 여행이 무척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상상해본 적 없는 세계와 사람을 만나기 위해 배낭을 꾸리고, 머리맡에 책 한 권을 놓아두는 것처럼요. 삶의 힌트가 될 조약돌을 줍게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또한 책과 여행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죠. 당시 책방을 열기까지 특정 인물이나 장소에 영향을 받기보다는 여행에서 얻은 긍정과 낙관, 모험심이 슬며시 등을 떠민 게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렇다면 책방 문을 닫기로 결심했을 때 당신을 위로한 여행이 있었나요?
문을 닫기 직전까지는 필사적으로 책방을 운영했기에 여행은 엄두도 내지 못했어요. 하루의 동선이 집과 책방뿐이었거든요. 대신 폐업 날짜가 정해지자마자 아이슬란드와 시칠리아로 떠나는 한 달 여행을 계획했어요. 대자연과 마주하며 나라는 아주 작은 존재를 인식할 수 있었던 아이슬란드 링로드 일주 경험은 무거웠던 마음을 홀가분하게 털어주는 계기가 되었고요. 뒤이어 시칠리아로 이동하고 난 뒤에는 세상의 모든 고민과 걱정을 말려버리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 자유를 맛보았죠.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두 여행지의 조합이 크나큰 위로가 될 줄은 몰랐어요.
작은 동네 책방의 모습이 왠지 작가님 책에 등장한 교토의 분위기와 닮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교토의 아침을 무척 좋아합니다. 특히 ‘킷사텐’에서 보내는 아침을요. 킷사텐은 20세기 초 일본 쇼와시대의 레트로한 분위기를 간직한 커피숍이에요. 유니폼을 입은 마스터, 핸드드립 커피, 나폴리탄 스파게티, 타마고산도 등이 킷사텐을 상징하는 것들이지요. 교토에는 이런 오래된 킷사텐이 골목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데요, 대부분이 모닝 메뉴를 판매하고 있어요. 문을 열고 들어서면 혼자 온 동네 어르신들이 꼭 눈에 띄어요. 스마트폰 대신 종이 신문을 읽거나 수첩에 무언가를 골똘히 쓰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저런 어른이 되고 싶다, 생각하게 되지요. 자신의 아침을 각별히 여기는 태도가 참 의연해 보인달까요. 매번 감탄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침을 활기차게 시작하기 좋은 교토의 킷사텐을 추천받고 싶습니다.
먼저, 교토 중심가인 기온에 위치한 야마모토 킷사입니다. 클래식한 킷사텐의 방식을 따르면서도 여행자가 접근하기 쉬운 젊은 분위기입니다. 달걀찜처럼 촉촉하게 익힌 오믈렛을 넣은 타마고산도를 꼭 경험해보세요. 그리고 1940년부터 교토의 커피 문화를 발전시켜온 이노다 커피 본점도 좋아요. 특히 호텔 조식 못지않은 아침 메뉴로 유명한데요. 주말에는 오전 7시부터 웨이팅이 있을 만큼 인기입니다. 고풍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교토를 상징하는 조식의 정석을 맛볼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는 안쪽을 오려낸 식빵에 삶은 달걀, 오이, 햄, 감자샐러드 등을 채워 넣은 명물 토스트로 든든하게 아침을 시작할 수 있는 커피하우스 마키입니다. 묵직한 원목 테이블과 벽면의 커다란 괘종시계, 적당한 소음이 빚어내는 이곳만의 리듬이 활기를 불어넣어줍니다.
얘기를 듣다 보니, 교토 여행이 작가님의 인생에 가져온 크고 작은 변화들이 있을 것 같군요.
오래된 것을 아끼는 마음, 타인을 위해 집 앞을 깨끗이 유지하는 세심함, 조급해하지 않아도 되는 버스의 느긋한 질서, 혼자 온 손님을 4인용 테이블로 당연하게 안내하는 태도, 자신만의 관점으로 운영하는 로컬 상점의 뚝심. 무심코 보고 듣고 경험한 교토에서의 모든 장면이 저의 생활을 돌아보고 재구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사소할수록 더욱 사려 깊게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달까요.
최근 작가님의 작업에 관해 들어보고 싶습니다. 어떤 일들에 빠져 있는지 어떤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지 등이 궁금합니다.
지난 12월에 〈우리가 교토를 사랑하는 이유〉라는 일본 교토 여행서로 독자분들과 인사를 나눴는데, 코로나19 이후 출간된 여행서인 만큼 감회가 무척 새로웠어요. 책에는 관광지에서 한 발짝 벗어난 골목의 소담한 풍경, 그곳에서 일상을 일구는 사람들과 교토만의 멋이 담긴 상점들이 두루 담겨 있죠. 책을 통해 뜻밖의 발견과 기쁨을 누렸으면 하는 바람도 함께 담았어요.
영감을 주는 여행이라는 이야기를 들으셨을 때 어떤 장소와 경험이 가장 먼저 떠올랐나요?
앞서 제 책을 통해 뜻밖의 발견과 기쁨을 누리셨으면 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제가 여행을 사랑하는 이유이자 영감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감탄하는 마음’을 잃지 말자는 게 제 삶의 중요한 모토인데요. 그 마음이 평범한 매일을 빛나게 만들어준다고 믿습니다. 지금까지 써온 모든 글 역시 감탄하는 마음이 찾아낸 의외의 발견을 기반으로 쓰였고요. 그 마음만 있다면 아이슬란드에서 오로라를 목격했던 순간만큼 강원도 고성의 밤하늘 또한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어느 곳, 어느 시간에 놓여 있든 수시로 영감이 찾아오지요.
결국 여행이 지금의 당신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학 졸업 후 떠난 첫 배낭여행에서 한 달간 파리에 머문 적이 있어요. 매일 느지막이 일어나 동네 주변을 산책하고, 점심 도시락을 챙겨 파리 골목 구석구석을 헤매던 그 시간이 지금 제 여행 방식의 근간이 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프랑스어를 구사하지 못한 제게 갤러리와 도서관, 서점은 영혼의 휴식처였어요. 덕분에 말동무 한 명 없는 타지에서 외롭지 않을 수 있었지요.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 또한 어렴풋하게 배웠던 것 같고요.
송은정 작가는 〈저는 이 정도가 좋아요〉, 〈오늘, 책방을 닫았습니다〉, 〈빼기의 여행〉 등 다수의 책을 썼다. 영화 〈런치박스〉의 대사처럼 때로는 잘못된 기차가 우리를 바른 목적지로 데려다줄 것이라 믿는다.
치즈가
좋아서
파리 콩코르드 광장 뒷골목, 우연히 만난 치즈 상점에서 어떤 영감을 받고 시작된 여행이 있다. 치즈를 따라 여행하다 보니 그들의 삶과 문화가 보였고 덕분에 치즈가 더욱 좋아졌다는 이민희 작가의 고백이 사랑스러워, 나는 어느 한 가지에 매료되어 여행해본 적이 있던가 그간의 여행을 떠올려보게 된다.
한 가지 주제를 깊이 파고드는 여행을 동경합니다. 작가님의 이번 〈치즈〉 책을 읽으면서 어떤 연유로 치즈에 매혹이 되었으며, 어떤 여행을 통해 보다 깊이 치즈에 빠져들었는지 호기심이 일었어요.
인생 첫 배낭여행을 혼자 유럽으로 떠났어요. 2001년이었고 프랑스 파리를 여행하고 있었죠. 에펠탑이 반짝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왠지 내가 원했던 모습은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계속 드는 거예요. 그들이 사는 진짜 삶의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관광지에서는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던 거죠. 그런 생각을 하며 사람들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동하던 중이었는데, 눈앞에 뭔가 번쩍하고 불빛이 켜지는 거예요. 콩코르드 광장 인근의 시장이었고, 저녁 무렵 시장 길을 따라 붉은 전등이 불을 밝히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시장 입구에 있던 치즈 가게를 만나게 된 겁니다. 치즈를 사는 파리지앵을 보면서,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저 치즈만 따라가다 보면 이 나라 사람이 무얼 먹는지, 어떻게 사는지 알 수 있겠다 하는. 그렇게 치즈를 따라간 여행이 시작됐고, 만으로 스물넷이었죠. 그리고 서른이 되었을 때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파리로 떠났습니다. 오로지 치즈를 만나기 위해서였죠.
그렇게 진짜 치즈 여행이 시작된 거군요.
서른은 제게 있어 변화의 시작점이기도 했어요. 회사를 그만둘 용기가 필요했고 새로운 도시에 적응하기 위한 일종의 치열함도 필요했죠. 면허를 땄고, 소르본 대학 인근에 거주를 했고, 알리앙스 프랑세즈 학원에 다니며 프랑스어를 배웠어요. 근처 시장을 오가며 5곳의 치즈 가게를 들락거렸고, 좀 더 그들 삶으로 들어가고 있었죠. 그러다 마침내 자동차와 텐트를 빌려 캠핑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영국으로 치즈 여행이 확장될 무렵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당시엔 영국이 치즈로 유명하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어요. 파리에서는 영국 체더 치즈에 대해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았으니까요. 파리 몇 해 뒤에 이탈리아를 그리고 또 몇 해 뒤엔 만체고 치즈를 만나기 위해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났어요. 5월이었는데, 날씨는 점점 뜨거워지더니 한낮 기온이 40℃를 육박하기에 이르렀죠. 스페인 치즈 농가의 뜨거운 열기를 피하기 위해 잠깐 런던으로 피신해 있자는 심산이었어요. 정말이지, 그곳에서 영국의 전통 치즈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던 거죠. 그 여행에서 닐스야드를 알게 되었어요. 만드는 과정 마지막에 치즈에 천을 씌워 완성하는 영국 치즈와의 만남, 그건 제게 두 번째 영감을 준 여행으로 기억됩니다. 몇몇 가게 중에서 규모가 큰 곳을 찾아 촬영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런던에서 점점 교외로 나아가면서 치즈 메이커와 만나고 그들의 소박하고 진정성 있는 삶을 마주하게 됐죠.
영국을 여행하면서 만난 사람들 중 특히 더 기억에 남는 이가 있나요?
영국 중북부 지역을 여행할 때였어요. 이 지역에서 만드는 랭커셔 치즈는 독특한 풍미를 가지고 있어요. 이곳에서 만난 그레이엄의 치즈 역시 닐스야드에서 매입한다고 했어요. 치즈 제조 중 거대한 스테인리스 탱크에 우유를 담고 산성 성분을 첨가한 뒤에 응고가 되기를 기다리는데, 이 시간에 아침식사를 하는 게 보통이에요. 그레이엄을 따라 빨간 벽돌의 처마가 낮은 집으로 들어서니 부모님이 한창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베이컨과 영국식 파이, 달걀 반숙과 샐러드 등을 준비하는데 문을 여는 순간 입맛을 돋우는 기름 냄새가 확 풍겨 나왔어요. 고백하자면 그 농장에 머물던 며칠 동안 그 집에서 먹는 아침밥을 기다리게 될 정도였죠. 따뜻한 아침을 차려주는 마음이 치즈에도 담겨 있었어요. 캠핑을 하며 치즈를 따라 여행 중이던 제게 내내 자신들 집에서 자고 가라고 얘기를 했어요. 영국의 9월은 꽤 쌀쌀해서 걱정이 된다는 이유에서였죠. 그 따뜻한 마음이 내내 제 마음에 남아 있어요.
그 마음이 제게도 전해지는 것 같아요.
그런 그레이엄이 마지막에 제게 이런 말을 했던 게 기억나는군요. “치즈를 만드는 사람은 다 미쳤어. 민희 너도 미쳤어. 여기까지 치즈를 찾아온 너도 그렇다”라고요. 하하하. 틀린 말은 아니죠.
여행에서 만난 영국 치즈는 어떤 맛과 특징이 있었나요.
치즈는 질감으로 맛을 본다고 할 수 있어요. 와인을 향으로 맛보듯이 치즈는 손으로 만져 질감으로 맛보죠. 신기하게도 치즈마다 질감이 달라요. 냉장고에서 꺼낸 치즈를 손에 올려놓으면, 손에서 녹으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질감을 표현해요.
다음번 당신의 여행이 궁금한데 말이죠.
치즈 자체가 좋아서 시작한 여행이었고, 어떤 계산도 없이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치즈 원고를 붙잡고 있는 사이에 아이 둘의 엄마가 되었고, 책을 통해 이렇게 또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이 제법 의미 있는 일로 남았죠. 여행은 타인의 삶을 보고 나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일상을 온전히 내려두고 여행길에 올랐던 당시에는 관광지가 전혀 중요하지 않았어요. 베네치아의 기사 식당에서의 소란스러운 한 끼, 시골 동네 노포에서 만나는 할머니의 손맛, 이렇게 생활과 밀접한 것들이 훨씬 더 의미 있었어요. 다음번 여행에 대한 기약은 없지만, 삶에 들어가 여행하고 있을 것이란 사실은 분명하죠.
이민희 작가는 그저 치즈가 좋아 시작한 치즈 공부를 어느새 반평생 동안 하고 있다. 최근 〈치즈: 치즈가 좋아서 떠난 영국 치즈 여행기〉 책을 통해 영국 여행에서 만난 치즈,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